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호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최소한의 실천

종교를 깊이 있게 잘 모르는 필자 같은 이의 상식으로만 봐도 성직자에게 음식은 최소한일 것 같다. 과한 음식은 포만감을 주어 졸음 같은 것을 유발하는 등 집중할 수 없게 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방해하고, 나태로까지 이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한 살생과 자연의 훼손을 유발할 수 있음은 물론 농·어부와 같은 이들에게 불필요한 수고와 폐를 끼칠 수도 있다.

이에 더해 불가에서는 ‘적당한 양을 담는 밥그릇’이란 의미의 발우(鉢盂)를 사용하여 공양함으로써 최소한의 음식 섭취를 실천하고 있다. 발우공양은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불교가 지향하는 의식과 질서가 정연하게 녹아 있다. 먼저 발우는 큰 것부터 밥그릇·국그릇·물그릇·찬그릇에 수저 한 벌, 발우 받침대, 발우 수건, 수저 집이 한 세트다. 밥그릇에 나머지 세 그릇이 들어가게 만들어 공간의 욕망도 최소화하려는 불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공양 때는 밥그릇을 왼쪽, 국그릇을 오른쪽에 두며 그 뒤에 각각 찬그릇과 물그릇을 놓되 정사각형을 이뤄야 한다.

공양은 매우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시작을 알리는 죽비를 세 번 쳐서 공양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데, 이때 발우를 자기 앞에 가져다 놓는다. 그런 후에 죽비를 한 번 치면 물과 밥·국·반찬 순으로 정해진 그릇에 음식을 담을 수 있다. 이때 주는 물은 공양 후 발우를 닦을 때 사용하는데, 이를 천수(千手)라 하며 먹어서는 안 된다. 밥은 모든 스님에게 똑같이 배분되며, 받을 때는 반드시 합장해야 한다. 밥은 한 번 돌린 다음, 아랫자리부터 한 번 더 돌리게 되는데 양이 부족하면 이때 더 받을 수 있고, 처음에 받은 밥의 양이 많다고 생각되면 덜어낼 수도 있다. 공평과 아래로부터의 존중과 배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모든 배식이 끝나면 다시 죽비를 세 번 치는데, 비로소 합장 반배를 한 후에 공양을 시작한다. 물론 발우에 한 번 담은 음식은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 한 후 죽비소리가 두 번 들리면 숭늉이 배분된다. 숭늉을 모두 먹고 나면 다시 죽비를 한 번 쳐서 상을 밖으로 물린다. 그러고 나서 처음 나눠준 천수로 발우를 씻고 발우 수건을 이용하여 그릇을 깨끗이 닦아낸다. 다 닦아낸 후 죽비를 한 번 치면 천수를 동이에 붓는데 이때는 아랫자리부터 실시한다. 끝으로 죽비를 세 번 치면 합장과 반절을 하며 공양을 마치게 된다.

발우공양은 공평과 나눔, 배려와 존중을 기저로 한 음식을 대하는 의식인 셈이다. 이를 통해 쌀을 비롯한 각각의 식자재는 물론 이 음식이 사중 공양에 오르기까지 수고해준 모든 이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음식과 함께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것은 곧 부처님 말씀의 실천이며 음식으로 최소한을 채우지만 동시에 심신을 정소(淨掃)할 것을 다짐하는 과정인 것이다.

효당의 다도와 고수

발우공양의 의미와 예법을 필자는 1960년대 말에 다솔사(多率寺)에서 배웠다. 다솔사 주지 스님으로 계셨던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선생님으로부터다. 당시 삼성출판사 부산지사장으로 재직하던 필자는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부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존경받고 있던 연배 높은 문필가와 종교·언론인 등과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었다. 출판사에 종사한다는 점과 어른을 잘 따르고 붙임성이 좋았던 필자의 태도를 이쁘게 봐주신 배려 덕분이었다. 그분들은 필자에게 ‘근암(近巖)’이라는 호까지 지어주시며 의미 있는 자리에 자주 불러주시곤 했다. 효당 선생님을 비롯해 서각가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1899~1989), 문학가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 1906~1987),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 선생 등이 그런 분이셨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분들이기에 지금도 그립기만 하다.

효당 선생님은 스님이다. 그런데도 필자를 비롯한 후세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독립운동가이면서 교육자·정치인이고, 고 김상현 동국대 명예교수가 밝힌 바와 같이 당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학승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기 때문이다. 특별한 혜안으로 필자를 제자처럼 지도해 주셨던 선생님은 늘 “근암! 사중 음식을 비롯해 무엇이라도 과하게 취하지 말라. 과한 것은 해롭다.”라고 말씀하시며 하심(下心)을 갖추고 실천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때 효당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다도(茶道)다. 선생님은 차도 중요한 음식이라 여기시며 만나는 사람마다 “차 한잔하시게. 차를 즐기는 사람은 장수한다네.”하고 법문처럼 말씀하셨다. 〈한국의 다도〉를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다도를 정립하셔서 오늘날 한국 다도의 중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선생님은 “차는 정신을 맑게 하며, 정진에 도움을 준다네.”하시며 늘 차를 가까이하라고 권하셨다. 필자가 50여 년을 차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함은 물론이다.

또한 선생님을 통해 ‘고수’라는 채소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고수는 오신채(五辛菜)를 금하는 북방불교의 계율 상 사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향신료다. “고수를 먹을 줄 알아야 중노릇한다.”라는 말이 있듯, 승가에서는 고수를 자주 먹어왔다. 효당 선생님도 평소 공양주 보살에게 고수김치를 담게 하거나 공양 때 음식에 고수 넣기를 주문하셨다. 하지만 고수는 비누 맛 같은 특유의 이질적인 향미 때문에 처음 대하는 사람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갓 출가한 행자나 사미승 등이 절 음식에 사용한 고수의 냄새와 맛에 적응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필자도 처음 다솔사 공양간에서 효당 선생님과 함께 고수가 든 음식을 먹었을 때 익숙하지 않은 맛으로 인해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지금도 고수는 효당 선생님과 함께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떠오르게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익숙해진 고수는 이제 필자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친근한 벗이 되었다. 평소에도 즐겨 먹지만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고수가 식탁의 한자리를 차지하곤 한다. 고수는 다솔사에서 효당 선생님이 필자에게 준 소중한 유산이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오제봉의 기지와 기상

청남 오제봉 선생은 15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환경(幻鏡) 스님을 시봉하면서 붓글씨를 배웠다. 1952년 환속한 후에도 정진하여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일가를 이루게 되는데, 오제봉 선생이 해인사 공양간 소임을 맡고 있을 때의 일화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언젠가 해인사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승려들이 함께하는 승려대회가 일주일간 열렸다고 한다. 그 대회는 조선 총독도 참석해 축사할 만큼 의미가 큰 대회였던 모양이다.

청남은 그 많은 스님이 삼시 세끼 일주일 동안 공양할 음식을 준비한다는 게 여간 큰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식은 그 지역과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가장 큰 척도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지혜롭게 활용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지만 당시 해인사의 살림은 뻔했을뿐더러 일본 승려들에게 과한 대접을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적으로 모든 문물이 우리로부터 유입되어 국가의 틀을 갖춘 일본인들에게 우리 문화의 깊이와 저력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만은 억제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청남은 인근 사찰과 해인사 말사 채공 스님들을 끌어모아 머리를 맞댔다. 양과 질보다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양념 삼아 콩나물을 비롯한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매 끼니 맛과 모양이 다른 음식을 척척 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 스무 끼니나 되는 음식을 말이다. 행사가 끝난 후 일본 스님들은 물론 함께했던 고위 관리들까지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생각이 스며들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효당 선생은 일본 다이쇼 대학(大正大学) 불교학과에 재학 중이던 1932년에 도쿄에서 김법린(金法麟) 등과 함께 불교계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을 결성한 바 있다. 청남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벌어진 ‘해인사 만당 사건’(1939년 음력 12월)에 연루돼 일본 순사에게 붙들려 합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7개월간이나 구금당한 바 있는데, 이후 행적을 볼 때 그의 일본인을 향한 이와 같은 기지와 기상을 충분히 엿보게 한다.

효당 선생님도 함께한 자리에서 직접 들은 청남 선생님의 회고담은 당시도 지금도 통쾌한 기억으로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디지털 환경의 속도만큼이나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우리 사찰과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등 불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이 사찰을 찾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2004 서울세계박물관대회’에는 자크 페로(Jacques Perot)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회장, 미국박물관연합(AAM) 회장, 짝끄리 씨린턴(Chakri Sirindhorn) 태국 공주 등 미국·중국·러시아·일본·영국 등 해외에서만 1,500여 명의 박물관·미술관장이 참여했다. 행사 중에 특정분과에 참석한 분들이 템플스테이를 꼭 해보고 싶다고 요청해와서 할 수 있게 해드렸다. 이들은 폐막식 자리에서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의 소임을 맡았던 필자에게 ‘한국에서의 템플스테이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감사를 표해주었다. 뿌듯한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템플스테이는 시민들의 또 다른 여가와 체험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또한 도심 사찰이나 기도하기 좋은 소규모 사찰에 가보면 미국과 유럽, 스리랑카와 티베트 등지에서 오신 스님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티베트박물관이 있는 보성 대원사(주지 현장 스님)에도 인도와 티베트에서 오신 스님들이 상주하고 있다. 따라서 ‘카레’와 ‘난’ 같은 음식이 공양간에서 제공된다. 템플스테이를 하러 온 손님들과 신도들은 물론 우리 스님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어떤 때는 그분들이 채공을 맡을 때도 있다. 이렇듯 시류에 따라 사찰음식도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되 결코 변질하여서는 안 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 불교와 사찰 문화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사찰음식이다. 발우의 불교 이념, 차와 고수 그리고 청남의 기지가 곧 변질하여서는 안 될 사찰음식의 철학인 것이다.

김종규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장·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정조인문예술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삼성출판사 회장·한국박물관협회장·문화재청 문화재위원·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준비위원장·천태종 전국신도회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모란장·은관문화훈장·명원차문화대상·일맥문화대상 문화예술상·자랑스런 박물관인상·4.19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