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허망한 한평생은
관음보살의 자비이자 가피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에 그려진 ‘조신의 꿈’ 벽화.
순천 송광사 대웅보전에 그려진 ‘조신의 꿈’ 벽화.

꿈이란 참으로 신비한 체험입니다. 꿈속의 세계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요? 물론 대부분의 꿈은 ‘개꿈’이라고 하는, 별로 의미를 둘 수 없는 꿈입니다. 그런데 ‘개꿈’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그런 ‘개꿈’을 꾸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개꿈’을 통해 현실에서 겪는 여러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꿈의 작용

그런 꿈의 작용을 한 번 쉽게 말해볼까요? 물에 빠진다든가 하여 “이크! 다 젖었네.”하는 꿈을 꾸고 깨어보니 ‘오줌을 쌌더라.’는 식의 체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되는 거냐 하면, 일단 오줌 싸는 사건이 먼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오줌 싼 것이 축축하게 느껴지면 그걸 자신에게 이해시켜야 해요. 그래서 “아, 이래서 축축하구나!”하고 자신을 이해시키는 꿈을 꾸는 겁니다. 그렇게 꿈을 통해 “아, 그래서 그런 거야!”하고 이해시켜야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개꿈’은 꿈을 꾼 줄도 모르고 잊힌 꿈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매일 많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버젓이 살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런 ‘개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볼까요?

그런데 그렇게 잊힌 ‘개꿈’ 말고도 수많은 특별한 꿈들이 있지요? 너무나 생생해서 분명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꿈. 예를 들어 태몽이라든가 예지몽 같은 종류의 특별한 꿈은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신비한 체험입니다. 그런 꿈들은 우리의 현실적인 삶과 분명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지요. 꿈이 현실에 반영되거나 거꾸로 현실의 생생한 반영으로 꿈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현실과 꿈의 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꾸었다지요. 훨훨 기분 좋게 날 때는 분명 나비였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분명한 장자입니다. 그때 장자는 이렇게 묻지요. 호랑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것인가? 장자가 호랑나비 꿈을 꾸는 것인가? “우리 삶 전체가 어떤 존재의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이런 생각이 뻗어 나가다 보면 우리 우주 전체가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꿈이라는 그런 어마어마한 생각까지 나옵니다. 인도의 신화와 사상에는 정말 세계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도 세계가 식(識)의 작용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꿈 체험을 통해 설명하기도 하지요.

‘조신의 꿈’ 특징

왜 꿈 이야기를 그리 거창하게 꺼내는지 궁금하시다고요?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바로 꿈이기 때문입니다. 소개할 고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調信)의 꿈’입니다. 그거 스님이 어떤 처자를 흠모하다가 꿈속에서 한평생을 살았는데 깨어보니 법당 안이더라! 하는 이야기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넘어가기에는 참으로 그 속에 담긴 맛이 너무도 오묘하고, 또 뜯어 보아야 할 구석도 많아요. 춘원 이광수가 이 ‘조신의 꿈’ 이야기를 좋아해서 소설로 쓴 것은 아시나요? 대문호 이광수가 감명받아 소설화할 만큼 맛깔나는 꿈 이야기가 바로 ‘조신의 꿈’ 이야기란 말씀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요? 바로 줄거리를 살펴보도록 하지요.

신라 때 조신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태수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너무도 간절한 사랑의 마음에 낙산사 관음보살님께 인연을 맺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그 여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조신 스님은 낙망(落望)해서 관세음보살님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심을 원망하며 관음전에서 슬피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조신을 찾아왔네요. 자기도 스님을 사모했다고. 부모님께서 시집을 보내는 바람에 억지로 가기는 했는데, 이제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 싶어 이렇게 왔다네요. 그래서 기쁘게 인연을 맺고 몇십 년을 같이 삽니다. 자식도 다섯이나 낳고요. 그런데 그 결혼 생활이 행복했느냐? 전혀 아닙니다. 정말 끼니를 잇기 힘든 나날들이 계속되지요. 결국 유리걸식, 즉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합니다. 그러다가 15살 먹은 장남이 굶어 죽어요. 통곡하며 길가에 묻습니다. 더 처절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10살 된 딸아이가 동네에 구걸을 나갔다가 개에 물려 비명을 질러댑니다. 정말 참혹한 일이지요. 결국 부인이 헤어지자고 해서, 아이들을 나누어 맡아 서로 갈라섭니다. 그렇게 이별하는 대목에서 꿈을 깹니다. 불당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네요.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야기지요? 이런 꿈과 현실을 연결하면서 삶의 모습을 헛된 꿈에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을 ‘환몽(幻夢)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조신의 꿈’은 우리나라 환몽 이야기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 작품이지요. 그리고 다른 환몽 이이기와는 구별되며, 참으로 맛깔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꿈 이야기인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말의 출전인 〈남가태수전〉의 저자 이공좌와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는 말의 출전인 〈침중기〉의 저자 심기제 두 사람 모두 당(唐)대의 사람들이니까 일연 스님보다 앞 시대이고, 조신의 꿈 이야기도 그런 작품의 영향 아래 써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조신의 꿈’ 이야기는 이런 환몽이야기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조신의 꿈’ 이야기는 스님의 이야기라는 점이 특별합니다. 스님이 애욕인지 사랑인지 모를 열병에 걸리지요. 그리고 그 소원을 들어달라고 관세음보살께 빈다는 것 또한 충격적이지요. 스님에게 가장 엄중한 계율이 무엇인가요? 바로 색계(色戒)입니다. 성행위는 철저하게 금해지지요. 율장의 첫머리는 바로 이 색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성행위를 하면 그것은 ‘바라이죄’라는, 스님 신분을 박탈당하는 아주 엄중한 계율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이성에 대한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사랑이라고 미화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애욕이지요, 애욕! 그런데 그 바람을 들어달라고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해요. 얼마나 간절했기에, 스님이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국립극단이 2012년 무대에 올린 연극 ‘꿈’. 이광수의 독려 연설을 듣고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조선 청년의 원혼이 출몰하는 장면(왼쪽)과 조신에게 하룻밤 꿈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을 일깨워주는 관음보살의 모습. 〈사 진= 국립극단〉

세속적 욕망의 투영

혹시 스님들은 전부 큰 뜻을 가지고 출가하셨으니. 성적인 문제에는 담담할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가자보다 더 민감하고, 더 심한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가자는 성적인 부분을 제한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욕망이 생겨도 이성과의 사랑을 통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기에 그 문제가 심적 갈등요소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에게 이 부분은 엄청난 금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갈등하고 부대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몇 스님들께 필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거의 틀림없을 겁니다. 그런 갈등 요소를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재가자들은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극복을 이루어내고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스님들께 존경을 표해야 합니다.

아무튼 조신 스님은 그런 극복과정을 무사히 치르지 못하고 있네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기도의 감응도 없이 조신이 사모하던 처자는 시집을 가 버리고 맙니다. 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또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관세음보살에 대한 섭섭함에 법당에서 울다가 설핏 잠이 든 사이 꿈을 꾸고, 그 꿈에서 한평생을 삽니다. 그런데 많은 환몽 이야기에 잘 먹고 잘사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조신의 꿈’은 참으로 아픈 삶의 현실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먹을 것이 없어 떠돌며 걸식하다 큰아이가 굶어 죽고, 딸 아이가 걸식을 하다 마을의 개에 물려 비명을 지르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참으로 처절합니다. 삶의 괴로움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네요.

어떤 특별한 설정 없이 꿈을 꾸는 ‘남가일몽’이나, 도사의 신통력으로 삶의 허무함을 깨닫는 꿈을 꾸게 된다는 ‘한단지몽’과는 다르게, 자신의 그 뜨거운 바람으로 얻은 사랑의 결과가 이토록 비참하게 전개된다는 점에 또한 큰 시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분홍빛 바람 속에 비극은 잉태되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젊은 시절에는 그것이 오로지 삶의 전부였던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힘이 그쪽으로 쏠릴 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조신의 부인이 이제는 헤어지자고 하는 말속에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죠.

“고운 얼굴 예쁜 웃음도 풀잎의 이슬처럼 덧없고, 지란(芝蘭)의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 솜과 같습니다.”

“나와 당신은 서로에게 폐가 되고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과 나! 어찌하여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요?”

자신들의 결단으로 용감한 사랑의 도피를 한 결과가 이런 처참함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는 삶의 현실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깨달은 부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지요.

“함께 있으면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헤어져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힘들면 버리고 좋으면 함께 있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만, 가고 멈추는 것은 사람 힘으로 되는 게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이제는 헤어지기로 해요.”

참으로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조리 정연하고 담담하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부인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차가운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삶을 달관한 보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신의 결단이 이렇게 끝난 것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부르짖거나, 남편에 대하여 원망을 쏟아붓지도 않습니다. 사실을 너무나 담담하게 드러내기에 오히려 더 처절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지요. 그래서 조신도 납득하고 서로 헤어지는 대목에서 꿈을 깹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가물거리고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라고 하니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거지요. 그 사이에 한평생을 보낸 겁니다. “긴 세월을 짧은 꿈속에서 겪는다.”는 것은 환몽 이야기의 일반적인 구조니까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타다 남은 등잔불은 혹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은 삶의 집착이 아닐까요? 어둠이 걷혀가는 것은 삶의 실상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요?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지만 저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조신 스님이 꿈을 꾸고 깬 곳이 어디인가요? 관세음보살님 앞이지요? 그러니 관세음보살의 가피 아래서 꿈을 꾼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보살님 앞에서 스님으로서 바라서는 안 되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빌고, 그걸 안 들어주신다고 투정을 부리다 울며 잠든 조신 스님. 관세음보살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철부지 자식이 떼쓰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응답을 하신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 네 바람대로 한세상 살아보렴. 네 결단에 따른 삶의 맛이 어땠는지 나에게 말해주렴.”

그런데 조신 스님의 바람이 너무 강렬하고, 또 스님으로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냅다 달려가 버리는 바람에 너무도 진하고 처절한 꿈을 꾸어버린 모양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처절한 한 생을 산 조신 스님은 머리칼이 다 하얗게 세었답니다. 그리고 보살님을 보기 부끄러워했다네요.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이 싫증이 나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질리도록 겪은 듯 탐욕의 마음이 얼음 녹듯 사라졌다. 그래서 보살님의 모습을 뵙는 것이 부끄럽고 뉘우치는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꿈, 삶의 집착에 대한 경계

이 대목에서 좀 불만이 있습니다. 왜 환몽 이야기 등에서는, 아니 불교나 도교 설화 일반에서는 삶을 꿈과 같이 허망하다는 식으로만 묘사할까요? 과연 우리 삶은 꿈처럼 허망하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꿈이라고 아무리 외쳐봐도, 나쁜 꿈을 꿀 때는 무척 괴롭습니다. 그러니 좋은 생각 좋은 소원을 품고서 좋은 꿈을 꾸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삶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담담한 마음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이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조신 스님도 꿈속에서 한세상 다 살았다고 의욕 없이 지내신 것만은 아닙니다. 그 뒤로 부지런히 선한 일을 계속해 나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빗나간 욕망의 힘을 올바른 곳으로 돌려서 제대로 쓰는 삶을 살아가신 것이죠. 그리고 조신 스님의 꿈이야말로 관세음보살님이 조신 스님에게 내려주신 거룩한 가피가 아닐까요? 불경스럽게도 보살님께 애욕의 성취를 빌고, 그것을 안 들어줬다고 투정까지 부리는 철부지 스님에게 좀 따끔한 인생 체험을 꿈으로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아! 그리고 죽은 큰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절에 봉안했답니다. ‘남가일몽’의 이야기처럼 꿈과 현실이 상호 간섭을 일으키는 대목입니다. 돌미륵이야말로 관세음보살님이 좀 엄한 말로 내리신 부촉이 아닐까 싶네요. “조신아! 네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나의 자비가 그런 가피로 내린 것임을 바로 보려무나!”

자, 이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여러분께 한 번 물음을 던져보지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계신가요? 꿈은 꾸실 만한가요?” 그리고 덧붙여 여쭤봅니다. “괴로웠던 꿈의 흔적에서 혹시 돌미륵 같은 걸 캐시기도 했나요?”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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