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엔 기도 권유 거절했는데
지금은 매일 기도하고 봉사해요!”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신일수(75) 불자는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종교활동을 꾸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퇴 후 뒤늦게 불교를 만나면서 젊은 날 보다 일찍이 불교를 만나지 않았던 점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지금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신행생활을 하는 천태불자로 거듭난 신일수 불자를 대구 대성사(주지 도원 스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집안 부담 덜고자 교대 입학

신일수 불자는 1947년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에서 1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이어지는 종갓집으로, 유교를 신봉했던 아버지는 예절을 중시했으며, 제사를 비롯한 집안 대소사를 모두 처리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집안사람 중에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집은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 꿈은 ‘집안 친척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1960년 대구 달성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여자중학교(현 대구일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꿈은 ‘외교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선생님이 영어 수업을 담당했다. 사춘기 소녀의 눈에는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영어선생님의 상냥하고 부드러운 성품과 아이들에게 친절하기까지 한 모습은 무척 멋져 보였다. 그런데 동경하던 영어 선생님은 어느 날 외교관과 결혼을 한다며 갑자기 학교를 그만뒀다. 그녀는 ‘아! 저렇게 멋진 선생님이 외교관과 결혼을 하려고 교사직을 그만두는구나. 만약 나도 외교관이 된다면 영어 선생님 같은 멋진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196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녀는 ‘외교관’과 함께 ‘약사’를 꿈꾸며 학업에 매진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갑작스레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주변에는 엄격했지만, 자식에게는 다정했던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 병문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집에는 아버지가 돌봐주고 있는 막내 삼촌이 있었는데,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는 책임감과 의무로 삼촌이 자립할 때까지 경제적 지원을 해줄 생각이었다. 또 국민학교 입학을 앞둔 막냇동생을 비롯해 동생 네 명의 진로도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3학년인 그녀가 외교관이나 약사가 돼 동생들을 지원해 주기에는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가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니면 등록금과 생활비도 문제였다. 며칠을 고민한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꿈을 접고, 1966년 당시에는 등록금을 받지 않았던 대구교육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제가 이화여대를 간다고 했다면 아버지는 무조건 지원을 해주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만 생각할 수가 없더라고요. 특히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면 대구에 있는 염색공장에 취직하던가, 시골 군위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어야 했죠.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마침 대구교대는 등록금도 없고, 2년제라 빨리 졸업해 취업할 수 있어서 목표로 삼았죠. 그때까지 교사라는 직업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어요. 대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두 달 전에야 친구 언니에게 부탁해 부랴부랴 책을 빌려 해당 과목을 공부했고, 다행히 성적이 잘 나와 대구교대에 입학할 수 있었죠.”

대구여자중학교 재학 당시(사진 왼쪽) 신일수 불자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술을 계기로 대구 교대에 진학해 35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1989년 북대구초등학교 교무실에서 신일수 불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대구여자중학교 재학 당시(사진 왼쪽) 신일수 불자의 꿈은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술을 계기로 대구 교대에 진학해 35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1989년 북대구초등학교 교무실에서 신일수 불자가 환하게 웃고 있다.

하숙집에서 천태종 알게 돼

엉겁결에 입학한 학교였지만 공부를 할수록 교사란 직업에 호감이 생겼다. 대학교 졸업 후 당시에는 오지였던 영양 일월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를 통해 처음 천태종을 알게 됐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충청북도 단양 구인사에 용한 산부처님이 계시는데 선생님도 한 번 다녀오면 좋을 것 같다.”고 종종 권유했다. 하지만 22살의 그녀에게 불교는 낯설었고, 산골 사찰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가족 중에 숙모 한 분도 구인사에 기도를 다니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삼촌 댁에 찾아갈 때마다 숙모는 구인사로 기도를 하러 가고 없었다. 그렇게 자주 집을 비우는 숙모에 대해 ‘식구들을 돌보지 않은 채 왜 자꾸 절에 가서 며칠 밤을 지내고 오는 걸까?’라며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숙모는 정초 기도와 4박 5일 기도를 다녔던 모양이다. 숙모 또한 그녀를 볼 때마다 구인사와 대구 대성사에 다닐 것을 권했는데,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던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결혼 후 1980년 초, 이번에는 시누이에게 구인사 이야기를 듣게 됐다. 시누이는 “친구가 구인사를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고, 이후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말했다. 이쯤 되니 구인사가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주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기도하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처음으로 구인사에 찾아가 4박 5일 기도에 동참하기로 했다. 구인사에 가기 하루 전날,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회색빛 돌이 나오는 꿈을 꿨다. 이게 도저히 무슨 꿈인지 감이 안 잡혔다. 그리고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마침내 구인사에 도착했는데, 입구에 ‘소백산 구인사’라고 적힌 커다란 회색빛 돌이 서 있었다. 바로 꿈에서 본 그 돌이었다. 그녀는 크게 놀란 후 ‘꿈에 나온 돌이 이 돌이었구나. 거참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다.

처음 가본 구인사는 정말 신세계였다. 너무 경이로웠고, 정초라서 넓은 길은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설법보전에 도착해 부처님을 처음 참배하는데 환희심이 저절로 우러났다.

“설법보전에서 부처님을 뵙고 든 첫 생각이 ‘나도 죽으면 이곳에서 천도재를 지내고 싶다.’였어요. 사람이 꽉 차서 발 디딜 틈도 없었죠. 기도실은 물론 구인사 어느 곳에도 사람이 많아 자리를 펼 곳이 없었어요. 대중설법 때는 삼보당에 없는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쪼그려 앉았어요. 2대 종정예하께서 나오시더니 저를 비롯한 대중에게 ‘기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해주셨죠.”

그렇게 황홀했던 첫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처님오신날이나 가끔 시간을 내 대성사에 가곤 했지만, 2대 종정예하의 조언처럼 열심히 기도정진을 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학교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 업무가 많았고, 집안일도 병행하다 보니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심 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고, 그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2002년 1월 대구 대성사에서 봉행된 ‘제4회 전국 교원불자 동계 수련법회’ 모습. 사진 넷째 줄 왼쪽 세 번째가 신일수 불자다.
2002년 1월 대구 대성사에서 봉행된 ‘제4회 전국 교원불자 동계 수련법회’ 모습. 사진 넷째 줄 왼쪽 세 번째가 신일수 불자다.

“스스로 부딪혀 경험해 봐야”

그녀는 2010년 2월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35년간 교직 생활을 했다. 퇴직 일 년 전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리고 ‘대성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신행생활을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대구금강불교대학 7기로 입학해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또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에게 보람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우리들 이야기’라는 신행수기를 만들었다. 이 같은 열정적인 활동에 당시 주지 도산 스님은 그녀를 성서지회 부회장으로 임명했고, 금강불교대학을 졸업할 때는 신행상을 받기도 했다.

천태불자로 신행활동을 하면서 신기한 경험도 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허리가 조금씩 아팠는데, 급기야 바로 눕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퇴직 후에도 남편이 허리를 밟아 근육을 풀어줘야 겨우 잠이 들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그러다 퇴직 후 처음으로 대성사에서 부처님오신날 7일 특별기도에 참석했는데, 5일째 되던 날 허리에 계속해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 아픈 허리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날 아팠던 허리는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나아있었다. 그 후 더욱 굳건한 신심을 가지고 천태불자로서 활동을 하게 됐다.

그녀는 현재 대성사 화주를 맡고 있다. 또 은퇴하기 전에 다짐했듯이 법당 관리, 공양간 봉사, 경내 청소 등 다양한 사찰 울력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녀는 은퇴 후의 신행활동에 대해 “낮에는 개인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저녁에는 자유롭게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장점을 늘어놨다. 또 봉사활동을 할 기회가 많고, 24시간 언제라도 부처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꼽았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니 모든 일이 ‘나’로부터 일어난다는 자기반성과 함께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고도 말했다.

신일수 불자는 아직도 신행생활을 망설이는 늦깎이 불자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직접 경험해봐라. 지금 이 시각이 바로 적기”라고 조언했다.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랬듯이 주변에서 아무리 “좋다. 좋다.”고 해봤자 결국 스스로가 부딪혀보고 겪어봐야 그 좋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일수 불자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신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계획이다. 그녀의 조언처럼 은퇴 후 신행생활을 할지 망설이는 많은 사람이 일주문 문턱을 넘어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개인의 행복에서 더 나아가 가정의 평안을 찾아가길 희망한다.

2012년 3월 대구금강불교대학 7회 졸업 및 9회 입학식 모습. 신일수 불자는 2010년 2월 정년퇴직 후 대구금강불교대학 7기 로 입학했다.
2012년 3월 대구금강불교대학 7회 졸업 및 9회 입학식 모습. 신일수 불자는 2010년 2월 정년퇴직 후 대구금강불교대학 7기 로 입학했다.
2011년 국성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구인사에서 함께 기도하던 도반들과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다. 신일수 불자(첫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다양한 사찰 울력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2011년 국성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구인사에서 함께 기도하던 도반들과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다. 신일수 불자(첫째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는 다양한 사찰 울력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신일수 불자는 현재 대성사 화주를 맡고 있다. 앞으로도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다. 
신일수 불자는 현재 대성사 화주를 맡고 있다. 앞으로도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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