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제국의 평화와
고려 중세문명의 확산

화불의 기법은 진전사원에서 사용한 초상화 제작에서 비롯되었다. 천연광물을 입자의 안료로 가공하여 아교 와 백반을 활용하고 방충의 효과가 있는 색종이에 구사한 사경과 비단에 화불을 재현한 불경의 표지와 변상 도이다. 다길 김경호가 전승한 천태종의 소의경전 〈묘법연화경〉 제1권(왼쪽)과 조선 초 천안 광덕사 은자사경 3책(오른 쪽).
화불의 기법은 진전사원에서 사용한 초상화 제작에서 비롯되었다. 천연광물을 입자의 안료로 가공하여 아교 와 백반을 활용하고 방충의 효과가 있는 색종이에 구사한 사경과 비단에 화불을 재현한 불경의 표지와 변상 도이다. 다길 김경호가 전승한 천태종의 소의경전 〈묘법연화경〉 제1권(왼쪽)과 조선 초 천안 광덕사 은자사경 3책(오른 쪽).

고려의 정치와 외교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특성이 강하였다. 태조는 후삼국을 신라의 귀순과 후백제의 정벌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절충하여 통합하였다. 질서와 평화를 존중하는 선(善)에는 귀순을 강조하고 이를 해치는 악(惡)에는 부득이 정벌을 사용하였다. 통합을 완성한 태조의 계승자도 전국의 지역별 차이와 토착 기반을 인정하고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의 북방민족 국가인 거란(Cathey)과 세 번이나 맞장을 떴을 정도로 고구려의 기상을 유지하였다. 한때 세계를 가장 넓게 정복한 몽골제국과도 대응하면서 외교로 돌파하고 왕정복고와 소수민족 연합과 혼인동맹이란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었다.

고려는 신라가 경덕왕 이후 당의 문화를 흡수하였던 기반을 귀순으로 통합하여 동아시아의 문화전통을 교육제도와 독서삼품과로 보존한 특징이 있었다. 고려 인종시대 학식(學式)에서 잡업(雜業)의 내용을 보면 동아시아 상고시대에 저술되었다가 남북조시대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고전을 보존하여 활용한 근거가 각 분야의 전문과학인 잡학의 서적에서 확인되었다.

고려는 귀족사회라기보다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보존하면서 중세문명을 발전시킨 첨단국가였다.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은 케임브리지학파를 주도하여 성취한 동아시아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오랜 기간 여러 문명을 폭넓게 탐구하여 학문의 정상을 유지했던 옥스포드대학조차 도달하지 못한 동아시아 과학기술의 영역을 통합하여 완성한 케임브리지학파의 공로는 세계 학계가 선망하였다.

케임브리지학파의 동아시아과학기술사(SCC)는 남북조시대에 사라졌다는 수학과 의약학·지리학(지질학 포함)·천문학의 저술이 실린 서적이 신라의 교육에서 보존하였다거나 적어도 고려에서도 인종시대까지 인재 등용의 관문인 교육과 잡업의 출제에서 활용하였고 동아시아 중세에 문명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를 간과하였다. 고려의 종이[製紙]·먹·붓·도자기·연적 등 문방사우와 인쇄술은 21세기가 되어서야 미국 학계가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학계는 새로운 세기의 벽두에 영국의 케임브리지학파보다 수월성(秀越性)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고려의 화불과 사경은 이제야 미국의 경매시장에서 제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자기의 차구(茶具), 양잠과 직조, 그리고 실용수학에서 복식부기 등이 고려사원의 운영을 비롯하여 국가재정에서 내부통제를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국가와 사원의 운영에도 수월성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과 한국의 학계가 노력해서 입증한 새로운 고려시대의 평가이다.

지도의 흰 부분은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초기 몽골제국이 정복한 영역이다. 검은 부분은 독립국이거나 몽골과 동맹을 맺은 국가이다. 몽골제국에서 ‘대원’이란 국호를 사용한 시기에 이미 세계 경영을 달성하였다. 몽골제국은 칭키스칸과 그의 계승자가 동유럽과 서남아시 아를 정복하여 교통과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쿠빌라이는 차의 기원지인 동아시아의 서남 운남과 파간왕조까지 확보하여 마지막 차의 최 대 생산지인 남송을 섬처럼 남긴 상태였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계승하고 쿠빌라이와 소수민족의 협력을 강화하여 다수 민족 을 제압하고 평화와 문명의 교류를 주도하였다.
지도의 흰 부분은 쿠빌라이가 칸에 오른 초기 몽골제국이 정복한 영역이다. 검은 부분은 독립국이거나 몽골과 동맹을 맺은 국가이다. 몽골제국에서 ‘대원’이란 국호를 사용한 시기에 이미 세계 경영을 달성하였다. 몽골제국은 칭키스칸과 그의 계승자가 동유럽과 서남아시 아를 정복하여 교통과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쿠빌라이는 차의 기원지인 동아시아의 서남 운남과 파간왕조까지 확보하여 마지막 차의 최 대 생산지인 남송을 섬처럼 남긴 상태였다. 고려는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계승하고 쿠빌라이와 소수민족의 협력을 강화하여 다수 민족 을 제압하고 평화와 문명의 교류를 주도하였다.

대원제국에 기여한 천태종의 사상과 예술

고려의 화불과 사경은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고려의 천태종에서 이룩한 첨단의 불교예술이다. 천태사상은 동아시아에서 확립된 불교사상의 하나이고, 5세기에 시작된 방대한 교조의 설법을 체계화하여 이해하려는 교상판석이 6세기 중반 천태종 종조 지의(智顗)에 의하여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10세기 전반 오월 국왕의 요청에 따라 고려의 고승 제관(諦觀)이 찾아가 저술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에서 다시 선명하게 체계화되었다.

고려에서 천태사상은 남종선의 한 갈래인 법안종에 유학한 선승들에 의하여 알려졌다. 그럼에도 천태종은 이 무렵 종파로서 출발하지 못하였다. 고려의 고유한 차로 유일하게 이름을 전하는 뇌원차는 국왕이 공신의 상례에 부의(賻儀)나 국사를 우대한 예물로 사용하였다. 뇌원차는 법안종과 같은 시기에 성행하였으나 뚜렷하게 서로의 영향은 규명되지 못했다. 다만 고려에서 금제의 차도구를 오월에 가던 고승의 사신과 함께 선물에 포함한 사례가 있었다. 이로 보면 서로의 관계가 적지 않게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에서 천태종은 법안종을 추종했던 5산문의 고승들에 의하여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보다 앞서 남쪽의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후신 진국에 〈법화경〉의 다보탑과 이불병좌(二佛竝坐)로 드러낸 천태예술은 고려의 천태종보다 먼저 유행하였던 증거이다. 고려의 3대 종파가 화엄종 고승 의천을 천태 시조로 추앙하는 비문을 세운 1137년은 그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난 후였고 천태종의 출발이 늦어진 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었다. 경북 칠곡군 선봉사지에서 발견된 비석은 비문의 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천태종 고승의 비는 이를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전하지 않거나 파손이 극심하다. 선봉사비는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보존되었기 때문에 천태종에서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유지되었다는 특성이 있다. 천태종의 사원은 조선 세종 초기까지 적지 않게 지방에도 건재하였으나 폐사된 사례를 제외하고 모두가 선종으로 통합되어 광복 후에 대한불교조계종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에 출발한 대한불교천태종이 이들 사원의 전통을 계승하거나 폐사였던 천태종의 사원을 찾아서 복구하였다는 소식은 듣지 못하였다.

탐진(耽津)에서 비교적 가까운 화순 운주사는 물론 장흥의 금장사(金藏寺)에도 최고의 승계를 가진 대선사가 있었다. 금장사의 대선사가 백련사 제4대 주지인 진정국사 천책(天頙)에게 차를 보내고 천책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낸 시가 〈호산록〉에 실려 있다. 최근에 장흥이 고향인 분에게 금장사의 소식을 문의하였더니 지금은 터만 남았고 밭둑에는 야생차가 아직까지도 무성하다고 알려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또한 몇 년 전까지도 탑재가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동문선〉에 실린 무외국사의 글에는 1310년 이곳 법당에는 미륵삼존불을 조성한 경위가 자세하게 실려 있다.

탐진과 백련사는 조선시대 들어와서 지명은 강진(康津)으로 절은 산 이름을 따라 만덕사로 변하였고 지금은 천태종에 속한 사원도 아니다. 이곳은 원묘국사 요세가 백련결사를 열었던 지방의 가장 유명한 천태종 사원이었으나 고려의 유적으로는 백련결사의 초조인 원묘국사 요세의 비신을 받치고 있었다는 귀부만 남았다. 필자는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만덕사 터를 여러 차례 찾았고 진정국사 천책이 남긴 〈호산록〉과 정약용이 주도하여 정리한 〈만덕사지〉를 찾아 소개하고 최자(崔滋)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날 문경의 미면사지에서 동백련사를 열었던 유적도 확인하였다. 그가 새롭게 확장한 상주의 동백련결사에서 탐진의 남백련인 만덕산으로 돌아와 용혈암에 머물던 시기의 글도 남아 있다.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崔冲)의 후손 최자(崔滋)가 지은 원묘국사 요세의 일대기를 담은 비를 얹고 있던 귀부의 힘찬 모습. 최충이 지은 원공국사 지종의 비문과 이 비에는 태조시대에 고려를 찾아온 천축의 고승 마후라와 시리바일라가 공통적으로 실려 있었다. 현재 귀부의 비신은 조선 후기 이우(李俁)가 지은 만덕사사적비다. 이와 같이 고려의 고승비의 귀부가 조선 후기의 비신을  결합시킨 유사한 재활용을 볼 때마다 기막힌 조화라고 감탄하기보다 우리가 더 중요한 본질을 잃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崔冲)의 후손 최자(崔滋)가 지은 원묘국사 요세의 일대기를 담은 비를 얹고 있던 귀부의 힘찬 모습. 최충이 지은 원공국사 지종의 비문과 이 비에는 태조시대에 고려를 찾아온 천축의 고승 마후라와 시리바일라가 공통적으로 실려 있었다. 현재 귀부의 비신은 조선 후기 이우(李俁)가 지은 만덕사사적비다. 이와 같이 고려의 고승비의 귀부가 조선 후기의 비신을  결합시킨 유사한 재활용을 볼 때마다 기막힌 조화라고 감탄하기보다 우리가 더 중요한 본질을 잃고 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백련결사와 수선결사 유적의 차이

진정국사 천책의 글에는 화순 운주사가 두 번 나오고 그곳에는 이미 원묘국사 요세가 만년에 착수한 불사의 기록이 전한다. 이미 불사를 시작하여 천책이 상주로 떠나기 전에 원묘국사를 대신하여 남긴 글이 〈호산록〉에 실렸다. 천불천탑의 유적으로 알려진 운주사의 수많은 불상과 불탑은 원묘국사를 도와서 조성하였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전한다. 천태종의 사상은 매우 실질적이고 현세불인 석가모니의 설법을 교상판석으로 강조한 사상이 돋보인다. 다만 교조의 깨달음을 초기에 설법했다는 경전보다 만년에 설법한 〈법화경〉이나 열반에 대한 종말론이 강하여 미륵사상과 상통하는 요소가 강하다.

〈법화경〉은 ‘후대에도 불국토를 이룩할 때마다 다보불이 출현하여 교조와 자리를 함께 하여 돕는다.’는 타력을 강조한 신비사상이 강하다. 석가불과 다보불이 보여주는 정겨운 협력은 운주사의 초입에서 볼 수 있다. 석가를 인간보다 절대적인 구원자로 묘사한 장면은 기독교의 부활을 주제로 강조한 신학과 상통하는 요소가 크다. 예수의 생애에서 공백 기간을 ‘동방의 현인을 찾아 〈법화경〉을 읽으면서 선지자로 자라기 위하여 수련하였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석가의 설법은 본래 인본주의가 강하고 바라문 계층의 사제가 강조한 힌두교의 원초 사상과도 달랐다. 이 때문에 석가는 네 가지 신분이 뚜렷한 아리안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네팔에 가까운 우랄·알타이 어족의 후예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미륵불이나 다보불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종말론이 강화되면서 기독교와 상통하는 타력신앙이 〈신약성경〉에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까지 등장하였다. 천태사상이란 평화의 시대로 순조롭게 전환하기 위한 통합을 위한 회삼귀일을 강조한 최선의 처방이다. 고려 백련결사의 유적에서 제대로 보존된 사례가 적다. 강화에서 환도한 개경의 국청사와 묘련사는 무외국사 정오가 이끌던 무렵에는 천태종의 중심사원이었지만 후에 유적의 조사나 복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밀양의 영원사는 본래 조계종의 사원이었으나 원각국사 덕소 때에 천태종 사원이었고 14세기 후반에는 천태종에서 조계종으로 바뀌면서 종파 간 갈등이 심각했던 사원이었다. 그곳에 조성된 유적은 파손이 심하여 이를 근거로 종파의 특징을 연구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조계종의 부도와 탑비도 마찬가지로 파괴가 심하다.

화순 운주사는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시기 다양한 사상으로 접근하여 해석한 여러 견해가 있었다. 필자는 2021년 6월 24일에야 서울의 경험이 많은 석공 명장과 함께 처음 운주사를 답사하였다. 무엇보다 석조의 수많은 불상과 탑이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된 유적인가 아니면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는가를 문의하였다. 결과 적어도 석조 조각은 여러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답을 얻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원묘국사 요세를 대신하여 작성한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에 실린 불사를 밝힌 글을 근거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한다. 이를 조성하고 제대로 다듬지 못한 시기에 백련결사에는 세 가지 큰 변동의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원묘국사 요세를 도운 불사이고 다음은 담양에서 일어난 이연년(李延年)의 백제부흥운동이고 마지막으로 삼별초의 항몽투쟁이다. 이 세 가지는 처음 하나가 불사를 촉진시킨 동기가 되고, 다른 사건은 불사를 중단시킨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탐진의 만덕산 백련결사는 이곳의 불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법화경〉 28품을 구현한 조각이었다.

13세기 전반 고려의 천태종은 만덕산 백련사를 중심으로 진정국사 천책은 원묘국사 요세를 도와서 〈법화경〉의 보현신앙을 강조하였다. 이를 운주사의 천불천탑으로 구현하였으나 전란과 내란에 의하여 제대로 후대에 전하지 못하였다. 뒤이어 왕정복고, 그리고 개경 환도와 국청사와 묘련사 등을 개경에 복원하고 불사에 몰두하였던 사실이 무외국사 정오가 보여준 만년의 모습이었다.

천태종의 불사는 〈법화경〉 28품을 나타낸 전범(典範)이 있었으나 초기와 달리 14세기 초기는 석조 조각에 몰두한 시대는 아니었다. 왕실이 직접 참여하는 진전사원의 행사에서 쓰인 이동이 가능한 두루마리 어진과 화불을 접어서 간편하게 대원제국의 대도와 고려의 개경을 왕래하였다. 또한 어진과 화불과 사경을 담당한 서예가와 화승이 양국의 궁중을 오가면서 조성하고 제의를 수행한 시대로 바뀌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불교유적의 방향이 천태종에서 불상과 불탑보다 휴대하거나 불사마다 펼쳐서 사용하는 사경과 화불로 바뀌었다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천태종은 조계종에 다음갈 정도로 고려 후기에 종세를 떨쳤고 무외국사 정오가 왕사와 국사로 책봉되었을 무렵에는 조계종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태종의 사원은 조선 세종초기에 조계종과 통합되어 선종으로 불렸다. 진정국사 천책의 〈호산록〉이 그나마 후반부가 남아있어서 백련결사와 수선결사의 협력이 어느 정도 짐작되는 근거가 밝혀졌다. 두 결사는 모두가 지리산 남쪽 따뜻한 차의 주산지를 배경으로 삼아서 발전하였고 위치로도 차 생산에 협력한 특징이 있었다.

고려 후기의 불교 결사에서 백련사와 수선사는 모두 산과 바다에 의지한 느낌이 강하다. 무신난과 몽골과의 항전에서 피난하거나 시달린 주민과 이를 극복하려는 불교결사로 성장한 시대적 배경이 같았다. 고승이 신도와 고통을 함께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또한 이러한 조건을 극복하여 수선결사와 백련결사의 협력관계도 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후기 천태종 백련결사 고승의 비문이나 문집이 제대로 보존된 사례는 극히 적다. 이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는 앞선 시대보다 불교 종파 간의 고유한 특성을 서로 존중하지 않고 갈등이 나타난 현상이고 이를 철저하게 규명할 필요하다. 오늘날의 천태종이 법안종에 유학하여 천태사상을 고취시키고 대각국사 의천을 도왔던 5산문이나 원묘국사 요세의 백련결사를 통하여 배출한 고승들이 대원제국의 불교와 사경과 화불로 교류한 증거는 매우 중요하다. 화불과 사경에서 탁월한 수준을 발휘한 사실은 천태종의 소의경전인 〈법화경〉과 아미타불과 수월관음의 주된 주제인 관계를 규명해야 할 중요한 소재라고 하겠다. 천태종은 현재의 한국불교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시대별 불교예술 기여와 고려에서 조선 초기의 고승과 유적과 저술에 대해 연구한 성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길 기대한다.

‘진국(震國)’ 또는 ‘고려’로 불리며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한 해동성국(海東盛國)을 당에서는 ‘발해(渤 海)’라 불렀다. 해동성국은 법화신앙이 강하였고 〈법화경〉이 존숭되었고 위와 같은 석가불과 다 보불이 자리를 같이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유행하여 〈법화경〉 보탑품을 중요시하였음을 보인다. 북방의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국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태종이 유행하였을 증거를 보여주 는 불교예술품이다. 도쿄대학 박물관 소장. 높이 29cm.
‘진국(震國)’ 또는 ‘고려’로 불리며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한 해동성국(海東盛國)을 당에서는 ‘발해(渤 海)’라 불렀다. 해동성국은 법화신앙이 강하였고 〈법화경〉이 존숭되었고 위와 같은 석가불과 다 보불이 자리를 같이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유행하여 〈법화경〉 보탑품을 중요시하였음을 보인다. 북방의 여러 민족을 통합하여 국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태종이 유행하였을 증거를 보여주 는 불교예술품이다. 도쿄대학 박물관 소장. 높이 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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