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푸른 아귀는
탐욕에 빠진 우리의 자화상

보석사(寶石寺) 감로도,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20×235cm.

장마와 무더위가 한창이었던 지난 여름 한 편의 드라마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악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에 힘입어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였다. 작가가 민속학자와 국립민속박물관에 오랫동안 자문하고 조사하며 마련한 치밀한 시나리오 덕분에 드라마 전반에 한국의 민속과 무속, 귀신 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했다. 그런데 드라마 내용 중 중요한 단서처럼 그림이 한 점 등장하는데, 이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법당 한편에 걸려있는 감로도(甘露圖)다. 드라마에서는 중앙의 커다란 아귀(餓鬼) 모습에 주목해서 이 그림을 〈아귀도〉라 이름 붙였는데, 처음 드라마를 볼 때는 사람들이 아귀를 악귀로만 인식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 속의 악귀(惡鬼)가 굶어 죽어 탐욕스러운 귀신이 된 존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극 중에서 감로도의 아귀를 주목한 작가의 상상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감로도, 조선 16세기, 에지마 코도(江島孝導)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25×281cm.

일본 스님 기증한 16세기 감로도

사찰 법당 안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모신 영단(靈壇) 뒤에 걸려있는 감로도는 죽은 영혼들, 특히 아귀가 된 영혼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식을 행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아귀는 목구멍이 너무 작아서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데 유일하게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감로(甘露), 즉 단이슬만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림의 제목이 ‘감로’라는 것 역시 이 그림이 불쌍한 중생의 영혼을 구제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걸 가장 잘 나타내 준다. 감로도라는 그림의 제목은 ‘감로탱(甘露幀)’·‘감로왕탱(甘露王幀)’ 등 조선 후기에 처음 등장하지만 발우를 들고 감로를 기다리는 그림을 보면 가장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제목이라 생각된다.

2010년 일본 교토의 사찰 류간지(龍岸寺) 주지 에지마 코도(江島孝導) 스님이 국립중앙박물관에 16세기에 조성된 감로도를 기증했다. 기증 당시에 국내에 남아있는 감로도는 대부분 조선 후기 감로도여서 매우 뜻깊은 기증이기도 했다. 언제 어떻게 이 그림이 일본에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사찰에서 17세기 후반부터는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수많은 조선 전기 작품들처럼 이 감로도도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으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크기만 세로로 약 2.4m에 달하고 전체 크기는 세로로 약 3m가 넘는 중대형 불화인데, 제작 연도와 제작자, 혹은 후원자의 기록이 있던 하단 부분은 잘려 나가 남아있지 않다. 대신 불화의 화면 밖 테두리는 일본에서 다시 제작되어 그림 주변에 주색의 격자선을 긋고, 칸마다 일본인들의 법명을 기록하였다. 이들은 장황(粧䌙) 제작을 후원한 일본인들로 추정된다.

이 감로도는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 색이 바랬지만, 그림이 제작되던 16세기 당시 영혼들을 위한 의례를 짐작해볼 수 있는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이후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수륙재와 영산재와 같은 제의가 매우 활발해졌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실은 15~16세기부터 유교적 제사 의식이 사회 전반에 정착되는 것과 함께 사찰에서도 의식집이 발간되고 수륙재 의식이 정교해졌으며, 고려시대만큼은 아니겠지만 돌아가신 부모와 외로운 영혼의 극락왕생을 위한 우란분재(盂蘭盆齋)도 계속되었다. 조선 전기 감로도는 죽은 영혼을 구제하는 의식 장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타임캡슐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수륙재(水陸齋)나 우란분재(盂蘭盆齋), 천도재(薦度齋)와 같은 죽은 영혼을 위한 제의에 사용된 감로도는 일반적으로 화면 위에 일곱 부처와 보살들이 있으며, 중앙에 커다란 시식단이 있고 그 앞에 아귀가 그려져 있다. 시식단의 양옆에는 문무백관과 스님들이 도열하고 아래에는 지옥의 장면이나 중생들의 죽음과 고통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다른 불교조각이나 불화가 부처님이나 보살님처럼 불교의 존상을 그린 예경의 대상이라면 감로도는 의례를 위한 기능적인 면모가 강한 불화이며 곧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위한 그림이기도 하다.

감로도의 구성과 활용

그러면 감로도는 과연 어떻게 활용되었을까? 지금은 법당 안에 있지만, 처음에는 야외에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감로도 속에서도 야외의 산과 나무, 구름 등 자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감로도의 시식단 그림이 다시 감로도 속에 그려진 사례도 있다. 필요할 때마다 감로도를 펼쳐 넣고 의식을 올리고 다시 말아서 사찰에서 보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점차 조선 후기 사찰이 중수되고 여러 법식이 정립되면서 법당 안의 영단에 감로도가 자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돌아온 감로도에도 역시 상단에는 일곱 부처가 죽은 영혼을 구제하려고 내려오고 있고, 왼쪽에는 구제된 영혼을 안내해가려는 인로왕보살이 몸이 휠 정도로 급히 내려오는 형상이다. 중앙의 단상에는 화려한 꽃이 장식되고 가운데 향완을 중심으로 좌우에 놋그릇과 목기 등 다양한 형태의 그릇 위에 공양물이 즐비하다. 공양물 가운데는 각종 과일과 가지, 석류가 있으며 흰쌀밥이 가득 담겨있고 사이사이 촛대를 놓았다. 이 시식단(施食檀)은 위에서 내려오는 일곱 부처를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아귀와 고통받는 중생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단의 왼쪽에는 구름 사이사이로 왕과 문무백관이 도열해 있는데, 공경히 두 손을 모으고 의식에 참여하고 있으며 화면 상단 일곱 부처의 오른쪽에는 나한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머리에 쓴 여러 형태의 모자와 몸에 걸친 도롱이의 모습 등은 실제 의식에 참여한 당시 스님들의 모습을 반영한 듯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 의식을 행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의자에 앉아 오른손에는 금강령을 들고 경상 위에 올려있는 의식의 절차를 적은 책을 보며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의 모습도 있다. 그 아래 온 마음을 다해 바라와 북을 치며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들의 모습도 생생하다. 시식단 앞에는 의식을 진행하는 또 다른 스님의 모습이 보이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여성인데 뒤에 도열한 여인들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려 화려하게 장식하고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일곱 여래와 인로왕보살 부분도.

아귀와 목련·아난존자

감로도의 한가운데는 이 의식이 이루어진 이유이자 이 의식의 최대 수혜자인 세 아귀가 시식단 앞에 앉아 있다. 온몸이 푸른색이며 불타는 듯한 빨간색 머리털을 지닌 모습이다. 배는 툭 튀어나왔고 눈에는 눈동자가 없으며, 입에서는 빨간 불이 치솟는다. 커다란 머리에 비해 너무 가는 목은 목구멍이 너무 작아서 아무것도 삼킬 수 없다. 입에서 뿜는 불은 물을 마시면 모두 배 속에서 타버려 고통스럽다는 아귀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손에 발우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은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를 짐작케 한다.

감로도의 아귀는 〈불설 우란분경(盂蘭盆經)〉의 내용과 관련이 깊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한 명인 목련존자(目連尊者)는 어머니가 죄를 지어 아귀로 고통을 받고 있자, 어머니를 구하러 지옥을 모험하며 결국 공양을 올려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또한 역시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가 아귀 세계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아귀와 바라문과 선인에게 보시하고 공양을 올린다는 〈유가집요구다라니염구궤의경(瑜伽集要救陀羅尼焰口軌儀經)〉·〈불설 구면연아귀다라니신주경(救面然餓鬼陀羅尼神呪經)〉의 내용도 연상시킨다. 아난이 본 아귀는 바짝 마르고 추하며 얼굴은 불타듯 이글거리고, 목구멍은 바늘처럼 좁았으며, 쑥대머리에 터럭과 손톱은 길고 날카로운 소름 끼치는 존재로, 감로도의 푸른 세 아귀의 모습과 일치한다. 사실 조선 후기 감로도에서 아귀가 둘인 쌍아귀의 모습이나 아귀가 혼자 시식단 앞에 표현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약간은 희화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얼른 부처님의 자비로 발우를 가득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조선 후기 감로도 아귀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런데 가만히 아귀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화면 하단에서 갑작스럽게 죽는 중생으로 이어진다. 그림의 하단에는 호랑이에 물려 죽거나 불에 타죽는 장면, 전쟁에서 싸우다 참수되는 장면 등 여러 죽음의 장면과 검은 그림자 같은 영혼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동시에 영혼들이 발우에 부처님이 주신 감로를 받아 들고 구제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다시 그림을 살펴보면 아귀의 손에 들린 발우에도 반짝이는 감로가 있다. 중생들을 향한 아귀의 손짓에는 절망이 아닌 희망이 담긴 것이었을까? 이러한 감로도의 인물들의 모습은 비록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비운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달리하며 희망을 놓지 않고 생을 이어간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마치 드라마 ‘악귀’에서 여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림 속에서 “그래 살아보자.”라는 대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은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세상이다. 탐욕은 줄어들지 않고 삶은 더 각박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자꾸 자신을 비교한다. 나 자신의 겉모습은 사람의 거죽일 뿐 사실 내 안에 빨간 머리의 푸른 아귀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발우 안의 감로를 지나쳐 한없이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시식단 부분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왕과 문무백관 부분도, 나한들의 모습이 담긴 부분도,  의식을 행하는 스님들의 부분도.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공양자들의 모습이 담긴 부분도(왼쪽)와 세 아귀 부분도.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죽음에 직면한 중생과 영혼 부분도.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감로를 받아 든 중생의 부분도.
에지마 코도 기증 감로도 중 감로를 받아 든 중생의 부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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