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역사적·시대적 가치 및 변형·왜곡 적은 작품”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사찰 입구 천왕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17세기 ‘사천왕상(四天王像)’ 8건을 30일간의 예고 기간(9/7~10/6)을 거쳐 보물로 지정했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동서남북 네 방위에서 불국토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사찰 정문인 일주문과 주불전인 대웅전을 연결하는 중심축에서, 사천왕상은 주불전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천왕문에 배치된다. 일반적으로 갑옷을 입고 보검 등 지물을 들고 있으며,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려 악귀 등의 생령으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사천왕상은 ‘장흥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등 이미 보물로 지정된 3건을 포함해 현재 전국적으로 20여 건이 전하는데,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조성되다 이후에는 불화 등의 형태로 그려졌다. 전란 이후 사찰 재건과정에서 불교 부흥이라는 범불교적 역사적 소명을 담아 17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사천왕상의 지정기준은 △17세기 중엽 이전 작품으로 전란 이후 재건불사 및 불교 중흥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 △17세기 후반 작품으로 그 구성이 완전하고, 전하는 과정에서 변형이나 왜곡이 적으며, 시대성 또는 작가의 유파성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동일 유파의 작품 중 가장 확실하고 대표성 있는 작품이다.

‘구례 화엄사 소조사천왕상(求禮 華嚴寺 塑造四天王像)’과 ‘여수 흥국사 소조사천왕상(麗水 興國寺 塑造四天王像)’은 전란 이후 벽암각성(碧巖覺性)과 계특(戒特) 대사에 의해 사찰이 복구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다. 두 사천왕상 모두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제작된 의좌형 사천왕상이며, 전체적으로 중량감 넘치는 조형 감각, 사각형의 주름진 큰 얼굴, 넓고 두텁게 표현된 콧방울 등은 동일 지역 내 17세기 전반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이미 보물로 지정된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제작한 조각승 응원과 그 제자 인균으로 이어지는 유파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여 진다. 두 사천왕상 모두 발밑에 악귀 등 생령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보은 법주사 소조사천왕상(報恩 法住寺 塑造四天王像)’ 역시 전란 이후 벽암각성에 의해 주요 전각이 순차적으로 중창되는 과정에서 조성된 것이다. 양식적 특징 및 목재 연륜연대분석(나이테연대분석) 결과 등으로 볼 때 17세기 중엽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현전하는 사천왕상 중 매우 드문 입상이며, 5.7m에 이르는 최대 크기의 사천왕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발밑에는 생령으로 청나라와 조선의 관리를 등장시켰는데 이는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고, 조선의 탐관오리들에게 종교적 감계(鑑戒)와 교훈을 주고자 의도한 최초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사회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김천 직지사 소조사천왕상(金泉 直指寺 塑造四天王像)’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으로는 드물게 발원문이 발견됐으며, 이를 통해 1665년 완주 송광사를 근거로 활동하던 단응(端應)과 그의 유파 조각승인 탁밀(卓密)·경원(敬遠)·사원(思遠)·법청(法淸) 등을 초청해 조성한 것임이 밝혀졌다. 방위가 적힌 묵서가 함께 발견돼 그동안 논란이 분분했던 사천왕상의 각 천왕별 방위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호남과 영남 조각승의 불상 제작과 교류 활동도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고흥 능가사 목조사천왕상(高興 楞伽寺 木造四天王像)’은 17세기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목조사천왕상으로, 같은 전남 지역의 화엄사·흥국사 등의 사천왕상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조각 양식을 띠고 있다. 천왕문 해체 복원 시 발견된 상량문·복장발원문 등을 종합해 볼 때 1666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조각승은 밝혀지지 않았다. 개성적인 신체 비례, 곧은 자세에 정면을 향한 무표정한 얼굴, 단순하고 평면적인 보관 등이 보이는데, 이는 소조상에서 목조상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가늘고 야윈 형태적 특징은 당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비교적 표현이 자유로운 사천왕상에 담은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커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연구 가치가 크다.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靈光 佛甲寺 木造四天王像)’은 원래 전라북도 무장 소요산 연기사에서 17세기 후반 제작한 것으로, 연기사가 폐사되면서 설두선사(雪竇禪師)가 1876년 영광 불갑사로 옮겼다. 여러 편의 나무 조각을 접목해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고 동시에 머리카락이나 세부장식, 양감이 필요한 부분은 흙으로 정교하게 제작해 소조상에서 목조상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17세기 전반 중량감 있는 당당한 체격을 갖춘 사천왕에 비해 균형 잡힌 장신형으로 조형감각이 변모되고, 좁고 높은 화형 보관을 쓰고 있는 등 17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적·예술적 양식을 갖고 있으며, 원형의 손상과 큰 변형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미 보물로 지정된 ‘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 중 사천왕상에서 나온 복장전적을 사천왕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관리하기 위해 당해 목록에서 해제하고, 새롭게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 및 복장전적(靈光 佛甲寺 木造四天王像 및 腹藏典籍)’이라는 명칭으로 지정했다.

‘홍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洪川 壽陀寺 塑造四天王像)’은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천왕문 안에 모셔져 있다. 강원도에 현전하는 유일한 사천왕상이라는 점에서 희소하며,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사천왕상이라는 점에서 조각사적으로도 중요하다. 또한 사적기를 통해 1676년 승려 여담(汝湛)에 의해 조성되었음이 명확하게 확인된 17세기 후반의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형식과 양식 변천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여러 요소들이 세밀하게 표현돼 있어 우리나라 현전 사천왕상 중 세부 표현이 가장 뛰어나고 섬세하다.

‘공주 마곡사 소조사천왕상(公州 麻谷寺 塑造四天王像)’은 내부에 남겨진 묵서를 통해 1683년 조성됐음이 명확하게 확인된 작품으로, 사천왕상 편년 연구에 기준이 된다. 단응 유파가 영산전 과거칠불을 제작하였고, 양식적으로도 단응 유파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사천왕상은 단응 유파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소조기법으로 제작됐으며, 직지사·마곡사를 거쳐 ‘예천 용문사 소조사천왕상’으로 이어지는 단응계 사천왕상 양식의 변화와 흐름을 연구할 수 있어 17세기 사천왕 도상 및 조각 유파의 활동범위와 동향, 불상의 제작 방식과 순서 등 다양한 방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일괄 지정은 중요한 조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개방·노출돼 있어 보존관리가 쉽지 않았던 사천왕상을 적극행정의 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소유자(관리자) 등과 협의하고, 전국 조사를 거쳐 추진됐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면서 “앞으로도 ‘사천왕상’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소유자 등과 협조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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