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음식을 먹어 몸을 사랑하고 보양해도 결국 이 몸은 허물어지고, 부드러운 옷을 입어 지키고 보호하려 해도 반드시 이 목숨은 끝이난다.[喫甘愛養 此身定壞 着柔守護 命必有終]”

원효 스님이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책에서 원효 스님은 모든 부처님이 열반의 적멸궁(寂滅宮)을 장엄한 이유는 한량없는 세월 동안 욕망을 버리고, 고행 정진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반대로 중생들이 고해(苦海)의 불 속에 사는 이유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속에 대한 미련을 끊고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켜서 조사(祖師)가 되고 부처가 될 목표를 세워 정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원효 스님은 무엇보다 수행할 때는 계(戒)와 지혜를 함께 닦을 것을 강조하였으며, 자리이타의 대승행(大乘行)을 닦아 청정한 마음으로 행하면 하늘이 찬양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여래(如來)의 사자좌(獅子座)에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앞의 문장은 세월의 덧없음을 절묘한 문장으로 환기하는 부분으로 부서진 수레는 짐을 실을 수 없고 늙은 몸으로는 용맹정진을 할 수 없게 되니, 발심수행이 요긴하고 급함을 간곡히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몸이 가짜라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오히려 잠시 있는 가짜몸을 위해 돈을 벌어 호의호식 하려 합니다. 마음을 위해 육신을 쓰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위해 마음을 쓰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이 가짜라고 한다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은 ‘법신(法身)’이라 합니다. 법신을 보는 사람은 마음 또한 한결같이 유지됩니다.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늘 ‘한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결같은 그 마음은 산꽃이고 계곡을 흐르는 물입니다. 항상 여여하므로 자태가 곱고 평화롭습니다. 마음이 행복하다는 뜻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여여한 그 마음이 행복을 여는 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간과하고 마음보다 몸을 중시합니다.

원효 스님은 이를 경계해 이 몸이라는 것은 죄업의 몸이며, 한시적 인연으로 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니, 이 몸을 위해 애착과 탐애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대신 삼보(三寶)의 씨앗을 키우기 위해 몸을 이용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수행정진을 하는 주체는 몸이니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선 음식을 섭취하되 유지할 수 있는 정도에서 음식을 섭취하며 수행에 방해가 될까 염려되니 병에 걸리는 일 또한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상적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건강한 신체가 수반돼야 합니다. 병약한 몸으론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울 뿐 아니라 목적한 삶에 대한 진척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록 몸이 가짜이긴 하나 몸을 학대하는 것도 올바른 처신이 아닙니다. 즉 건강은 삶과 수행을 이루는 데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건강은 마음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불교는 마음을 다루는 종교입니다. 〈선문촬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마음이 어두워서 한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자는 중생이요, 마음으로 깨달아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이가 곧 부처이니라.”

즉 마음이 어두운 자는 중생이며, 마음이 밝으면 부처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밝혀 삶을 살아간다면 날마다 환희심이 절로 일 것이며, 모든 어려움과 어두움이 가시어 행복과 자유를 구가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자성(自性)을 밝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이란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거울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울이 깨끗하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비춰주지만, 먼지가 겹겹이 쌓이게 되면 사물을 비춰주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늘 깨끗한 거울을 유지하기 위해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거울을 닦고 닦아 청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을 중시함으로써 스스로 자성을 드러내면 건강에 유익하지만 반대로 자성이 없는 삶은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불러 건강을 잃게 합니다. 몸은 언젠가 소멸하지만 건강을 유지하는 삶이 현명한 이의 처신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려 지혜로운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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