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로 보고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언제나 노력합니다. 책을 통해 선현들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사람들과의 소통망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자신의 인격을 연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위기상황을 맞았을 때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채 당황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만큼 현실적으로 내면의 수양과 지혜의 축적이 덜됐다는 반증이라 하겠습니다.

<법화경> ‘방편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제불세존이 오직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하느냐. 제불세존이 부처님 지혜를 열어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함을 얻게 함이요, 부처님 지혜를 보이고, 부처님 지혜를 깨닫게 하고, 부처님 지혜의 도(道)에 들어가게 하는 까닭으로 세상에 출현한다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한 가지 인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 인연이란 “중생이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청정케 하려 함이요, 불지견을 보이려 함이며 깨닫게 하려 함이며 마침내는 불지견에 들어가게 하려 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불지’란 말 그대로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혜를 통해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본래의 부처를 깨닫게 하고자 이 사바세계에 오셨다는 것이 <법화경> ‘방편품’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불을 시켜주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불을 위해선 제각각 피나는 수행과 정진(精進)을 해야 합니다. 한시라도 방심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일러주신대로 순간순간 갈고 닦아 나가야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성불하기 위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렵지만 불법을 만나기란 더더욱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매순간 끊임없이 정진해 나갈 것을 주문합니다.

경전에 ‘눈 먼 거북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 사는 눈이 먼 장님거북이가 있었습니다. 이 거북이는 100년에 단 한 번 물 위에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거북이가 100년 만에 물 위에 떠올랐다 해도 구멍이 뚫린 나무토막을 만나지 못하면 거북이는 잠시 빛을 볼 뿐 다시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눈 먼 거북이를 비유로 들며 사람 몸을 받기가 이렇게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물질적 부(富)와 세속적 행복, 당장 오늘만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에 ‘자실인의(慈室忍衣)’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비로 집을 삼고, 참는 것을 옷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가정에서는 물론 사회에서도 이러한 정신을 유지한다면 주위의 모든 집이 보살의 집이 될 것이며, 이웃을 웃음으로 만나는 화목한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힘겹게 살다보면 이웃의 고통을 모르는 양 넘어가는 일도 많습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거울삼아 자그마한 자비라도 나누고,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린다면 스스로 수행의 지위를 높여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분노의 불이 일어날 때 일초 동안 호흡을 쉬면서 바로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한다면 평정심을 즉시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어려운 이웃을 만나게 될 때 먼저 보살의 마음으로 측은지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 자리가 기쁨의 교류 현장이 될 것입니다.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성불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은 태양의 광명과 같이 항상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러한 자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일대사 인연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 불자들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불법을 만난 것에 그치지 말고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도 귀한 불연(佛緣)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불연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공덕을 쌓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참된 불자의 자세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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