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기단과 분리 후
75년 만에 본모습 되찾아

남계원 칠층석탑, 고려, 높이 7.5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본관 1966).
남계원 칠층석탑, 고려, 높이 7.5m, 국보, 국립중앙박물관(본관 1966).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수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는 날에도 관람객이 많지 않은 고즈넉한 장소가 있다. 이곳은 울창한 나무 사이 굽이굽이 길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석조물이 놓여있는 야외전시장이다. 서울 종각에 있었던 보신각종과 이름 모를 무덤 앞의 문인석과 무인석을 지나다보면 어느 순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석탑과 석등, 승탑과 탑비를 발견하게 된다. 파란 하늘 아래 천천히 걷다 보면 나무와 풀잎 너머 화강암의 반짝거림 속에 처음엔 무심한 듯 석조물을 지나치다, 다시 돌아보며 감탄하고, 이윽고 조금은 의아하고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야외전시장 석조물 중 압도적인 크기와 웅장한 석탑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높이 7.5m에 달하는 국보 남계원(南溪院) 칠층석탑이다. 원래 개성부 청교면(靑郊面), 즉 지금의 북한지역인 개성시 덕암동 남계원 터에 있던 석탑이다.

남계원 석탑을 천천히 둘러보면, 2개의 기단 위에 칠층으로 높이 올린 석탑은 마치 하늘로 솟구칠 듯하다. 층층이 쌓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제작하였는데 1층 몸돌의 높이에 비해 2층부터 7층까지 몸돌의 높이와 지붕돌의 크기를 점차 줄여 상승감을 강조했다. 여기에 지붕돌의 네 모서리는 위로 들려있어 돌을 정결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다룬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이다. 지금은 노반과 복발만 남아있지만, 상륜부가 온전히 남아있었다면 석탑은 훨씬 웅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기단부는 탑신부와 달리 표면이 시커멓고 동측 면이나 서측 면은 부재가 나뉘어 있거나 마모되고 훼손되어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 기단부의 비어있는 부재들은 마치 무언가 우리에게 말할 것이 있는 듯하다. 도대체 남계원 칠층석탑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남계원 칠층석탑의 이건 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조물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는데 이전의 직접적인 계기는 한일합방 5주년을 기념하는 1915년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 1915.9.11~10.31)’였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1910년 강제 병합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개최한 행사로, 근정전 동편에 미술관을 건립하고 전시실에 경주 감산사 터에서 출토된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 등을 옮겨와 전시하였다. 미술관 앞 야외에는 정원을 조성하고 개성·원주·이천 지역의 폐사지에서 석조물이나 철불을 옮겨왔다. 폐사지에 있던 남계원 칠층석탑도 바로 이 조선물산공진회를 위해 박람회의 전시품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남계원 칠층석탑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석조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보다 앞서 북한지역 사찰과 석조문화재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다. 1902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일행은 경주·서울·개성의 고건축물을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1904년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 수록하였다. 이 보고서에 개성지역의 사원과 석조물 및 불상 조사내용이 담겼는데, 경천사(敬天寺) 석탑과 함께 ‘개성 칠층석탑’, 즉 남계원 칠층석탑에 관한 조사내용도 포함하였다. 사실 세키노의 개성 조사 경로와 조사 대상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명승지 중심의 여행 경로와 중복되는데, 일종의 기념비적인 조형물이 있는 잘 알려진 폐사지와 사찰 문화재를 조사한 것이다. 이후에도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측량 담당)와 야스이 세이이치(谷井濟一, 사진 담당)는 1909년과 1911년 경기도 개성의 주요 폐사지를 조사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축적된 조사자료는 결과적으로 폐사지의 석조물이 원소재지로부터 이전 또는 반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남계원 칠층석탑,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1902년 촬영.
남계원 칠층석탑,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1902년 촬영.

경복궁으로 이건된 남계원 칠층석탑

1915년 남계원 터에서 옮겨온 칠층석탑은 경복궁 경내 정원에 건립되었는데 조선의 불탑과 불상을 보여준다는 목적보다는 정원의 정취를 더하는 조형물로서 이건되었다. 당시 미술관 남쪽으로 펼쳐진 정원에는 남북 축을 따라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남계원 칠층석탑의 위치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앞뒤에 원주에서 옮겨온 영천사(靈泉寺) 보제존자(普濟尊者) 사리탑이 각기 1기씩 배치되어 있다. 석탑 형태의 보제존자 사리탑 2기는 이건되기 전 원소재지에서는 나란히 건립되었는데, 공진회를 위해 옮겨와서는 남은 두 기를 나란히 건립하지 않고 그 사이에 남계원 석탑을 배치한 것이다. 이는 그저 보기 좋게 석조물을 배치한 것으로, 얼마나 맥락 없이 건립이 이루어졌는지 잘 보여주는 단면이다.

여기에 더해 남계원 칠층석탑의 부재들은 한동안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공진회 일정에 맞춰 급히 옮겼는지, 칠층석탑을 옮길 때 지상 위에 드러난 탑신부만 옮겨왔기 때문이다. 물론 1902년 이후 남계원 칠층석탑이 이건되기 전까지의 모습을 촬영한 유리건판에는 탑신부만 지상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석탑을 해체하다보면 탑신부 밑의 기단부도 발견했을 텐데 지상에 드러난 이 탑신부만 옮겨 세우다 보니 석탑의 형태도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현지에 놓고 온 기단부는 1920년 경 경복궁 관내로 반입하였는데, 기단석과 탑신부를 합치는 석탑 복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기단부의 상태와 기술적 한계로 인해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단부는 경복궁으로 옮겨져 석탑 옆에 오랜 기간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남계원 석탑은 이후에도 경회루 동측 등으로 몇 차례 이건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 1990년 경복궁 발굴로 이건될 때 비로소 기단부까지 복원해 75년 만에 비로소 완전체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야외전시장 전경,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촬영.
조선총독부박물관 야외전시장 전경,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촬영.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경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기록에는 남계원 칠층석탑을 개성의 ‘봉경탑(奉經塔)’이라고도 지칭하였는데, 이는 1915년 이건하기 위해 석탑을 해체하면서 탑신부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보상당초무늬를 그린 감색의 표지 안쪽에 금강저를 든 신장상(神將像)을 금선으로 그렸고, 경문(經文)을 은자(銀字)로 적었다. 권 7의 마지막 부분 ‘사성기(寫成記)’에 따르면 1283년 충렬왕(忠烈王, 1236~1308)의 신하였던 염승익(廉承益)이 발원자다. 그는 국왕과 궁주의 안녕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고 자신이 큰 재앙으로 인한 죽음을 피하고 삼계(三界)를 벗어나고자 크게 불사를 일으킨다고 적었다. 또 발원문에서는 죽어서 아미타불을 만나 왕생하고 아내와 딸·아들의 장수를 기원했다.

사경(寫經)은 보통 사경승이 손으로 불교 경전 내용을 옮기기 때문에 공덕을 쌓는 하나의 방편이었고, 고려시대 국왕이나 귀족·권세가들이 화려한 사경을 발원하여 제작하였다. 보통 충렬왕에서 충숙왕 때의 국왕 발원 사경은 밀교계 경전이 많고, 표지에는 연화당초문을 그리고 사경의 첫머리에 신장상을 그려 넣었다. 경문은 1행 14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개인 발원 사경은 대중적으로 유행한 〈묘법연화경〉이나 〈화엄경〉이 많고 표지에는 연꽃을 그리며 사경의 첫머리에는 불보살이나 경전의 서사적인 내용을 그린 변상도(變相圖)를 넣고, 경문은 1행 17자로 쓴다. 그런데 염승익은 〈묘법연화경〉을 옮겨 쓰면서도 사경 첫머리에 역동적인 신장상을 그리고 1행 14자의 경문을 적는 국왕 발원 형식으로 제작하였다. 이는 그가 명실상부한 충렬왕 대 최고의 권세가였음을 알려준다. 실제로 1275년 충렬왕이 발원한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은 신장상의 형태나 은자로 쓴 경문의 글씨 수가 이와 동일하다. 또한 〈고려사〉에는 “염승익이 50명을 동원하여 자신의 집을 짓고, 그 집의 일부를 대장경의 사경소(寫經所)로 삼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15년 석탑 해체 당시 〈묘법연화경〉 외에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지만 〈고려사〉에는 1283년 충렬왕이 남계원과 왕륜사(王輪寺) 석탑의 수리를 지시한 바 있어, 석탑의 중수 당시 제작된 사경은 하나의 법사리로서 납입된 것으로 보인다. 남계원 칠층석탑은 일제강점기에는 개국사(開國寺) 석탑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는 개국사의 남쪽 말사인 남계원 석탑임이 고유섭 선생에 의해 밝혀졌다. 석탑이 해체되고 이건되면서 역사적 기록 등과 대조하여 석탑이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유명하다는 한정식집에 가면 정원의 아름다운 조경 속에 어디에서 옮겨온 듯한 석등이나 석탑 또는 무덤에나 있을 법한 문인석과 무인석이 보이곤 했다. 생경해야 할 풍경이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린 것은 어찌 보면 100여 년 전부터 사찰과 산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닌 정원 속 석조물의 모습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남계원 석탑의 웅장한 모습과 염승익이 발원한 〈묘법연화경〉의 정교하고 화려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 융성했던 고려시대 불교문화에 저절로 감탄하게 한다. 그런데 석탑이 해체되면서 탑신부와 기단부가 1915년부터 1990년까지 75년간 복원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1915년 석탑 해체과정에서 〈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훨씬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남계원 칠층석탑과 기단부, 국립중앙박물관, 1990년 이전 촬영.
남계원 칠층석탑과 기단부, 국립중앙박물관, 1990년 이전 촬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계원 칠층석탑 봉안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 권 7 ‘사성기’ 부분, 〈묘법연화경〉 권 7, 고려 1283년, 국립중앙박물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계원 칠층석탑 봉안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 권 7 ‘사성기’ 부분, 〈묘법연화경〉 권 7, 고려 1283년, 국립중앙박물관.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 13, 고려 1275년 감지에 은니, 국보, 이건희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 13, 고려 1275년 감지에 은니, 국보, 이건희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신소연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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