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축전 만든 오현 스님
시단의 어머니 김남조 시인
​​​​​​​거인들이 남긴 큰 메아리

해마다 8월이 되면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과 백담사는 문인들로 북적입니다. 시인이기도 했던 무산 조오현 스님이 만드신 만해축전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해 여름도 김남조 시인을 비롯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만해마을을 찾았습니다. 만해축전은 어느새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하던 문인들의 인사 장소가 되었습니다. “만해축전이 끝나야 여름이 간다.”고 했었지요.

유심 작품상 시상식으로 기억합니다. 인사 말씀을 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조오현 스님이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더니 김남조 시인을 향해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결혼합시다.”

갑작스런 공개 청혼에 좌중에서는 박수와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김남조 시인은 조용히 뺨을 붉혔습니다. 아, 노인에게도 홍조(紅潮)가 있음을 이제는 저도 압니다. 이듬해 서울 성북동 흥천사 중창식 때였습니다. 역시 많은 문인들이 행사를 주관하는 조오현 스님을 뵈러 흥천사를 찾았습니다. 사회자가 좌중의 가장 원로인 김남조 선생께 축사를 청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계신 김남조 선생은 마이크를 받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스님의 청혼을 정중하게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박수와 폭소가 터져 나왔습니다. 까닭을 아는 사람은 재미있어서, 까닭을 모르는 사람은 의외의 발언에 놀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날 흥천사 중창식의 가장 큰 화제는 두 원로의 결혼 발언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였습니다.

조오현 스님은 만해축전을 세계적인 축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만해마을을 문인들의 집필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경내에 시집박물관을 만들어 연구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해대상은 조선일보사에, 만해마을은 동국대학교에 관리를 넘겼습니다. 그리고는 몇 년 뒤에 입적하셨습니다. 구급차마저 돌려보내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깨끗한 죽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현 스님 전에 오현 스님이 없었고, 오현 스님 뒤에 오현 스님이 없을 것입니다. 스님 가신 뒤의 만해축전과 만해마을은 전과 같은 활기가 없습니다. 스님의 그늘이 참으로 컸음을 떠난 뒤에 절감합니다.

김남조 시인은 먼저 떠난 남편인 조각가 김세중 교수를 기리는 미술상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자비를 들여 우수한 작가들을 시상하고, 남편과 함께 지내던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자신은 근처의 아파트로 숙소를 옮기고 미술관의 운영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만 96세, 생애의 마지막까지 시를 쓰고 텅 빈 상태로 지상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저는 예술가의 삶은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김남조 시인을 시단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며 시인들은 어머니를 잃은 고아들처럼 울었습니다.

한때 이 세상에 거인들이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거인이었음을 떠나고 난 뒤에 알았습니다. 거인들이 떠난 세상, 허전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영향은 후세에 큰 메아리로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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