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재 담긴 본래 뜻
일상 속 스스로 참회하며
​​​​​​​닦아나가는 ‘성찰 의례’

윤이월을 맞아 사찰마다 생전예수재를 봉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근래의 예수재는 대개 합동이지만, 예전에는 단독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판(設辦)’이란 법회를 열 때 비용을 마련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참여하는 이들을 ‘동참재자’라 하는데, 특별한 연고가 있거나 여유 있는 신도 가운데 큰 비용을 내는 이를 ‘설판재자(設辦齋者)’라 부른다. 따라서 ‘독설판’은 재를 단독으로 주관한다는 점에서 ‘합동’의 반대개념으로 생겨난 명칭이다.

옛 자료를 보면 오늘날과 같은 합동 재회나 불공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1970~1980년대까지 자신이 가져온 쌀로 밥을 지어 각자 공양 올리는 독불공(獨佛供)으로 정초기도를 드렸듯이, 여말선초에 시작된 대부분의 의례 또한 그러했다. 당시 수륙재·영산재·예수재 등은 왕실과 지배층의 전유물이었고, 천도되지 못한 채 떠도는 무주고혼을 위한 수륙재 또한 설판재자가 뚜렷했다.

조선 초에는 왕실에서 칠칠재·기일재에 경전을 염송하는 법석(法席)을 펼치며 의식을 치렀는데, 1420년(세종 2)에 이를 모두 수륙재로 대체하도록 명한다. 당시 수륙재의 규모는 칠칠재·기일재보다 간소했기에, 수륙재를 불교식 상제(喪祭)로 통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수륙재는 불교의례 가운데 유일하게 법제화되어, 중종 대에 폐지될 때까지 지배층과 서민의 불교 상제로 사후 구원의 문제를 맡아왔다.

불특정 다수의 고혼을 천도하는 수륙재의 특성으로 인해 합동의 성격을 지녔으리라 보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다만 개인의 극락왕생보다 고혼 천도의 의미가 크기에, 수륙재는 예로부터 가장 공덕이 높은 의례로 여겼다. 이후 제도적인 수륙재는 폐지되었으나 민간에서는 그 역할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자연재해·전염병을 물리치고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는 등 다양한 목적으로 치르는 공동체 단위의 합동 수륙재가 성행한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왕실의 칠칠재를 ‘영산법석’으로 행했듯이, 수십 년 전까지 영산재는 규모가 큰 사십구재를 뜻했다. 이에 격동기를 지나 20세기 중후반까지 수륙재의 맥이 끊겼을 때도 영산재는 꾸준히 전승될 수 있었다.

예수재의 경우 1910년대의 기록을 보면 독설판이 성행했으나, 점차 합동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특히 시기와 무관하게 행하던 예수재가 윤달과 짝을 이루면서, 약 3년마다 돌아오는 주기성은 합동으로 대형의례를 치르는 데 적절했던 셈이다. 이처럼 왕실과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던 의례가 공동체 단위로 바뀌고, 독불공 또한 합동으로 전환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몇 년 전 독설판 예수재에서 본 재자와 의례의 분위기가 합동과 많이 달랐던 점이 기억에 남는다. “단독으로 올리는 이를 보면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스님의 말처럼, 지극함이 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수시왕생칠경〉에 ‘예수재는 초하루·보름마다 닦는 것’이라 하였다. 다수와 함께 행하든 홀로 행하든, 예수재에 담긴 본래의 뜻이 일상 속에서 스스로 참회하며 닦아나가는 ‘성찰의 의례’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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