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법사와 편지 왕래
송 건너가 화엄학 논해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 고려 14세기, 접은 면 32.3×10.8cm. 송나라에서 보내온 목판을 닥종이에 찍은 것이 다. 오른쪽 두 번째 줄에 징관이 주석을 짓고, 정원이 이를 수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보물 제1124호.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 고려 14세기, 접은 면 32.3×10.8cm. 송나라에서 보내온 목판을 닥종이에 찍은 것이 다. 오른쪽 두 번째 줄에 징관이 주석을 짓고, 정원이 이를 수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보물 제1124호.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나와 함께 이웃 마을에 다녀오지 않으련? 그곳에서 가져올 게 있단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혼자 집을 나섰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가자고 했던 말은 무시한 거지요. 이웃 마을로 가는 길을 안다는 생각에 그냥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간신히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온몸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이 마을에 오자고 하신 거야?’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탓에 밥도 먹지 못했을뿐더러 도시락이나 물조차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마을에 들어가서는 어디에서 밥을 먹어야 할지 물을 마시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지요. 일단 그 마을에 도착했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아이는 지친 걸음을 되돌려 터덜터덜 돌아왔습니다.

종일 아이를 기다리던 아버지가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꾸짖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왜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 봐라, 그 마을에 가느라 괜히 애만 쓰고 말지 않았느냐? 헛된 시간만 보냈고 아무런 소득도 없고 즐거움도 없었고, 게다가 네 이런 꼴을 본 사람들은 너를 보고 비웃을 게다.”

함께 길을 나서자는 아버지의 제안을 무시한 아이의 그날 하루가 참 피곤합니다. 아무 소득도 없이 지쳤고, 자칫 다시는 그 마을로 갈 생각을 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백유경〉에 들어 있는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정신적인 스승을 비유합니다.

‘선지식(善知識)’의 산스크리트어는 ‘깔야나 미뜨라(Kalyāṇa-mitra)’인데, 이 단어는 ‘좋은 벗’, ‘선우(善友)’로도 번역합니다. 나를 정신적으로 성숙시켜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벗이라는 뜻이지요. 수행 길에서 스승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닫는 일이 참으로 훌륭하기는 해도 그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이 있다면 그의 조언을 들어야 합니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진정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만나도 그 가르침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인생 낭비요, 스승을 제대로 만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면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다 빛납니다.

〈백유경〉 이야기가 선지식이 곁에 있는데도 의지하지 않아 낭패를 본 경우라면, 선지식이 있는 곳을 찾아 길을 나서는 구도자도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대각국사 의천이 바로 그 인물입니다.

그는 일찍이 〈화엄경〉에 심취했습니다. 23세에 이미 〈화엄경〉을 강설하기 시작했지요. 〈화엄경〉은 쉽게 읽자고 마음먹으면 그냥 술술 읽히는 경입니다. ‘보살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내용이 경전 속에 빼곡하게 담겨 있으니 ‘아, 이렇게 살면 보살인 것이구나!’하며 느끼면 됩니다. 하지만 그 문장을 차분히 들여다보자면 곰곰이 살펴볼 내용이 많지요. 부처님의 깨달음 경지를 문장으로 펼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진수(晉水)  출신으로 진수 법사로도 불렸던 정원 법사.
진수(晉水)  출신으로 진수 법사로도 불렸던 정원 법사.

 

의천 스님은 분명 〈화엄경〉을 강설하면서 수많은 참고문헌을 뒤적였을 터입니다. 신라부터 전해 내려온 대덕들의 해설서를 시작으로, 화엄학이 크게 번성했던 당나라 때의 문헌까지 두루 살펴보며 읽고 또 읽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의천 스님은 중국에 송나라에 정원(淨源, 1011~1088) 법사가 화엄학에 대해 매우 깊은 경지까지 나아갔음을 알았습니다. 의천 스님은 반가운 마음에 일단 편지부터 보내보았습니다.

“송에 입조하고 돌아온 본국의 사람을 통해서 우리 법사께서 지금 세상에 거하시며 생령(生靈)을 이롭게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감히 천 리 떨어진 곳에서 귀의하는 마음을 의탁하며, 한 봉의 문안 편지를 올렸었는데, 멀리 잘 전달되었을지 걱정만 하며 다른 생각을 미처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5대 10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한 지 100년쯤 지난 시기입니다. 화엄종의 학승들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써낸 책들이 전란과 법란 속에서 온전히 전해졌을 리 만무합니다. 스님은 문안 편지와 함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화엄 관련 서적을 정원 법사에게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은 편지와 불교 서적을 나누며 우정을 키워갔습니다. 정원 법사는 의천 스님에게 ‘어서 송나라로 오라.’고 은근히 재촉하였고, 의천 스님은 쉽게 떠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그 속마음을 편지로 보냈습니다.

“명을 듣는 즉시로 달려가 뵙는 것이 예법에 맞으나, 감히 은혜로운 정을 끊지 못하고 의리를 해치지 못하기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습니다.) …… 제가 갈 수 있는 그때가 오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갈 것이며, 스님을 만나 뵐 인연이 되면 얼른 만나서 일심(一心)의 지혜를 전하고 가없는 법의 등불을 나누고 싶습니다.”

의천 스님은 정원 법사의 글과 초상화를 구해서 늘 가까이 대하며 하루라도 빨리 만나볼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마음은 정원 법사가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자취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서로 계합하고,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도 서로 얼굴을 마주하듯 항상 눈앞에 선합니다. 가만히 듣건대, 그대가 노승의 영상을 얻어 보고는 감탄해 마지않고, 노승의 문축(文軸)을 얻어 보고는 완미해 마지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이 구구한 몸이 어떻게 그런 대접을 헛되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자였고, 불교계 최고 지위에 오른 만큼 어딘들 마음대로 가지 못할까요? 하지만 그 자리의 무게가 오히려 쉽게 운신하지 못하게 합니다. 스님은 몇 번이고 조정에 송나라로 건너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좌절되었다가 마침내 31살이던 해(1085년)에 밀항을 단행하고 맙니다.

남몰래 바닷길에 올랐지만 정작 송나라에서는 이웃 나라 왕자의 방문으로 여겨 국빈에 버금가는 대접을 하였습니다. 송나라 왕실에서는 손님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 하였는데, 뜻밖에도 고려국 왕자였던 의천 스님이 바라는 것은 ‘화엄’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였습니다. 송나라 황제 철종은 불교계 의견을 두루 묻고 화엄종의 유성(有誠) 법사와 자리를 주선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몰랐습니다. 의천 스님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인물은 항주에서 화엄학을 펼치고 있던 정원 법사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다행스럽게도 유성 법사는 의천 스님과의 대면에서 자신보다 정원 법사가 더 어울린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이웃 나라 왕자 출신의 스님이 항주로 갈 수 있도록 조정에 간곡하게 소(疏)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의천 스님은 정원 법사를 만났습니다.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충분한 44년의 나이 차를 훌쩍 뛰어넘어 정원 법사는 자신을 만나러 온 의천 스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당년에 가르침을 함께 받은 숙연(宿緣)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니, 예법을 행하며 무릎을 굳이 꿇지 말고, 그저 질문하고 나서 물러나 앉도록 하십시오.”

의천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송나라 정치계와 종교계에 엄청난 관심을 불러 모았고, 송나라 불교계는 구법 여행에 나선 의천 스님을 저들 나름대로 대면하면서 간혹 엉뚱하다 싶은 선문답으로 법거량을 하자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구법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 의천 스님이었습니다.

그토록 고대하던 정원 법사를 만났을 때 의천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하고도 낮은 자세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스님의 성품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원 법사는 말합니다. “그런 의례는 다 그만둡시다. 우리는 이미 그동안 편지를 통해 마음을 나누지 않았던가요?”

항주 혜인사의 옛 모습을 담은 그림.
항주 혜인사의 옛 모습을 담은 그림.

의천 스님이 송나라에 머문 14개월 중에 정원 법사와 함께 지내며 화엄학에 대해 강의를 듣고 법담을 나눈 기간은 6개월 정도입니다. 70대 정원 법사와 30대 의천 스님은 쉬지 않고 화엄학을 논하였습니다. 아침에 강의를 듣고 저녁에 문답을 나누었습니다. 20대 초반에 이미 화엄학을 강설하며 〈화엄경〉에 담긴 이치를 궁구하며 지내온 의천 스님에게서는 그 마음속에 맺혀 있던 숱한 의문이 쏟아졌고,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 두었던 화엄을 향한 감동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중국 화엄종의 계보를 정리한 화엄조사 정원 법사에게 스님은 인생 마지막에 만난 가장 커다란 선물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의천 스님은 귀국한 후에도 서신과 경전을 정원 법사에게 보냈고, 황금을 보내어 혜인원(慧因院)을 중창하여 정원 법사가 머물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미 고령에 달한 정원 법사는 의천 스님과의 만남 2년 뒤에 입적하는데 스님에게 이렇게 유서를 전합니다.

“마음이 피곤하고 기운이 위태하니, 나이가 벌써 78세입니다. 이에 11월 말에 붓을 잡고 글 한 통을 써서 경질(經帙) 안에 부착하여 문인에게 당부하며 그대 승통에게 부치도록 하였으니, 이는 결별의 정을 표하고자 해서입니다. (중략) 그대 나라의 여러 학자를 일일이 거명하지는 못합니다마는, 부디 함께 마음을 잘 거두어서 지극한 도를 잊지 말고 화엄도량 안에서 가장 높은 과위(果位)를 이루기를 기대하면서 붓을 적셔 결별을 고합니다. (후략)”

정원 법사의 유서에는 자신이 어떻게 불문에 귀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의천 스님과의 만남이 자신을 어떻게 중국 불교계에 우뚝 서게 하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박한 사제지간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고려국 의천 스님은 송나라의 화엄조사 정원 법사를 빛내게 한 것이지요. 물심양면의 도움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그랬습니다.

저 높은 공중에서 던져진 겨자씨가 땅에 있는 바늘 끝에 정확히 꽂히는 ‘바늘과 겨자씨[鍼芥]’ 비유가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에 실려 있는 이 비유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는 일이 참으로 드물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딱 그처럼 희유한 인연으로 사람으로 태어나 부처님 법을 만났고, 세속을 떠나 구도자가 되어, 자신보다 한 발 앞서 구도자가 된 이를 스승으로 만났습니다. 이 얼마나 드문 인연이요, 귀하디귀한 법연일까요.

스승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자신의 재량을 힘껏 나누어서 스승을 빛낸 제자에게 정원 법사는 유서에서 이렇게 토로합니다.

“아, 나를 알아줄 사람은 오직 우리 스님밖에 없습니다.”

2006년 복원한 항주 혜인고려사
2006년 복원한 항주 혜인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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