‘떡집 은퇴하면 사찰 봉사’ 서원
“뒤늦은 신행생활 무척 즐거워요”

명락사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정태유 불자.
명락사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정태유 불자.

천태종 서울 명락사(주지 자운 스님)에서 신행활동을 하고 있는 정태유(69) 불자는 어렸을 적부터 지독한 가난과 싸우며 가족을 건사하느라 부처님 법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는 늘 마음속에 ‘은퇴를 하면 꼭 부처님 도량에서 봉사를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 다짐처럼 은퇴 후 명락사에서 꾸준히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는 정태유 불자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고1 중퇴, 직업전선 뛰어들어

정태유 불자는 1954년 11월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가정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바쁜 농사일로 인해 따로 종교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초하루·보름마다 동네에 위치한 사찰을 찾곤 했다. 정태유 불자도 여섯 살 무렵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찰을 찾았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기에 자주 따라가지는 못했다. 화동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001년 폐교)·경주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주상업고등학교(현 경주정보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학생회비·교재비 등을 제때 납부하지 못해 고등학교 1학년 때 중퇴를 하고 만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17살의 나이에 부산으로 가 자동차용품을 파는 가게에서 일을 했다. 이곳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동네 형과 함께 잠깐 일한 곳이었다. 이후 3년 동안 성실하게 일한 그를 높이 평가한 사장은 함께 가게를 운영하자고 동업을 제안했다.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제법 모은 돈으로 대박을 꿈꾸며 동업 제안을 수락했다. 열심히 가게를 운영했지만, 직원으로 있을 때와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변에 경쟁 가게가 생겨났고, 매출은 점점 떨어졌다.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일 년 만에 가게는 부도가 났고, 빈털터리가 됐다. 낙심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전화공사를 하는 사촌 형의 권유로 함께 일을 하며 지냈다.

“중학교 때까지 부모님의 일손을 돕거나 어린 동생들을 돌봤고, 고등학교 중퇴 후에는 먹고살기 바빠 종교생활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어머니 손을 잡고 가끔 찾던 절에서 맡은 향냄새, 은은하게 들려오는 독경 소리는 항상 기억 속에 남아있었죠. 남들은 ‘그래도 가끔 시간을 내서 절에 찾아가지 그랬냐?’고 하는데, 어휴 내 코가 석 자인데 절에 갈 여유가 있었겠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파 병원을 찾았다가 탈장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집에서 쉬고 있던 그에게 옆집 아저씨가 “아들이 서울에서 가게를 운영하는데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함께 서울에 올라가 일을 해 보자.”고 제안했다. 딱히 하는 일이 없었고, 아저씨의 아들이 중학교 선배였기에 21살의 나이에 상경했다.

선배는 쌀·정육점·슈퍼와 떡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 쌀가게에서 경리와 쌀 배달을 했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에 일하던 가게 한편이나 다락방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다. 일 년이 지나자 선배가 지방으로 다른 일을 하러 간다면서 그에게 가게와 떡집을 맡아보라고 했다. 몇 년 전 사업 실패의 경험이 있던 그는 거절했지만, 가게 인수 대금은 일을 하면서 천천히 갚으라는 말에 결국 수락했다. 6개월 정도 가게를 운영했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밑천도 부족했기에 힘에 부쳤다. 결국 가게는 함께 일하던 친구에게 넘겼고, 떡집만 운영하게 됐다. 떡집 인수 대금도 일하면서 갚기로 했다.

정태유 불자가 2024년 부처님오신날에 사용할 장엄등을 제작하고 있다.
정태유 불자가 2024년 부처님오신날에 사용할 장엄등을 제작하고 있다.

떡집 운영하며 절에 떡 배달

생전 반죽 한 번 만져본 적 없이 시작한 떡 장사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떡집에서 어깨너머로 떡 만드는 법을 배웠고, 밤낮없이 떡을 쪄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떡 종류도 다양해져 떡국떡·가래떡·설기·절편·바람떡·꿀떡·시루떡 등 기본적인 떡과 오색경단·호박설기·무지개떡·두텁떡·약밥 등 생소한 떡도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했다. 1980~1990년대에는 목기에 떡을 담아 머리에 이고 배달을 했다. 당시 쌀 한 말이 8kg였는데, 떡으로 만들면 대략 10kg 가까이 됐다. 이 목기를 머리에 이고 떡집이 위치한 서울 관악구 인근 안 가본 곳 없이 배달을 했다. 그렇게 밤낮 없이 떡집을 운영하자 그의 떡집은 서서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단골손님들이 점차 늘어나 사랑방 찾듯 줄지어 방문했다.

떡집은 다행히 앞서 가게와는 다르게 장사가 꽤 잘 됐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떡집 문을 열었고, 밤 10시 문을 닫았다. 장사가 잘 될 때는 몇 날 며칠 밤을 새며 떡을 만들었다. 떡집을 하며 시골집 빚을 3년 만에 다 갚았고, 떡집 인수대금은 10년 만에 갚았다. 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며 가정도 꾸렸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떡집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행복으로 이끈 전환점이었다.

“떡집을 하는 동안 새벽에 문을 열어야 하니 친구들도 만나기 어려웠고, 잠도 편히 못 잤어요. 직원을 채용하면 월급을 줘야 하니 처음에는 혼자 떡을 만들고 배달도 했죠. 그러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운영했어요.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심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꾹 참고 일했죠. 묵묵히 함께 떡집을 운영해 준 아내에게는 지금도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아내와 언니·동생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천태불자였다. 특히 아내의 첫째 언니는 상월원각대조사님이 계실 때부터 구인사를 다녔는데, 그 영향으로 아내도 결혼 전부터 구인사를 비롯해 천태종 사찰에서 종교생활을 해왔다. 아내는 결혼 후에도 틈틈이 인근 천태종 사찰에 다녔고, 아내가 없을 때는 정태유 불자 혼자 떡집을 운영했다. 일 년 중 그가 마음 편히 절에 가는 날은 부처님오신날뿐이었다. 그 이유는 부처님오신날에 쓰일 떡을 직접 절에 배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처님오신날 즈음이면 서울지역 사찰 15곳에 떡을 배달했다. 그렇다고 마냥 절에 있을 수는 없었고, 떡을 배달하고 떡값을 받으면 일부를 종무원에게 등값으로 건네며 등을 달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절로 떡을 배달하러 이동했다. 그렇게 그는 2016년까지 약 40년간 떡집을 운영했다.

떡집을 그만 둔 이유는 자신과 아내의 건강 때문이었다. 부부는 떡집을 운영하면서 아픈 곳이 많아졌는데, 두 아들이 어엿한 성인이 돼 독립하면서 미련 없이 떡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떡집을 그만둔 후 그는 아내와 함께 관문사와 구강사를 다녔다. 특히 구강사에는 처형·처제가 신도회 간부를 맡고 있어서 더 자주 찾았다. 하지만 관문사나 구강사는 현재 살고 있는 관악구 봉천동과 거리가 멀어 오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인사에서 기도를 하던 중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났다. 바로 전정수 명락사 교무다. 그는 전정수 교무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면서 신뢰를 쌓았고, 전 교무의 권유로 집 근처에 위치한 명락사를 다니게 됐다.

그는 은퇴한 후에는 사찰에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오래전 마음속으로 세운 ‘은퇴를 하면 꼭 부처님 도량에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서원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알았던 전 교무가 주지 자운 스님에게 봉사회 가입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했고, 자운 스님은 정태유 불자의 사연을 듣고 흔쾌히 봉사회 가입과 활동을 승낙했다.

정태유 불자는 사찰 봉사활동 외에도 평소 경전 독송, 관음정진 등으로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정태유 불자는 사찰 봉사활동 외에도 평소 경전 독송, 관음정진 등으로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병원가는 날 빼곤 봉사활동

명락사 봉사회는 사찰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정태유 불자가 맡은 일도 전기·목수·배관·청소 등 다양하다. 인터뷰를 하던 날에도 내년 부처님오신날 사용할 봉황등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런 그를 바라보고 있자, 전 교무가 “정태유 불자님은 병원이나 가끔 개인적인 일을 제외하곤 매일 명락사에 오셔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귀띔했다.

“주변에서 ‘나이 먹고 봉사활동 하면 힘들지 않느냐? 이제 그냥 편히 기도하라.’고 걱정해 주세요. 그런데 정말로 전혀 힘들지 않아요. 40년 동안 마음 편히 신행생활을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할 수 있으니 너무 좋아요. 절에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아팠던 몸도 다 나은 기분이 듭니다. 아내도 다른 약속이 있어 집에 늦는다고 하면 잔소리를 해도, 봉사회 활동 때문에 늦는다고 하면 아무 말도 안 해요. 되레 고생한다고, 절에서 자고 와도 된다고 한다니까요.”

그는 사찰 봉사활동 외에도 평소 집에서 〈법화경〉·〈반야심경〉 독송, 관음정진 등으로 수행하고 있다. 부모가 독실한 천태불자인 덕분에 두 아들도 어릴 때부터 구인사를 비롯해 천태사찰에 다녔고, 현재 명락사 청년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태유 불자는 은퇴 후 신행활동의 장점에 대해 “시간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게 절에 오가며 기도와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 또 아내와 함께 신행활동을 하니 젊었을 적 함께하지 못한 행복도 찾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곤 “단점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듯 답했다.

열일곱 살부터 예순두 살까지 본인의 청춘을 온전히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정태유 불자. 늦게나마 제대로 시작한 종교활동이 너무 재미있고, 지금도 계속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에 부처님 가피가 더해져 본인과 가정이 늘 행복하길 기원해 본다.

정태유 불자가 결혼 전부터 독실한 천태불자였던 아내와 관음정진을 하고 있다.
정태유 불자가 결혼 전부터 독실한 천태불자였던 아내와 관음정진을 하고 있다.
정태유 불자가 명락사 인근 거리에 달린 등을 살펴보고 있다.(왼쪽) 그는 명락사 뿐 아니라 전국 천태사찰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제주 해운사 감귤 수확을 돕고 있는 모습.
정태유 불자가 명락사 인근 거리에 달린 등을 살펴보고 있다.(왼쪽) 그는 명락사 뿐 아니라 전국 천태사찰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제주 해운사 감귤 수확을 돕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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