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따라다니던 불안·괴로움
그림을 수행 삼아 떨쳐냈죠!”

휘발성 강한 유화 물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사방의 벽은 부처님·꽃·오두막 등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작품마다 붓 자국이 선명했다. 한 가운데 놓인 이젤(Easel)에 다가가 보니 캔버스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겹겹의 물감이 덧칠해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몇 걸음 물러나 살펴보니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였다.

서양화가 조재익(60)은 지난 8월 ‘무경계(無境界·No boundary)’를 주제로 스물한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무경계란 곧 ‘나 없음’이며 ‘애씀 없는 노력’이다. 이를 캔버스에 드러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내면의 변화에 따라 그림도, 세계도 함께 변화한다.”고 말하는 그를 경기도 일산 작업실에서 만나봤다.

선배 권유로 미술 시작

조재익의 유년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안온한 시절이었다. 그는 1963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모부터 4대가 모여 살던 대가족의 장손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조선시대의 마지막 한 부분을 살았던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글을 깨칠 무렵부터 증조부는 그를 앞에 앉혀두고 직접 천자문을 가르쳤다. 집에는 아버지와 삼촌들이 어린 시절부터 읽던 각종 서적이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지역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나름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평안했던 생활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막을 내렸다. 집안을 이끌어야 했던 아버지는 유약했고, 갑작스레 떠안은 막중한 부담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자식을 먼저 앞세웠다는 충격 때문이었는지 이듬해 증조부와 증조모도 나란히 돌아가셨다. 그사이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힘든 현실의 도피처로 술을 택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아버지와 삼촌들, 가장의 역할을 대신해야 했던 어머니, 집안을 채우는 한숨 소리는 큰 부담이 되어 어린 조재익을 짓눌렀다. 친구들과 함께 뛰놀 때는 잠시 즐거웠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금세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

어린 조재익은 마음을 달래는 방법으로 독서를 선택했다. 집에 오면 다락방에 들어앉아 과거 삼촌들이 모아둔 〈사상계〉·〈문예춘추〉 등의 문학잡지와 〈삼국지〉·〈소나기〉 등의 소설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선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이 덕분인지 조재익은 ‘총명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랐다. 학업성적도 늘 상위권이었고,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군·도 주최의 사생대회에 참가해 상을 타기도 했다. 이 시기의 그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밝고 긍정적인 개구쟁이였지만, 내면은 우울과 불안으로 가득 차 혼란스런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중학교 진학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다. 항상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었다.

조재익은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향 집을 나설 때는 약간의 해방감도 있었지만, 마음속의 불편함은 점점 커졌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며 방황은 길어졌다. 공부가 하기 싫어졌고, 미래에 대한 막연함은 불안을 가중했다.

이 무렵 그는 초·중학교를 함께 다녔던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같이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입시준비를 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 순간 ‘아! 나에게 이게 있었지!’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중 만난 한 줄기 빛이었다.

조재익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목표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림은 돈이 많이 드는데, 밥벌이하기도 힘들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인지 어머니는 크게 달가워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재수를 선택했는데 이번에도 떨어졌다. 고민이 많아지던 차에 미술학원 선생님이 학원비를 받지 않고 입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세 번째 도전인 만큼 기대도 크고 자신도 있었지만, 또다시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수험생활을 정리하고 입대했다. 군 생활 동안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전역을 앞두고 다시 입시 준비를 결심했다. 이 무렵 서울에서 미술학원 강사를 하던 선배가 자신이 일하는 학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학원비도 따로 받지 않았다. 선배의 고마운 제안에 전역하자마자 단출한 짐 가방 하나만 들고 상경했다. 조재익은 무려 네 번째 도전에 나섰고, 25살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입학에 대한 기쁨도 잠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과 생활비·학비·재료비 등 경제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그는 자그마한 창고를 빌려 작업실 겸 자취방으로 사용했고, 매일 같이 인근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과 달리, 마음에 자리한 ‘불편함’은 여전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은 넘쳐났는데, 주변 환경이나 자신의 능력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꿈이 생겼고,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연구조교와 시간강사 일을 하며 경력을 쌓다가 작은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91년, 대학 졸업 후 곧장 동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하며 틈틈이 그린 그림을 모아 이듬해 첫 개인전 ‘호접몽에 대하여’를, 1993년에는 두 번째 개인전 ‘몸짓 춤 또는 비명’을 개최했다. 또 4년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아들도 낳았다.

조재익은 내면의 불안과 불편을 해소하고자 기공명상을 시작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2005년 인도 아잔타 석굴에서. 
조재익은 내면의 불안과 불편을 해소하고자 기공명상을 시작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2005년 인도 아잔타 석굴에서. 

미얀마서 1년 출가수행

조재익은 대학원 졸업 후에도 꾸준히 개인전을 열었다. 틈틈이 시간강사로 활동하며 경력도 쌓았다. 표면적으로는 순탄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마음에 자리한 ‘불편함’은 점차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잘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작품세계에 대한 고민이 더해지면서 그의 내면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소용돌이쳤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그간 배운 여러 기술과 기교로 그럴듯한 작품을 그려낼 수는 있었지만 ‘내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시를 준비하고 발표하는 등 꾸준히 무언가를 해왔음에도 공허했다.

문득 ‘내가 평균적인 30대가 가진 일반적인 삶의 모습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한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확대했다. 불안감은 그의 마음속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했고, 결국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한 번 끓어오른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런 불안한 심리는 아내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자신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친구의 권유로 기공명상을 시작했다. 모임에서 명상하는 동안은 편안했지만, 일상으로 복귀하면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조재익은 다시 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친구는 작은 남방불교 사원을 소개해 줬다. 이곳에 다니며 조금씩 마음의 평안을 찾아가던 2002년경, 미얀마인들이 존경하는 스님이자 우리나라에서 〈여름에 내린 눈〉·〈붓다의 무릎에 앉아〉 등의 작가로 알려진 우 조티카 사야도(Sayadaw U Jotika)의 법문을 듣게 됐다.

스님의 법문은 조재익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는 ‘지금처럼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저 스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2년 뒤 우 조티카 사야도가 다시 방한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단기출가 프로그램에 참여, 사미계를 받고 수행에 매진했다. 수행을 할수록 평생 마음을 짓누르던 문제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진지하게 출가수행자의 삶을 고민하게 됐다. 먼저 미얀마에서 1년간 출가수행자로 생활해 보기로 결심했다. 고민 끝에 아내에게 “미얀마에서 출가를 해보려고 한다.”고 고백했는데, 아내는 의외로 흔쾌히 그의 결정에 동의해 주었다. 수행을 시작한 후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2007년, 그는 가족들의 배웅 속에 미얀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얀마 양곤 밍갈라돈(Mingaladon)에 위치한 쉐우민 담마수카 명상센터(Shwe Oo Min Dhammasukha Meditation Center)에 입소한 그는 비구계를 받고 출가자 ‘위라담마(Viradhamma)’로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좌선과 경행(經行)을 반복하고, 오전에 인근 마을로 탁발을 나서는 게 일상이었다. 7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조재익은 출가했을 때의 기대와 달리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수행에 진전이 없다는 생각에 조급해졌고, 초심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도 들었다.

그는 ‘조금 더 체계적이고 엄격한 규율이 있는 곳에서 수행하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북쪽 지역의 명상센터로 수행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규율이 더욱 엄격한 곳으로 이동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동행했던 스님의 만류로 다시 쉐우민 명상센터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2008년 4월 말경 태풍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강타했다. 태풍이 지나간 뒤 찾아간 쉐우민 명상센터는 태풍에 직격 당해 엉망이었다. 북적거리던 이전과 달리 명상센터에는 몇몇 사람만 남아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전기는 끊겼고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법당도 부서져 좌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기가 시작됐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는 멍하니 비가 내리는 모습만 지켜봐야 했다.

“당시에는 마음이 참 불편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게는 참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멍하니 앉아서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서양 사람들이 쓴 스승과 제자의 문답집을 우연히 읽게 됐어요. 천천히 책을 읽던 중 문득 ‘당신은 거기에 너무 집중했다.’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갑자기 의식이 전환되더라고요. ‘아! 알아차림이 이렇게 본래 있는 거구나!’하고 말이죠.”

일순간 얻은 작은 깨우침에 크게 감격한 그는 비가 그친 뒤 명상센터의 마당으로 나가 조용히 경행을 시작했다. 먼저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슬리퍼가 땅에 툭툭 닿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뒤이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방울이 눈에 들어왔고, 들풀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갑작스레 선명해진 오감에 당혹스러워할 때, 마침 외국에 초청되어 출국했던 스승이 돌아왔다. 경험을 고백하자, 스승은 “지금까지의 수행이 무지(無知)가 함께했던 수행이라면, 이제부터는 지혜가 함께하는 수행이다. 이제부터가 제대로 된 수행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미얀마에서 출가 생활을 하며 얻은 첫 성취였지만 귀국하기로 예정한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조재익은 비자를 연장해 미얀마에 남아 수행을 이어갈지 고민했지만, 결국 귀국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스승에게 전했고, 환계식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얀마 쉐우민 수행센터 인근 마을에서 탁발을 하고 있는 조재익의 모습(왼쪽, 러시아 작가 촬영)과 함께 수행했던 베트남계 미국인 스님.
미얀마 쉐우민 수행센터 인근 마을에서 탁발을 하고 있는 조재익의 모습(왼쪽, 러시아 작가 촬영)과 함께 수행했던 베트남계 미국인 스님.

“화풍이 변했다.”

한국에 돌아온 조재익은 다시 붓을 들었다. 미얀마에서 출가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품’을 찾아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교나 기술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다.

‘잘 그리는 작가’·‘인기 작가’라는 막연한 목표를 내려 놓자 불안과 압박감도 사라졌다. 그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내면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는 부처님·꽃·길·물에 비친 풍경 등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이상향을 부처님에,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길에, 지금 이 순간의 현존을 꽃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화풍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작가의 몸짓과 호흡 등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유화의 특성 탓에 변화한 그의 마음이 두드러지게 표현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공부를 지속하며 내면이 변화하면서 자연스레 화풍도, 삶도 변화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변화하는 내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30여 년간 그림을 그렸고, 수 차례 개인전을 열었지만,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없습니다. 그저 그 시절, 그 순간에 제 내면과 맞닿은 그림을 그리며 저의 작품세계를 찾아가는 중이에요. 작품은 그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죠. ‘작품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요구하는 일입니다. 제 전부를 내던져도 돌아오는 게 없을 수도 있는 지난한 길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삶을 충실히 살아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말미, 조재익에게 ‘꿈’을 묻자 “없다.”는 다소 당혹스러운 대답을 했다. 그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실재하지 않는 꿈이나 미래보다 지금 자신과 맞닿은 현실에 더욱 집중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최근 마음 맞는 도반들과 선적 사유를 나누는 소규모 명상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미얀마에서 얻은 작은 깨우침을 바탕으로, 평생 함께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다.

작업실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을 살펴보다 보니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대상의 이름을 잊어야 한다.”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그저 성실히 손에 붓을 쥘 뿐이라는 조재익 작가. 붓을 쥔 그의 다부진 손에서 탄생한 수많은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평온과 자유로움을 선사하길 기대한다.

조재익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이상향을 부처님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붓다-꽃이피다4(2013)’, ‘붓다 꽃이피다10(2004)’, ‘붓다 -꽃이피다4(2 017)’, ‘붓다 꽃이피다3(2017)’.
조재익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이상향을 부처님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붓다-꽃이피다4(2013)’, ‘붓다 꽃이피다10(2004)’, ‘붓다 -꽃이피다4(2 017)’, ‘붓다 꽃이피다3(2017)’.
색색의 유화 작품으로 가득한 작업실에서 만난 조재익 작가. 그에게 작업과정은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색색의 유화 작품으로 가득한 작업실에서 만난 조재익 작가. 그에게 작업과정은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2020년 모 공모전 심사위원을 맡은 조재익 작가가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2020년 모 공모전 심사위원을 맡은 조재익 작가가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서양화가 조재익의 인생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유튜브 ‘금강신문’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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