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옹고집 신통력보다는
심청의 보살심 불교색 짙어

(왼쪽) 〈옹고집전〉(을유문화사, 1962년)과 〈심청전〉(현암사, 2000년).
(왼쪽) 〈옹고집전〉(을유문화사, 1962년)과 〈심청전〉(현암사, 2000년).

불교 경전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진 문학작품과 동화는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나라 고전 문학이나 동화 중에도 이런 사례가 여럿 있지요. 그 가운데 〈옹고집전(雍固執傳)〉과 〈심청전(沈淸傳)〉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두껍전〉·〈별주부전〉 같은 작품도 부처님 〈본생담〉에 비슷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 있어, 불교와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이 작품들이 불교 작품을 그대로 본 따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가 비슷하기에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문화도 비슷할 수밖에 없지요. 서로 다른 수많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비슷한 구조를 가진 수많은 신화와 설화들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부활의 이야기만 해도 세계 곳곳에 비슷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중세의 기독교 교부(敎父, 초기 그리스도교 교리를 만든)철학자들은 이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고심했던가 봅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부활은 유일한 사건이어야 할 터인데 왜 이리 비슷한 설화들이 많으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악마가 예수님 출생과 부활의 의미를 희석하기 위해 이런 설화를 미리 유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보면 좀 우스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문물이 발달하여 온 세계의 과거와 현재를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게 되어 그런 문화의 다양성과 상이성, 그 가운데 있는 공통성을 쉽게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설화나 동화 또는 고전 문학작품이 불교의 〈본생담〉 등과 구조가 비슷하다 하여 무조건 불교와 연결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옹고집전〉과 〈심청전〉은 분명하게 불교와 연관돼 있습니다. 하나는 스님에게 행패를 부리고 박대한 옹고집이 스님의 신통력에 혼쭐이 나는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자기 몸을 팔아 공양미를 마련하는 지극한 효심이 담긴 이야기지요. 소재 자체가 스님·절·부처님과 연관된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 두 이야기는 내용도 상반되고 그 속에 담고 있는 불교적 가르침도 상당히 다릅니다. 한 번 비교하면서 살펴보기로 하지요.

2016년 1월 축제극장 몸짓에서 열린 연극 ‘옹고집전’의 한 장면.
2016년 1월 축제극장 몸짓에서 열린 연극 ‘옹고집전’의 한 장면.

옹고집, 술법에 탄복 잘못 뉘우쳐

우선 〈옹고집전〉을 볼게요. 요약하면 정말 단순한 내용입니다. 옹달 우물과 옹 연못이 있는 옹진골 옹당촌에 성은 ‘옹’이요, 이름은 ‘고집’인 사람 즉, 옹고집이 살았더래요. 부모에게도 불효막심, 불교도 아주 업신여겨서 스님이 탁발을 오면 엄청나게 행패를 부렸다네요. 그런 옹고집을 교화하기 위해 월출봉 취암사의 도사가 신통력 높은 학 대사를 절에서 내려보냈는데, 마찬가지로 행패를 부렸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학 대사가 짚단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들여보내지요. 진짜 옹고집이 누구인가를 가리기 위해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결과는 가짜의 승리. 진짜 옹고집은 쫓겨나 죽지도 살지도 못할 처지가 되고, 가짜 옹고집은 옹고집 부인과 알콩달콩 살면서 수많은 자식까지 낳게 됩니다. 막장에 몰린 옹고집, 결국 목숨을 던지려 할 때 취암사의 도사가 등장하지요. 인과를 알려줘서 옹고집을 엄하게 꾸짖어 교화하곤 부적을 하나 줍니다. 그 부적 지니고 집으로 돌아가니 만사가 해결되네요. 가짜 옹고집도, 옹고집 부인과 알콩달콩하면서 낳았던 수많은 자식도 모두 짚 덤불로 만든 허수아비! 그리하여…….

“도승의 술법에 탄복하여, 옹좌수 그로부터 모친께 효성 하며 불도를 공경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일 많이 하니, 모두 그 어짊을 칭송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럼, 이야기 속에 담긴 불교적 가르침을 한 번 살펴볼까요? 그런데 불교적 가르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 같아요. 스님이 탁발하는 이야기가 소재로 사용됐을 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교를 무시하고, 스님들에게 행패를 부리면 안 돼!”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해야 하나요? 그걸 불교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짚 덤불로 만든 가짜 옹고집을 통해 우리 몸이란 것이 결국 헛된 것임을, 또 그런 몸 굴리며 사는 삶이 헛된 놀음임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근본 구조 자체가 불교적이 아니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인과의 흐름이 아니라 신통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이 개입해 개인이나 사회현실을 바로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것은 인과를 비정상적인 힘으로 비트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일을 금하셨습니다. 그런 신통력 사용을 금지했다고나 할까요? 어떤 넘어설 수 없는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과 행실을 바꾸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과 속에서 깨달아 가는 올바른 길을 뒤틀어 버립니다. 그러니 〈옹고집전〉을 불교와 관계된 소재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불교 고전 문학으로 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1월 축제극장 몸짓에서 열린 연극 ‘옹고집전’의 한 장면.
2016년 1월 축제극장 몸짓에서 열린 연극 ‘옹고집전’의 한 장면.

〈심청전〉 구조, 불교적 가르침 담겨

이에 비하면 〈심청전〉은 그 소재 자체뿐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 이야기의 구조에 깊은 불교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 만큼 줄거리 요약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이야기의 전개에 맞춰 그 속에 담긴 불교적 의미를 드러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미리 좀 양해를 구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저 나름으로는 〈심청전〉 속에 담긴 불교적 가르침, 그것을 드러내는 〈심청전〉의 구조에 매우 깊이 탄복하고 매료돼 주관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는 점,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심봉사(심학규)의 딸로 심청이 태어나는 대목부터 저는 의미를 두었습니다. 봉사, 눈이 보이지 않는 이. 바로 우리의 무명(無明)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의 딸로 천하의 효녀 심청이 태어납니다. 심청은 참으로 대보살의 상징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목숨까지 던지는 심청이 보살이 아니면 누가 보살이겠습니까? 여기에 흥이 나서 찬을 붙여봅니다.

윤회의 수레바퀴 돌게 하는 근본 무명이여!
이 괴로움 언제나 벗어날까?
보살심이 바로 무명의 자식으로 태어나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기에
무명 속에 그것을 밝히는 씨앗이 잉태되었구나!
도솔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마야 부인의 태 속으로 내려오시듯
우리 심청 보살님 그렇게 내려오시도다.

우리 심청 보살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지요. 심봉사가 정말 어려운 가운데에도 정성껏 심청이 키우네요.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극한 효심을 보이는 심청이. 심봉사와 심청 부녀간의 정이 참으로 가슴을 울립니다. 그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바로 대자비심의 뿌리가 아닐까요. 보살의 자비와 부모·자식 간의 사랑을 둘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 중생은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의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해 집착의 병통이 있지만, 그것 자체가 대자비심과 다른 것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절대 평등의 자비심도 결국은 가장 가까운 친족 사이에서 드러나고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울날 심청을 기다리다 문밖을 나섰던 심봉사가 깊은 개울 고랑에 떨어져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지나던 몽운사 화주승의 구함을 받게 되지요. 부처님께 공양미 300석 올리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심봉사는 생각 없이 삼백석 공양미를 올리기로 단단히 약속하고, 결국 지극한 효심을 지닌 심청이에게 공양미 300석을 마련하는 큰 짐이 지우네요. 여기에 다시 찬하나 붙입니다.

아아! 무명의 긴 세월이여!
그 무명 벗어던질 뜻을 내었네.
수억 겁을 쌓여온 무명의 습기 어찌 쉬 벗을 수 있을까.
보살의 대자대비 간구(懇求)하노라.
동체대비의 크신 원력으로
저의 근본 무명 벗겨 주소서.

결국 심청은 뱃사람들의 제물이 되기로 하고 공양미 300석을 마련합니다. 애절한 이별, 정말 다시 읽으면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배에 몸을 싣고 뱃길 따라 인당수에 도달하여 ‘풍덩!’ 몸을 던집니다.

마음 바다 한가운데
그 깊음 헤아릴 수 없고
그 사나움 헤아릴 수 없는 그곳, 인당수!
온갖 마음 파도가 용솟음치는 그 근원이여!
그곳에 하늘에 사무치는 서원의 마음을 던진다.
천 길 낚싯줄이 그 바닥에 닿을까?
이 한마음, 하늘에 사무치는 효심이 그 바닥에 닿으리라!

심청의 효심이 하늘에 닿았네요. 옥황상제를 감동시켰어요. 옥황상제의 엄명을 받은 용왕의 보호로 용궁에 모셔진 심청. 몇 년간의 용궁 생활을 거쳐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몸을 던졌던 그 인당수 한가운데, 세상에 없었던 오묘한 꽃이 되어 떠오릅니다. ‘지심귀명(至心歸命,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 온몸과 마음 다 바쳐 올린 그 치열한 서원이 오묘한 성취를 드러냅니다. 향기로운 한 송이 꽃 속에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 심청이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심청이를 바쳤던 뱃사람들에 의해 발견된 그 꽃은 황제에게 진상되고, 여차저차 과정을 거쳐 결국 황후로 간택되지요. 황후의 호화롭고 안락한 삶,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 효심이 황제를 감동시켜 천하의 맹인을 위한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제발 우리 아버지도 오셔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황후 심청의 간절한 마음. 그런데 이렇게 천하 맹인을 위한 잔치를 벌이는 무대 설정이 정말 재미있지요. 황후 심청의 말을 들어보세요.

“백성 중에 불쌍한 사람은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 네 부류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은 병든 사람이며, 병신 중에도 특히 맹인이오니 천하 맹인을 모두 모아 잔치를 하옵소서. 그들이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 희고 검고 길고 짧은 것, 부모 처자를 보아도 보지 못하여 품은 한을 풀어 주옵소서.”

1956년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영화 ‘심청전’ 팸플릿의 일부(왼쪽)와 1972년 개봉한 영화 ‘효녀 심청’의 한 장면. 배우 윤정희가 심청, 김성원이 심봉사, 신성일이 상감 역을 맡았다.
1956년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영화 ‘심청전’ 팸플릿의 일부(왼쪽)와 1972년 개봉한 영화 ‘효녀 심청’의 한 장면. 배우 윤정희가 심청, 김성원이 심봉사, 신성일이 상감 역을 맡았다.

황후 심청의 대보살심에 감탄

천하 모든 관리들에게 포고를 내리고 방을 붙여 심학규란 봉사를 찾아내라 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비의 아픔을 통해 모든 맹인의 아픔을 알았기에, 그들의 아픔을 모두 달래주는 큰 보살심으로 회향합니다. 그 가운데 내 아비를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자비의 회향 속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납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그 대목, 거기서 몇 줄 뽑아봅니다.

아버지, 제가 정녕 인당수에 빠져 죽었던 심청이어요.”

심봉사가 깜짝 놀라,

“이게 웬 말이냐?”

하더니 어찌 반갑던지 뜻밖에 두 눈에서 딱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두 눈이 활딱 밝았다. 그 자리에 가득 모여 있던 맹인들이 심봉사 눈뜨는 소리에 일시에 눈들이 뜨이는데, ‘희번덕, 짝짝’ 까치새끼 밥 먹이는 소리 같았다. 뭇 소경이 밝은 세상을 보게 되고, 집 안에 있는 소경, 계집 소경도 눈이 다 밝고, 배 안의 소경 배 밖의 맹인, 반소경 청맹과니까지 모조리 다 눈이 밝았으니…….

아하! 무명의 딱지가 떨어지는 소리. 본디 내 마음의 바탕이었던, 내 속의 보살과 다시 만나는 소식. 처음 보는 그 모습, 그러나 옛적부터 가장 그리웠던 그 모습을 보는 환희심 넘치는 대목이지요? 그런데 내 무명의 딱지만 떨어졌나요? 온 세상 모든 사람의 무명 딱지가 한꺼번에 다 떨어졌네요. 본디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는 법! 무명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 등불이 밝혀지면 뒤이어 백천 등불이 밝혀지는 법이고요. 〈유마경〉에 나오는 꺼지지 않는 등불 법문이 떠오르네요.

“한 등불이 백천 등불로 이어져 어둠이 모두 밝아지고, 그 밝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보살이 백천 중생의 마음을 열고 이끌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렇게 모든 장님의 눈을 뜨게 한 보살은 누구인가요? 효녀 심청, 바로 심청 보살님이죠. ‘심청보살 만세’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환희의 마음이 일었습니다. 내 마음의 무명 딱지도 그렇게 ‘희번덕, 짝짝’ 소리와 함께 떨어질 것만 같았지요. 여러분과 함께 그 기분을 나누고 싶은 생각에 좀 주제넘게,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심청전〉을 헤집지 않았나 싶어 좀 부끄럽네요.

〈심청전〉은 제가 이렇게 무게를 잡고 풀어내야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건 잘 아시지요?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가 가득하고, 또 슬픈 대목에서는 눈시울이 시큰한 애절한 묘사가 일품인 그런 소설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느라 다시 〈심청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감정의 파도를 겪었어요. 예전에 읽었던 〈심청전〉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을 여러분도 받아 보셨으면 하는 바람, 혹시 이 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심청전〉을 읽으신다 해도, 또 ‘성태용이 너무 자의적으로 〈심청전〉을 왜곡했다.’고 비판하신다 해도,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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