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찾아오는 부처님오신날
불래불거 실상 깨달아
​​​​​​​우리 곁의 부처님 만나자

저녁나절,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에 초라한 사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만났다. ‘고도(Godot)’가 오기로 해서 그를 맞이하기 위함이다. 사실 고도는 어제 오기로 되어 있었다. 아니, 그제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제가 아니라 사실 고도는 그끄저께 온다고 해서 두 사내는 그날에도 이 나무 아래에 와서 기다렸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었다.

두 사내는 오늘 그가 온다고 해서 이렇게 다 늦은 저녁나절에 이 나무 아래로 와서 그가 올 때까지 하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는 올까?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닐까? 기대와 설렘을 품고서.

그런데 이 두 사내는 대체 ‘고도’가 온다는 소식을 언제부터 누구에게서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는 대체 누구일까?

사무엘 베케트가 1952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표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큰 인기를 얻었는데 사람들은 흥미롭게 관람하면서도 한 가지 질문을 가슴에 품고 끙끙댔다. 그것은 바로 이 두 남자가 기다리는 ‘고도’가 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작가인 베케트에게까지 대놓고 물어봤을까.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내가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그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자기가 정작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무엇인가가 오면 그것이 해결해주리라 믿고 그냥 기다린다. 이보다 더 부조리한 일이 더 있을까. 이걸 짚어낸 베케트의 이 희곡은 그래서 부조리극의 고전이라 일컬어진다.

며칠전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는 고운 연등 아래를 걸어 절문을 나서면서 자꾸 이 작품이 떠올랐다. 불자들에게 ‘고도’는 당연히 부처님이실 테고, 이 화사한 연등은 부처님을 기다리는 설렘의 표현인 거다. 하지만 부처님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오시지 않았던가? 이미 오셨는데 뭘 또 환영한다는 걸까? 그럼 그때 오시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오신 뒤에 가셨다는 말인가?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간다. 우리는 부처님이 오시기를 정말 간절히 기다리기는 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토록 간절히 우리가 기다리는 그 분은 대체 어떤 분인가? 어떤 분이기에 우리에게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미리 알려서 온 세상을 고운 연등천지로 만드는 것일까?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미 오래 전에 성불하여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온 세상 모든 생명들에게 진리를 들려주며 현재 지내고 있노라고.

그러니 희곡 속의 두 사내처럼 학수고대 기다리지 말고 잘 살펴야 늘 우리 곁에 계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법화경>을 사경하고 독송하는 일은 이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걸 뜻한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와 계셨고 늘 그렇게 계시기에 오고 가신 적이 없으니 이 이치만 잘 생각해도 불래불거(不來不去)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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