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사찰 벽화·단청 담은 의상은
불성(佛性) 찾는 방편의 하나”

의복은 몸을 보호하는 기능과 함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양한 디자인과 색감을 통해 신분과 소속을 표현하고, 성격과 성별을 드러낸다. 패션아트디자인은 이런 자기표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복에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을 담아내는 예술작업이다.

이기향 패션아트디자이너(68·智光月)는 석굴 벽화·경전 내용 등 불교적 요소를 의복과 접목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최근에는 ‘단청’을 소재로 한 ‘디자인 포교’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내면에 불성(佛性)을 가진 놀라운 잠재력을 지닌 존재”라고 말하는 그녀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미국서 ‘패션’에 대한 꿈을 찾다

어린 시절의 이기향은 ‘자기표현을 잘했던 아이’였다. 1955년 서울 안암동에서 오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녀는 남매 중에서 유독 개구지고 활발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롱을 부릴 때마다 자신을 보며 웃음 짓는 사람들의 모습에 큰 즐거움을 느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꼭 ‘살살이 서영춘(코미디언, 1928~1986)’ 같구나.”하며 칭찬하곤 했다.

판사였던 아버지와 맏며느리로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관장했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가 강했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특기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주었다. 이기향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부모님은 자신을 표현하길 좋아했던 그녀를 고전무용 학원에 보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성실히 무용학원에 다니던 이기향은 어느 날 문득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무용을 하고 그 후에는 미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운명의 이끌림처럼 불현듯 든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장래희망은 ‘세계적인 미술가’가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녀는 다짐대로 무용을 그만두고 아틀리에(Atelier)에 다니며 미술을 배웠다. 목표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었다. 목표가 확고했기에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과 학업에 매진하며 원만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첫 입시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재수를 선택했고, 이듬해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4학년 무렵, 부모님은 이기향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었다. 때마침 어머니의 가까운 친구가 “괜찮은 청년이 있는데,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같은 학교 재학생인 유필화(전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학장) 씨를 소개받았고, 두 사람은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시작했다.

“저희가 같은 해에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 무렵 양가에서 결혼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어요. 그때 시어머니가 ‘번거롭게 따로 날을 잡지 말고, 졸업식 날 상견례를 하자.’고 제안하셨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하고 조금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정말 졸업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다 떠난 운동장에서 양가 친척이 모두 모여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조금 특별한 졸업식 겸 상견례를 마친 두 사람은 그해 여름,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남편은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 경영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이기향도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예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진학해 판화 공부를 시작했다.

부부는 고된 타향살이에 서로의 의지처가 됐고, 아이도 태어났다. 이 무렵 뉴욕에서 지내는 선배 부부와 교류가 잦았다. 당시 선배 언니는 뉴욕에서 패션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기향은 선배 언니에게 관련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그때마다 부러움과 함께 ‘나도 패션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응용미술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순수미술을 전공했던 그녀에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패션에 대한 도전을 주저하게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우연히 방문한 패션쇼에서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느꼈고, 패션학교에 진학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마침 자신도 학교를 졸업했고, 남편도 석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진학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녀는 곧장 보스턴 SFD(School of Fashion Institute Design)에 등록했다.

➊ 1984년 미국 보스턴 SFD 졸업전시회에서 남편과. 
1984년 미국 보스턴 SFD 졸업전시회에서 남편과. 

귀국 후 불교 만나 삶의 화두 바뀌어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고, 인종차별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을 알지 못했다. TV를 틀면 이따금씩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 나오곤 했다. 수많은 편견의 시선은 그녀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 화가 나고 서러움도 몰려왔지만 이런 감정을 오히려 패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원동력으로 삼았다.

1985년 이기향은 교육과정을 마치고 SFD를 졸업했다. 이듬해 남편도 하버드에서 경영학박사를 취득했다. 이어 남편이 독일 빌레펠트대학교(Bielefeld University) 초빙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독일로 향했다. 이 무렵 둘째를 임신하는 겹경사가 이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독일 경영연구원(Universitätsseminar der Wirtschaft)으로 이직했다.

미국에 이어 독일이라는 낯선 땅에서 생활해야 했던 이기향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과 인종차별 문제 등에 점차 지쳐갔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점점 커졌다. 그녀는 남편과 상의 끝에 먼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녀는 시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며느리를 고를 당시에도 ‘불가(佛家)에서 자란 아이’라는 조건을 내세웠을 정도였다. 이기향의 부모님도 불교신자였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나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온 가족이 절에 가곤 했다. 그녀의 이모는 자신이 살던 집을 사찰에 보시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이런 가풍 속에 자랐기에 불교가 낯설지 않았지만 불교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운 적은 없었다.

고된 이국 생활에 지쳐 귀국한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불교기초교리 강좌에 함께 다니자고 권유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어머니의 권유인 만큼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둘째를 출산한 후 시어머니를 따라 불교교리 강좌를 듣기 위해 사찰에 다니게 됐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이기향은 불교를 배울수록 신세계가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불교를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미국에서 더 훨훨 날아다녔을 텐데.’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불교강의는 귀에 쏙쏙 들어왔고, 불교서적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이 무렵 그녀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새언니(큰오빠 부인)가 한양대학교 교수였는데, 사정이 생겨 잠시 미국에 가야 했다. 새언니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강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새언니가 맡았던 과목은 ‘의류 직물’이었는데, 미국에서 패션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시누이가 무리 없이 강의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녀는 흔쾌히 새언니를 대신해 강단에 올랐다. 또랑또랑한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알게 됐다. 그녀는 짧은 강사생활을 마치고, 교수의 꿈을 이루고자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녀는 대학원에서 여러 수업을 들으며 내실을 다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실생활에서 입는 ‘옷’에 대한 디자인이 아니라 의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방법을 고민했다. 주제는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준 ‘불교’였다. 1992년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을, 1995년 일본 문화복장학원(文化服裝學院) 별과를 졸업했다. 틈틈이 한양대·중앙대·전북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이와 함께 자신이 목표로 한 ‘디자인 포교’를 위한 첫 발걸음으로 1995년 의상전 ‘피안을 향하여’를 개최했다. 실크로드 키질 석굴의 ‘보살 벽화’를 모티브 삼았는데, 의상 한 가운데에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자신이 불교를 만났다는 기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품제작에 매달렸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과 불교를 주제로 한 전시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세상에 선보인 이기향은 1996년 한성대학교 교수에 임용됐다.

“어떻게 보면 과감한 시도였죠. 당시에는 제가 불법(佛法)을 만났다는 환희심에 압도된 상태여서 그 기쁨을 표현할 방법이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부처님 옷을 입으면 부처님이 된다.’는 용감한 믿음도 있었고요. 그 덕분인지 이듬해 교수에 임용될 수 있었죠. 교수가 된 이후에는 경전 내용을 주제로 잡았어요. 움직이는 ‘팔만대장경’을 구현해서 사람들을 고양시키고, 대중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싶었거든요.”

이기향은 1999년 〈법화경〉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모티브로 한 의상전 ‘영취산의 환희’를 열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를 우리만의 고유한 문양으로 다듬고 정리하면, 전통의 현대화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패션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시 패션계는 이웃 종교의 신도들이 주름잡고 있었다. 이들은 그녀가 선보인 작품을 ‘종교’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기향은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런 시선과 평가를 ‘편협한 사고방식’이라고 보았다. 반면 가족과 전시장을 찾은 불자들의 응원은 큰 힘이 됐다. 이기향은 이 의상전을 계기로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2000)을 수상했고, 자신이 가는 길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2003년에는 해주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의상전 ‘화(華)의 구도여행’을 열었다.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모티브로 구성한 패션쇼였다. 그녀는 경전 속 일화와 현대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을 접목해 내용을 구성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같은 해 불교여성개발원 제1차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됐다. 2008년에는 〈금강경〉을 테마로 ‘나[我] 훔쳐보기’ 의상전을 열었다. 자기 자신을 직면할 용기가 부족한 우리 중생들이 조금씩 자신을 엿보는 것으로 수행을 시작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경전을 소재로 몇 차례 의상전을 개최했지만 경전 내용을 담아내기에는 불교공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또 자신의 목표는 패션을 매개로 한 ‘불법 홍포’였기에, 보다 대중적인 소재를 고민했다. 그 고민의 산물이 사찰을 아름답게 장엄하는 단청이었다.

이 무렵 불교여성개발원에서 사옥 건립 조성 기금 마련을 위해 ‘불교르네상스의 꿈’(2011)이란 문화제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춤추는 단청’ 의상전을 열었고,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1999년 〈법화경〉 영산회상을 모티브로 개최한 의상전 ‘영취산의 환희’의 한 장면. 보살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999년 〈법화경〉 영산회상을 모티브로 개최한 의상전 ‘영취산의 환희’의 한 장면. 보살들이 법문을 듣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내면에 잠재된 ‘불성’ 찾아야

이기향은 의상전·미술의상쇼·단체전 등을 개최하고, 연구논문을 쓰면서 전문 브랜드를 런칭하는 등 바쁜 일상을 보냈지만, 불교공부와 신행활동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1988년 교수불자연합회에서 활동하던 남편을 따라 회원 교수들과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순천 송광사에서 진행된 4박 5일 단기출가도 체험했다.

1994년 법륜 스님이 인도 북부 둥게스와리(Dhongeshwari)의 불가촉천민촌 아이들을 위한 학교 ‘수자타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 동참하기도 했다. 학교를 보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회향’의 의미를 생각했다. 또 인도에서 첫 싹을 틔워 실크로드 또는 바다를 통해 한반도에 들어온 불교를 다시 인도에 포교하는 일에 큰 감동과 희열을 느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작품세계에 창의력과 상상력이 되어준 훌륭한 거름이기도 하다.

이기향은 2020년 ‘빛깔의 여운, 무늬의 역동’ 회고전을 개최한 뒤, 2021년 2월 정년퇴임했다. 은퇴 후에도 ‘단청’을 매개체로 우리 내면에 잠재된 불성을 일깨우기 위한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에는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의 지도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녀는 내면의 ‘불성’을 표현하는 그녀만의 방법을 찾고자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고 있다.

이기향은 최근 제12대 불교여성개발원장에 취임했다. 신임 원장으로서의 포부를 묻자 “불교를 현대에 맞는 이미지로 가꿔나가는 데 힘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단체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그리고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는 후학들에게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가라.’고 조언했다.

“제가 어려움을 겪고 벽을 만날 때마다 이 구절이 큰 힘과 위로가 됐어요. 우리는 어떠한 선택의 순간에서 흔들릴 때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주변 조언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결정은 스스로 내려야 하고, 그 순간에는 오롯이 자신을 믿어야 해요. 결국 우리의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훈련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디자인 포교’라는 화두를 품고 오롯이 한 길을 걸어온 이기향 패션아트디자이너. 그녀에게 있어서 작품 활동은 자신의 불성뿐만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대중의 내면에 잠재된 불성을 끌어내는 방편이다. 식지 않는 열정으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온 그녀의 작품활동이 세상을 밝히는 하나의 연등이 되어 어둠을 밝혀주길 기대한다.

‘세계적인 미술가’를 꿈꿨던 이기향은 미국에서 ‘패션’에 대한 꿈을 찾았고, 불교를 만나 ‘디자인을 통한 불교포교’라는 인생의 화두를 찾았다. 
‘세계적인 미술가’를 꿈꿨던 이기향은 미국에서 ‘패션’에 대한 꿈을 찾았고, 불교를 만나 ‘디자인을 통한 불교포교’라는 인생의 화두를 찾았다. 
1995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기쁨을 구현한 ‘피안을 향하여’ 의상전에서 선보인 작품. 키질 석굴의 ‘보살’ 벽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1995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기쁨을 구현한 ‘피안을 향하여’ 의상전에서 선보인 작품. 키질 석굴의 ‘보살’ 벽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199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한국의 날(Korea Tage)’ 행사에서 패션쇼를 마치고 모델들과.
1996년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한국의 날(Korea Tage)’ 행사에서 패션쇼를 마치고 모델들과.
불교여성개발원의 제1차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된 이기향은 2011년 사옥 건립 기금 모금 문화제에서 ‘춤추는 단청’ 의상전을 선보였다. 
불교여성개발원의 제1차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된 이기향은 2011년 사옥 건립 기금 모금 문화제에서 ‘춤추는 단청’ 의상전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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