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살림 깊이 살펴
형님 숙종에 화폐주조 권해

〈대각국사문집〉에는 의천 스님의 수많은 글 가운데 유달리 성격이 다른 긴 편지가 있습니다. 속가의 형님인 숙종 임금에게 화폐를 만들어 보급할 것을 청하는 글입니다. 스님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주 많은 문헌을 두루 읽었고 화폐유통의 역사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재정을 담당한 연구기관의 보고서라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세속적인 일과는 결연히 작별을 고한 출가자가 돈과 관련한 내용을 이리도 길고 자세하게 펼치고 있는 것이 의아합니다.

어쩌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째는, 출가한 스님이라 하더라도 고려국 왕자로서 늘 세속 정치와 무관하지 않은 입장이었다는 점입니다. 나라가 돌아가는 형편이나 백성의 삶을 모른 척하려야 할 수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불교가 세속을 뛰어넘은 출세간의 이치를 다루고 있지만 경전을 들여다보면 수행이 어느 정도 나아가면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세속 사람의 삶 속에 궁극의 경지가 서려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돈을 벌기 위해 아침저녁 발품 팔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을 벗어나면 달리 부처님 법을 구할 곳이 없음을 의천 스님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지 앞부분이 결락(缺落)된 것이 아쉽지만 의천 스님은 송나라 이전의 역사를 샅샅이 훑어 내려오면서 각 왕조가 어떻게 화폐를 바꾸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주(周)나라 경왕(景王) 때 주전(鑄錢)이 가벼운 것을 걱정하여 대전(大錢)을 만들었음을 들려주면서 화폐를 바꾼 시초를 밝힙니다. 화폐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가 아닌, 기존의 화폐가 어떤 불편이 있었기에 새로운 화폐를 주조했는지를 밝힌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화폐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 제6대 성종 임금 시절(996년)에 처음으로 규격화된 화폐 건원중보(乾元重寶)를 만들었는데 구리가 아닌 쇳덩어리로 만들다 보니 무거웠고, 모든 백성이 생활 전반에서 사용할 수 없었으며, 차·술·음식 등을 파는 곳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외면했습니다.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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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이로움을 담은 편지

이후 제15대 숙종 임금 때(숙종 7, 1102년)가 되어 구리로 동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해동통보(海東通寶)입니다. 여기에는 숙종의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강력하고도 간절한 제안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화폐주조를 청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의 임금 되는 이가 전폐(錢幣)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는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시책입니다.(〈대각국사문집〉 243쪽, 이상현 옮김)

일부 계층이나 한정된 장소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두루 편리하게 쓸 수 있는 화폐를 만들어서 널리 유통하는 것, 무엇보다도 민생 안정이라는 가장 중요한 과업을 성취할 수 있다고 스님은 권합니다. 스님은 ‘돈’의 개념부터 설명합니다.

‘전화(錢貨)’라는 물건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몸에 네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錢)이니, 바탕이 둥글고 구멍이 네모진 것으로서, 둥근 것은 하늘을, 네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인바 하늘처럼 덮어주고 땅처럼 실어주며 끝없이 유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천(泉)이니, 두루 통하여 흘러 퍼지는 것이 끝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 같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포(布)이니, 민간에 배포하여 상하에 고루 미치게 하면서 영원히 막히지 않게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넷째는 도(刀)이니, 큰 이익을 남겨 빈부(貧富)에게 공평하게 분할하고 날마다 쓰면서도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위의 책, 244쪽)

이 네 가지 설명은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그것은 두루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물건에 담긴 네 가지 설명을 읽자면 부처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든 돈이든 세상 어느 한 곳으로만 치우쳐 쌓이지 않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두루 그 혜택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백성들은 간편하고도 영구적인 ‘돈’ 대신 미곡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쌀과 같은 곡식으로 경제활동을 하자니 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나라에서 화폐를 주조해서 널리 쓰이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다섯 가지 이로운 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다섯 번째 이로운 점은 결락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첫째는, 사람과 마소[馬牛]가 힘들지 않습니다.

쌀을 화폐로 삼으면 운반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가볍게 몇 푼이면 될 것을 무겁게 곡식으로 허비하며, 수백 리 떨어진 곳까지 쌀을 운반할 경우 말 한 마리에 실을 수 있는 것이 2석(石)에 지나지 않고, 걸핏하면 열흘을 넘기기 일쑤여서 사람이나 말이나 벌써 힘이 절반은 소모되고 맙니다. 또 혹한기나 혹서기에 소나 말이 없는 빈민이 직접 등에 지고서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가다가 쓰러지곤 하는데 이 어려움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엽전을 사용하면 등에 지거나 우마에 싣고 가는 고통을 면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동전을 사용하면 무겁게 곡식을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편리함은 말할 것도 없으며, 소나 말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가난한 사람이 빈한한 삶의 무게에 미곡의 무게까지 더해 휘청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든든한 후원 아래 경서를 읽고 저 심오한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던 수행자 눈에 저잣거리의 괴로운 현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음에 틀림없습니다.

두 번째는, 귀한 곡식을 백성의 굶주림을 달래는 데 쓸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며, 고아나 과부 등 곤궁한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직 전미(田米)뿐인데, 이것을 화폐로 삼고 있으니 교활한 불량배와 교묘하게 이끗만 좇는 무리들이 모래흙을 섞거나 썩어 먹지 못할 낟알을 섞는가 하면, 계량을 속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호소할 곳 없는 선량한 백성들이 간신히 몇 되나 몇 홉의 쌀을 얻더라도 키로 까불고 물에 일고 나면 먹지 못할 것들이 열에 네다섯은 되는 실정인데, 아무리 엄형에 처해도 이런 짓을 그만두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엽전을 사용하면 간교한 작태를 근절하고 곤궁한 백성을 구휼할 수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활한 불량배’와 ‘이끗만 좇는 무리’들이 문제입니다. 미곡으로 거래를 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하지 않으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굶주린 백성들 몫이요,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도 이 비리는 고쳐지지 않으니 아예 동전을 모두가 다 사용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미곡으로 봉급을 받으니 폐해가 큽니다.

창고에 비축된 곡식은 단지 한 해만 충당할 수 있는데 양반은 언제든지 아무 때나 다른 곳에서라도 미곡을 운송해 받을 수 있는 반면 그해 농사에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말단 관리의 집은 곡식이 떨어져 권세 있는 호족에게 가서 비싸게 곡물을 사들입니다. 있는 자는 더욱 재산을 불리고 가난한 자는 더욱 곤궁해집니다. 게다가 정직한 선비(端士)조차도 미곡을 다른 것과 바꿔 먹기 위해 등에 짊어지고 다니니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지금 화폐제도를 결행하여 녹봉의 반절을 엽전으로 지급하면 독책(督責)도 줄어들고 흉년에도 대비하면서 권세 있는 호족을 억누르고 정직한 선비를 우대할 수도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세 번째 이로운 점 역시 세속 사람들의 처지를 보듬으려는 스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곡을 가지고 배를 불리는 호족을 억누르고 가난한 사람, 정직한 말단 관리를 보호하자는 것이지요.

네 번째는, 동전을 사용하면 불이나 물에 망가지지 않습니다.

곡식이나 포목 등을 화폐로 사용하고자 창고에 쌓아두면 포목은 오래지 않아 삭아 문드러지고 미곡 역시 부패하여 썩으며, 좀 먹고 습기 차고 빗물이 새고 화재가 발생할 걱정이 있습니다. 상한 것을 가려내고 완전한 것을 고르다 보면 백 개 중에 열 개도 좋은 것이 없는 실정이요, 왕년에 화재가 났을 때는 한 무더기에 불이 붙자 백 무더기에 온통 번져서 순식간에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화(錢貨)를 사용하면 견고하게 비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여(賜與, 나라나 관청에서 백성게게 금품을 내려주는 행위)하기도 매우 편리하니 이것이 네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이상, 위의 책244~245쪽 인용)

자원을 낭비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점은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백성들 살림살이에 고루 쓰일만한 것인데 습기와 화재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면 그 피해 역시 가난한 백성들에게 돌아갑니다. 보관도 쉽고 주고받기에도 편리한 동전을 사용하면 이런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고 스님은 제안합니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숙종은 1097년에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서 엽전 삼한통보(三韓通寶)와 해동통보를 제작하게 됩니다. 1097년은 의천 스님이 국청사 주지에 취임하여 처음으로 천태종의 교리를 강의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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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꼭 필요한 ‘밥’과 ‘법’

의천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강설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법(法, 진리)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살림을 살피고 세속 일의 편의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왕에게 화폐주조를 강력하게 청하여 밥을 챙겨주었습니다. 밥과 법은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크고 깊은 간격이 있지만 그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에게서 건강하게 식사하는 법을 듣고서 건강을 되찾은 왕은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며 “부처님께서는 내게 두 가지 이로움을 주셨다. 건강하니 현재가 이롭고, 가르침을 따르니 다음 생이 이로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려 백성들의 법과 밥을 살뜰히 챙기다 세연(世緣)을 다한 스님이 부처님 칭호라 할 만한 ‘대각(大覺)국사’라 불리는 것은 마땅하고도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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