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천태종의
특성과 변천

백련사(옛  만덕사)  만경루 옆으로 도암만이 보인다. 건물이 복원되었으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창건보다 더 비용이 든다. 건축과 석조물의 일부만 원형을 유지하고 산과 바다만이 그나마 13세기 천태종 백련결사 중심지의 흔적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만덕사는 조선시대 대부분 시기 선종사원이었고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해남 대흥사의 말사이다. 고려 천태종의 폐사지에 현대 천태종의 사원이 복구된 사례는 필자가 보기에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천태종은 고려에서 중기에 가장 늦게 종파로 출발하였으나 고려 초기의 3대 종파였던 화엄종과 유가종보다 고려 후기에 우세한 종파를 유지하였다. 조계종 다음으로 고려 후기에 약진했던 천태종의 유적이 심하게 훼손된 원인에 대한 설명은 매우 부족하다. 인과관계의 해석이 부족하면 올바른 역사의 설명이라 말하기 어렵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백련사(옛  만덕사)  만경루 옆으로 도암만이 보인다. 건물이 복원되었으나 원형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창건보다 더 비용이 든다. 건축과 석조물의 일부만 원형을 유지하고 산과 바다만이 그나마 13세기 천태종 백련결사 중심지의 흔적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만덕사는 조선시대 대부분 시기 선종사원이었고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해남 대흥사의 말사이다. 고려 천태종의 폐사지에 현대 천태종의 사원이 복구된 사례는 필자가 보기에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천태종은 고려에서 중기에 가장 늦게 종파로 출발하였으나 고려 초기의 3대 종파였던 화엄종과 유가종보다 고려 후기에 우세한 종파를 유지하였다. 조계종 다음으로 고려 후기에 약진했던 천태종의 유적이 심하게 훼손된 원인에 대한 설명은 매우 부족하다. 인과관계의 해석이 부족하면 올바른 역사의 설명이라 말하기 어렵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육지에서 가장 넓은 아시아대륙은 거의 모든 중요한 세계종교가 기원한 요람이다. 고대 4대 문명 중 하나는 아프리카 나일강에서 시작하였지만 셋은 아시아에서 시작하였고 이보다 늦은 그리스·로마 문명이 유럽의 지중해에서 꽃을 피웠다. 아메리카 신대륙은 마야와 잉카와 아즈텍문명의 고향이지만 세계종교가 기원한 지역은 오직 아시아대륙뿐이다. 종교의 뿌리는 전통종교인 세계종교와 다양한 지역에서 혁신적인 신흥종교가 서로 경쟁했지만 세계종교는 보수성에 중심을 두는 속성이 있다.

종교는 민족이나 문화·전통뿐 아니라 음료와도 관계가 깊게 연결되었다. 줄여서 말하면 차는 본래 교목(喬木)이고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700년 앞서 싹터서 지금도 살아있는 차나무가 있다. 인간은 대체로 나무보다 수명이 짧고 기원은 더욱 늦다. 그래도 식물은 인간에 의하여 이름도 가지고 활용되어야 알려진다. 토착 고승인 교연(皎然, 730~799)이나 떠돌이였던 육우(陸羽, 733∼804)가 〈차경(茶經)〉을 저술한 시기는 지의(智顗, 538∼597)가 양자강 유역에서 출발하여 황하 유역인 북조까지 통합한 사상인 천태종보다 늦다. 정치와 군사로는 북조가 남조를 통합하였지만 천태종은 남조에서 출발하여 북조까지 통합하는 회삼귀일이란 통일의 기반인 천태사상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정치와 정복으로 통합은 가능하지만 사상이 뒷받침할 때 제대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음료의 하나인 차는 다른 종파보다 사상적으로 선종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의 사상을 종합하는 사상 통합이 차의 최대 생산지인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안정된 소국 오월(吳越)에서 완성되었고 법안문익에서 천태덕소를 거쳐 영명연수의 〈종경록〉으로 완성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선종을 중심으로 음료와 불교사상의 통합은 이후 고려의 불교사상과 뇌원차의 생산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지만 우리의 학문적인 성과는 크게 향상시키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세계종교의 전파 방향과 불교의 지평

고대와 중세를 제대로 연결시킨 종교는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불교와 가톨릭이었다. 두 종교 모두 기원한 공간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더욱 발전하였다. 가톨릭은 서아시아를 떠나 더욱 서쪽인 유럽에서 불교는 남아시아에서 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꽃을 피웠다. 공교롭게도 가톨릭과 불교는 같은 4세기에 유럽과 동아시아에 정착하였다.

종교는 거대한 대륙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기원하고 발전하여 세계 여러 곳에 영향을 주었고 전통을 유지한 문화유산과 관계가 깊다. 가톨릭과 불교가 기원한 지역은 국가종교인 유대교와 힌두교가 각각 일어나 세계종교가 번성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세계종교는 다른 민족과 국가에 깊은 영감을 주었고 예술과 사상에도 오랜 기간 깊은 관련이 있었다. 불교는 남아시아에서 기원하였으나 기원지에서 변두리에 해당하는 네팔과 스리랑카에만 뿌리가 현재까지 살아있고 동남아시아나 동아시아가 불교의 핵심지로 새롭게 발전하여 전통을 유지하였다.

불교는 힌두교의 기원지인 인도 대륙 서북 인더스문명에서 문학 형태의 구전을 결집한 동북 인도에서 기원한 법보를 지킨 종교이다. 10세기부터 서북 방향에서 이슬람의 침입을 받아 힌두교와 불교는 인도에서 거의 사라졌고 아주 미약하게 유지한 상태였다. 3세기를 지나 몽골제국이 이슬람의 본거지였던 서남아시아를 석권하면서 힌두교는 인도에서 거세게 부활하였으나 불교는 제대로 재생하지 못하였고 인도 대륙의 변두리에서 겨우 생명력을 유지한 대신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 각각 전통을 유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다시 체계화한 불교는 중세의 전통종교로 발전하였고 전통불교인 조계종이 우세하지만 근대는 서학으로 시작한 한국의 가톨릭이나 동학으로 자생한 천도교, 종교개혁의 특성을 가진 신흥종교가 있다. 신흥불교로는 천태종과 원불교를 들 수 있다. 천태종은 전통과 혁신을 겸비한 불교로 단기간에 크게 발전한 종파이다. 대한불교천태종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에 뿌리를 두지만 이보다 앞선 수의 천태지의나 오월의 법안종에 유학한 선승이 유행시킨 천태학은 10세기부터 영향이 있었다. 이후 종파로 출발한 12세기의 과정에 대한 내용은 칠곡의 남숭산에 세운 천태시조 대각국사 비문의 후면에 가장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은 교관겸수를 추종해 대각국사를 따른 300여 선승과 5산문과 함께 1,000여 고승이 합쳐서 천태종의 기반으로 삼았음을 명시하였다. 고려의 천태종은 만덕산 백련사를 중심으로 조계종의 송광산 수선사와 협력하면서 강화로 천도한 시기 불교계는 물론 국가와 사회의 호응을 받으면서 그보다 앞서 성행하였던 화엄종과 유가종을 능가하였다. 화엄종과 유가종은 신라의 학파에서 발전하여 신라 말기의 남종선에 기원을 두고 의상계의 화엄교학 승려들이 당으로 유학하여 종파를 선종으로 바꾼 경향이 많았다. 이들이 고려 초기에는 화엄종과 유가종과 함께 3대 종파를 확고하게 확립하였다.

천태종은 오월에 유학한 선승들이 법안종에 영향을 받아 고려에도 천태학의 오시설에 기반을 둔 천태사상이 선종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선종의 14산문 가운데 5산문은 의천의 교관겸수로 기울었다. 세계종교는 인류를 구제하기 위하여 기원지에서 더욱 멀리 이동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천태학이나 천태종은 동아시아에서 교학불교를 새롭게 정립시킨 사상이고 종파였다. 동아시아의 불교는 인도에서 경전으로 정착된 불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남조(南朝)와 수(隋)와 당(唐)에서 삼장(三藏)의 정리는 종파를 통한 불교의 계승과 발전에 크나큰 계기가 되었다. 모든 불교의 종파는 경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천태사상이나 천태종처럼 교상판석에 철저하고 경전의 총괄적인 이해를 철저하게 체험한 바탕으로 확립한 종파는 드물다.

화순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탑과 불상이 있다. 불상의 모습은 다듬지 못한 모습도 있으며, 특히 훼손된 불두를 모아놓은 곳이 있거나 와불도 있다. 이를 민중의 역사라 해석하거나 다양한 민속신앙의 구현이란 설명이 많다. 유적이란 조성된 시대와 사상의 배경을 떠나서 해석하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일지암본 〈호산록〉에 의하면 운주사는 천태종의 사상이 구현된 불교예술이고 〈법화경〉의 충실한 구현임이 거의 확실하다. 해석하기 어렵다고 민속이나 민중을 끌어들이는 해석은 불교를 저급한 수준으로 해석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고답적 자세로 다른 사상을 포용하지 못하는 답습이 작용한 타성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보다 있는 그대로 상태에서 훼손된 원인과 왜곡된 해석이 생긴 과정을 풀이해야 불교사의 진실한 과제에 제대로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GettyimagesBank 
화순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탑과 불상이 있다. 불상의 모습은 다듬지 못한 모습도 있으며, 특히 훼손된 불두를 모아놓은 곳이 있거나 와불도 있다. 이를 민중의 역사라 해석하거나 다양한 민속신앙의 구현이란 설명이 많다. 유적이란 조성된 시대와 사상의 배경을 떠나서 해석하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일지암본 〈호산록〉에 의하면 운주사는 천태종의 사상이 구현된 불교예술이고 〈법화경〉의 충실한 구현임이 거의 확실하다. 해석하기 어렵다고 민속이나 민중을 끌어들이는 해석은 불교를 저급한 수준으로 해석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고답적 자세로 다른 사상을 포용하지 못하는 답습이 작용한 타성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보다 있는 그대로 상태에서 훼손된 원인과 왜곡된 해석이 생긴 과정을 풀이해야 불교사의 진실한 과제에 제대로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GettyimagesBank 

천태사상의 핵심과 고려 천태종의 출발

동아시아에 이르러 불교는 불경의 전래와 번역과 학파의 형성이 뒤따랐지만 이를 중심으로 체계를 세우고 사원에서 계승하여 종파로 발전한 시기는 후대였다. 남조에서 발전하여 남북조를 통합한 왕조인 수의 지의는 천태종의 종조라 불릴 정도로, 학파를 극복하여 통합적인 요소인 회삼귀일의 천태사상이 뚜렷하였다. 천태사상은 실제로 교학사상을 체계화한 천태종으로 사상적 통합의 기반을 이루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가 유학을 중심으로 한대의 사상을 이루었듯이 수·당은 교상판석을 발전시켜 통합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천태종은 당대에 이르러 화엄종이나 유가종을 종파로 발전시키면서 계승의 기반을 이룩한 선구적인 종파였다.

당과 경쟁하였던 고구려나 백제의 불교계도 학파불교의 요소가 있었으나 이를 통합하지 못하고 신라와 당으로 분할되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남부를 더하여 영토를 넓혔으나 당에 흡수된 지역에서 진국(辰國) 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고 당보다 오랜 기간 국가를 유지하다가 대부분 거란에 흡수되고 후삼국의 북쪽 일부 지역만 고려에 흡수됐다. 이후 거란을 통해 북쪽의 압록강 하구와 원산만까지 영역을 넓혔다.

고려 초기 천태종은 없었으나 남종선의 한 갈래인 오대의 남쪽에서 번영한 십국 가운데 오월의 법안종과 교류하면서 고려 태조의 불교에 도움을 준 능긍(能兢)이 후삼국 통합의 이론이 되는 통합사상에 기여하였다는 기록이 간단하게 전할 정도이다. 천태사상은 오시설(五時說)의 교상판석에 기초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에 가까운 법화열반시의 설법을 중요시한 참회와 종말론을 강조한 사상에 투철하였다. 실제로 〈법화경〉 설법 장소는 유가종에서 간행한 미륵사상에 포함되어 전하였다. 유가종은 종말론적 미륵사상이 강하고 석가탑과 다보탑이 쌍탑으로 조성된 불국사에서 선명하게 특징을 보존하였다.

이후 탑 대신 석가불과 다보불을 병좌시킨 불상을 만들거나 남북으로 등을 맞대고 얼굴을 각각 보이는 화순 운주사 초입의 이불병좌상이나 천불천탑과 같은 조형도 있다. 또한 이와 반대로 탑과 불상을 조성하지 않고 조사의 부도탑이나 조사비를 세우는 대신 탑을 제한하여 세운 조계종의 정혜결사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였다. 고려의 백련결사는 천태종의 특징을 잘 나타낸 유적이 있으나 대부분 사찰의 탑과 불상이 파괴가 심하여 제대로 보존된 경우가 매우 적다.

고려의 천태종은 실제로 종파로 출발한 시기는 한국과 일본에 비하여 늦다. 중원에서 천태시조인 수나라의 지의는 6세기 후반, 일본 천태종을 개창한 사이쵸(最澄, 767∼822)는 9세기 전반 인물이다.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 천태학은 있었으나 종파로는 대각국사 의천 생전에 유적은 전하지 않고 그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나 지금의 경북 칠곡에 세운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가 제대로 보존된 유적이다.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다가 발견되어 그나마 보존이 잘된 셈이다. 그 외 13세기에 활동한 진정국사의 문집 〈호산록〉이 그나마 절반 남았고 14세기 초기 무외국사 정오(丁午)의 문집인 〈동문선〉에 일부 전하는 정도이다.

〈호산록〉에 자주 등장하는 강진 용혈암 발굴 현장의 모습. 고려의 천태종 사원과 암자가 원형의 유적을 나타낸 경우는 이보다 앞서 조성된 3대 종파에 비하여 아주 적다. 천태종은 고려의 불교 종파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였고 유적의 원형을 상실한 사례가 많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이에 대한 연구는 가장 부실하다. 역사란 규명되지 않았다면 연구가 부족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진= 강진군〉
〈호산록〉에 자주 등장하는 강진 용혈암 발굴 현장의 모습. 고려의 천태종 사원과 암자가 원형의 유적을 나타낸 경우는 이보다 앞서 조성된 3대 종파에 비하여 아주 적다. 천태종은 고려의 불교 종파 중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였고 유적의 원형을 상실한 사례가 많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이에 대한 연구는 가장 부실하다. 역사란 규명되지 않았다면 연구가 부족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사진= 강진군〉

광복 후 천태종의 약진과 전통의 해석

광복과 6·25전쟁, 산업화 과정은 천태종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와 학문에 그야말로 크나큰 변혁기였다. 전통종교와 신흥종교를 막론하고 각주도 없는 불교종파사가 3권이나 나왔다. 이를 비교하면서 가톨릭사나 15세기 기독교사도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나라 학문의 현주소에 대해서 역사연구자로 각주 없이 베끼기가 성행하여 후대에 혼란을 줄 것인가 염려가 크다. 종교사뿐만 아니라 국문학사나 한국사의 개설서가 그럴 지경인데 각주 없는 불교의 종파사가 믿기 어려운 근거가 부족한 저술이라고 불린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밝지 않다. 한국사와 한국문학사, 그리고 한국종교사는 이제 출발이다. 6회 연재의 마지막 글에서 각주 없는 창작된 종교사는 믿을 수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천태종이 고려불교를 이끌던 네 바퀴에서 하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였다는 사실을 밝히려면 이제부터라도 사실을 제대로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고려의 천태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종파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천태사상은 이미 앞서 알려졌고 특히 교상판석을 토대로 두었을 정도로 동아시아 교학의 종합적 단계에서 출발하였다. 중원에서 천태종은 교종으로 분류되지만 고려의 천태종은 조계종과 함께 선종에 속하고 실제로 천태종을 구성한 1,300여 고승의 수효에서 3배 이상이 선승이었다.

천태종은 법화열반시에 설법한 경전이 소의경전이었으므로 종말론이 포함되었다. 법화사상은 미륵불 사상이 바탕을 이루었고 실제로 미륵불을 조성한 사례가 확인되므로 유가종의 이론체계와도 관계가 깊다. 고려 초기의 3대 종파에서 유가종은 김제 금산사에서 출발하여 보은 법주사로 다시 금강산 발연사(鉢淵寺)까지 종말론적 미륵사상을 폈던 진표(眞表)의 실천사상과 이보다 앞서 교학의 통합을 내세웠던 원효의 사상이 결합한 요소가 강하다. 대각국사 의천은 원효의 사상에 토대를 두고 지의에 이르기까지 중요시한 지관을 통한 수행을 강조하고 남종선의 참선을 부정하였다. 원융의 화엄사상을 강조한 일관성과 포괄성을 강조한 사상가였고 교학을 바탕으로 수행에는 참선보다 지관을 강조한 교학 중심의 교관겸수를 강조한 특징이 있었다.

탐진의 백련결사 고승들이 고려 수도에 있던 천태종의 주요 사원인 국청사와 묘련사에서 활동하였고 대원과의 관계에서 화불과 사경으로 예술을 장악하면서 위상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천태종의 유적이나 문헌이 훼손된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였다. 천태종뿐만 아니라 수선사 계통 고승의 탑비는 파손된 사례가 아주 많다. 이로 보면 13세기 수선결사와 백결사의 협력관계가 갈등 관계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영원사는 조계종에서 천태종으로 여러 차례 변하면서 유적의 파손이 심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376년 조계종의 회암사 주지였던 나옹(懶翁)이 영원사로 추방되던 중에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사실도 영원사가 조계종을 박해한 사원으로 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천태종과 소자종(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의 갈등을 종파 내의 분파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는 천태종을 포함한 같은 부류의 3개 종파로 보이고 천태종의 우위는 조선초까지 존속하였다는 해석이 오히려 타당성이 있다. 불교 전체 대종파와 군소 종파의 갈등으로 돌리거나 천태종의 약화 과정이 주지를 장악하여 영향력을 넓히려는 조계종과 경쟁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관법과 참선의 수행 방법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태종은 중원에서 일찍 종파로 발전하고 교학을 종합한 교상판석을 주요시한 교종 종파였다. 그러나 고려의 천태종은 선종의 참선보다 지관의 수행을 우월하게 평가한 대각국사 의천에 동의한 고승과 법안종에 기반을 가진 5산문이 주도하여 출발한 종파였다. 수선사와 초기의 협력이 깨진 갈등은 반드시 규명할 필요가 있다. 조계종과 천태종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서 선종 중심의 종파로서 화엄종과 유가종을 능가한 양대 종파로 유지된 요소가 조선 초기 사원의 수효에서도 입증된다. 그리고 조선의 불교 종파에서 조계종과 천태종이 선종으로 합친 다음에는 조선 후기에도 선종의 우위로 통합된 경향이 강하였다.

과수원과 묘지로 변한 밀양 영원사지. 조계종 보감국사 혼구(混丘)의 부도와 탑비에 모아 놓은 불상과 광배. 이곳에는 천태종의 정오가 뒤를 이어 주지(住持)하였고 이후 두 종파는 치열한 갈등을 보였다. 이로 이곳에서 수선결사와 백련결사와 달리 천태종과 조계종의 종세를  가늠하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지만 불교학계와 국사학계는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과수원과 묘지로 변한 밀양 영원사지. 조계종 보감국사 혼구(混丘)의 부도와 탑비에 모아 놓은 불상과 광배. 이곳에는 천태종의 정오가 뒤를 이어 주지(住持)하였고 이후 두 종파는 치열한 갈등을 보였다. 이로 이곳에서 수선결사와 백련결사와 달리 천태종과 조계종의 종세를  가늠하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지만 불교학계와 국사학계는 경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다. 〈금강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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