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세상을 위해’ 경전 읽고
‘유마의 빈방’처럼 분별 비우고
세상 향한 ‘큰 연민의 마음’ 채워야

격주로 열리는 〈유마경〉 강의에는 처음 인원들이 하나둘씩 빠져 나가고 어느 사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법우들만이 변함없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한 번 떠나간 사람들은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건 누가 뭐래도 강사의 자격미달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대승경전은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강사인 내 지론(持論)이다.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지루함을 참아야 한다는 말이다.

경전을 읽는다는 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일까?

“그냥 부처님 말씀을 접하니까 그게 기도인 걸요.”

이렇게 말하는 불자들도 상당수다. 〈금강경〉을 읽으며 ‘읽으면 좋다니까’, 〈법화경〉을 사경하면서 ‘사경하면 좋다니까’ 하는 이유가 진정 이 경전을 처음 쓴 선지식들의 의도에 맞는 것일까? 대체 이 경전이 무얼 내세우고 있고 뭘 말하려는지 파악하려 애쓰며 읽어가기를 권한다.

자꾸만 비어가는 〈유마경〉 강의실, 그 맨 앞자리에서 청중석을 향해 서있자니 불현듯 ‘이곳이 바로 유마의 빈방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마는 왜 방을 비웠을까. 부처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당신의 제자들과 신자들더러 병문안 오게 좀 해달라고 졸라댔으면서 말이다. 대승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사리보살이 대중을 거느리고 자신의 병문안을 왔다면 적어도 맛있는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하고 푹신한 의자도 내어야 마땅하지 않을지. 그럼에도 그는 왜 굳이 있던 가구도 다 내놓고 시중들던 사람들도 다 내보내고 텅 빈 방에 저 홀로 앉아서 문수사리보살을 맞이했을까.

얼마 전, 휑한 강의실에서 1년여 동안 시간을 내어주는 분들과 〈유마경〉을 읽는데 ‘쿵’한 울림이 있었다. 부처님 대신 병문안 와서 병의 증세를 묻는 문수사리보살에게 유마거사는 말하였다. “병이란 것이 세세생생 윤회를 되풀이해오면서 쌓아온 뒤바뀐 착각과 번뇌 때문에 생긴 것이라 실체가 없는 것인데, 병이 무엇이고, 병자가 무엇이겠는가.”라고. 병이란 것이 그런 줄 알았다면 ‘나’라는 생각을 제거하라고. 그저 이 몸을 이룬 법들이 조화롭지 못해 일어난 현상일 뿐이라고. 병도 공한 것인데, 그 공한 병도 또한 공한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악업 짓는 중생을 생각해서 세상을 향한 연민심[대비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유마거사는 말한다.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다며 ‘공’, ‘공’을 외쳐도 끝까지 가져가야 할 것은 대비심이라는 것이다. 마음에는 언제나 분별하고, 승부를 가리고, 자책하거나 세상을 탓하는 불만이 가득 차있는데, 유마가 방을 비운 것처럼 그런 것들 다 비우고 ‘큰 연민’을 채우라는 것이다. 그 연민이 반야지혜를 얻게 해주고 반야지혜를 얻어야 붓다가 된다는 것이다. 붓다의 어머니는 반야(공의 지혜)요, 반야의 어머니는 큰 연민이다. 그러니 붓다의 할머니는 대비심, 바로 세상을 향한 큰 연민의 마음이라는 것 아닌가. 결론을 내어보자. 당신이 경을 읽는 이유는 딱 하나,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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