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돌이킨 그곳 영취산’
절묘한 비유·상징 통해 알려줘

가마쿠라(鎌倉, 1185~1333) 시대에 조성한 현장법사 목조 좌상. 일본 약사사 소장.
가마쿠라(鎌倉, 1185~1333) 시대에 조성한 현장법사 목조 좌상. 일본 약사사 소장.

폭이 몇백 리나 되는 강을 보셨나요? 800리나 된다네요. 배를 타고 건너도 한세월 가야 하겠지요? 그런데 배도 띄우지 못하는 강이래요. 깃털도 가라앉아 버리는, 약수(弱水)라는 물이 흐르는 강이래요. 그런 강이 현장법사 일행을 떡하니 가로막네요. 인도로 가야 하는데, 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 길이 없네요. 거기다 일행을 막아서는 흉악한 요괴까지 있어요.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요괴가 바로 사오정입니다. 하늘의 관리였다가 죄를 지어 추방당해 요괴가 되었고, ‘유사하’라는 강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살다가 결국 현장법사 호위대 삼총사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이 사오정이 말귀가 어둡다는 것도 알고 계시나요? 하지만 그건 〈서유기〉 원작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허영만 화백의 ‘날아라 슈퍼보드’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창조한 캐릭터죠.

스님 해골로 만든 배

문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정말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죠?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몇 백리나 되는 강을 배 없이 건널 길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래서 〈서유기〉가 여기서 끝날 위기! 해결책이 없어서는 안되겠지요?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나오네요. 사오정이 수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그중에는 인도로 법을 구하러 가던 스님들도 있었어요. 그중 몇몇 해골이 깃털도 가라앉는 물에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네요. 그걸 엮어서 배를 만듭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정병(淨甁)을 가운데 배치하니 약수를 건너는 배가 완성됩니다. 그 배를 타고 약수를 건넜기에 〈서유기〉가 이어지게 된 겁니다.

제가 담담하게 소개한 이 이야기 속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비유가 숨어 있습니다. 왜 법을 구하러 가던 스님들의 해골이 가라앉지 않았을까요? 비록 몸은 약수에서 요괴에게 잡아먹혀 죽었지만 진리를 구하러 가던 그 뜨거운 마음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 마음이 약수 위에서도 뜨는 해골로 표현된 것이고요. 현장법사야 성공한 사람이지요. 역사에는 현장법사만 나오지요. 그렇지만 그 현장법사의 성공이 단지 그 혼자만의 공이겠습니까? 그 이전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던 수많은 분의 뜨거운 열정이 그 위대한 성공의 바탕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험난한 여정을 성공하게 만든 해골배! 거기에 보살님의 가피가 깃든 정병! 위대한 성공 뒤에 있는 그 희생과 그 희생의 배에 올바른 방향타가 되어주는 불보살의 가피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우리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앞선 분들의 값비싼 희생의 배를 타고 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 옳은 목표를 향해 나가는 열정을 가지고 힘을 쓸 때, 비록 그것이 빛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뒷사람이 험한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배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앞선 이들의 희생에 감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도 뒷사람을 위해 조그만 바탕이라도 마련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감동을 주는 대목입니다.

선과 악도 분별일 뿐

흑풍 요괴라는 엄청나게 센 요괴를 손오공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관세음보살님을 원군으로 청하네요. 마침 좋은 단약(丹藥)을 만들어 흑풍 요괴를 찾아가던 친구 요괴와 마주쳐 그 요괴를 해치웁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은 그 요괴로 변신하고, 손오공은 요괴가 가지고 가던 단약으로 변신해서 요괴 소굴로 잠입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보살님이 요괴로 변신을 하자 손오공이 슬쩍 이죽거립니다.

“요괴가 보살이 된 건지, 보살이 요괴가 된 건지 모르겠네요.”

보살님이 조용하게, 그러나 우레처럼 누리를 뒤흔드는 소식을 담은 한 마디로 응답하십니다.

“오공아,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한 생각일 뿐이지. 근본을 말한다면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이니라.”

본디부터 선한 존재, 뿌리부터 악한 존재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자후가 토해지는 대목입니다. 절대악(絶代惡)인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이웃 종교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자기와 다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적대시하여 결국 양극화로 치닫는 우리 현실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하는 가르침이죠. 이 가르침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손오공이 열심히 요괴를 토벌하여 마무리를 지으려는 마당에 보살님이 제동을 겁니다.

“잠깐, 손오공아! 그 요괴가 자질이 쓸만하구나. 길을 잘못 들어서 그렇지……. 우리 집 뒷산에 산지기가 필요한데 잘 인도하여 그 일을 맡겨도 되겠구나.”

그리고 날름 요괴를 가로채 데리고 가십니다. ‘요괴를 쫓던 손오공의 보살님 쳐다보기?’ 그런 대목이 되겠네요. 그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손오공을 엄청 고생시키던, 그래서 또 보살님을 원군으로 모셔오지 않을 수 없었던 ‘홍해아’라는 요괴는 아예 제자로 받아들여 버립니다. 정말 요괴 가문에서 완전히 보살 가문으로 호적 자체를 옮기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곳이 〈서유기〉의 무대입니다.

이미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우리 현실의 양극화를 바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에 맞서는 존재를 절대적인 악이라고 보게 되면, 그 한쪽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결과는요? 피 흘리는 역사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서유기〉는 그런 시각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아니 〈서유기〉가 아니라 불교가 본디 그렇지요. 선과 악이라는 것또한 분별에 불과할 뿐,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지요. 그것을 요괴가 보살의 가문으로 이적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내 보여준 것입니다.

중국우정(中国邮政)이 발행한 ‘중국 고전 명작-〈서유기〉’ 특종우표 1세트 4매. 우표 도안은 ‘삼타백골정(三打白骨精)’·‘지두 홍해인(智斗 红孩儿)’·‘두법차지국(斗法车迟国)’·‘정조여인국(情阻女儿国)’이다. 소형 우표 1매를 포함한 전 체 세트의 가격은 11.40위안이다.
중국우정(中国邮政)이 발행한 ‘중국 고전 명작-〈서유기〉’ 특종우표 1세트 4매. 우표 도안은 ‘삼타백골정(三打白骨精)’·‘지두 홍해인(智斗 红孩儿)’·‘두법차지국(斗法车迟国)’·‘정조여인국(情阻女儿国)’이다. 소형 우표 1매를 포함한 전 체 세트의 가격은 11.40위안이다.

해골 배 타고 가는 부처님 나라

조금 길게 설명한 두 이야기 말고도, 무릎을 치게 하는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서유기〉에는 널려 있습니다. 몇 가지 슬쩍 맛보기로 보여 드리지요.

손오공이 분열을 했는지, 완전히 똑같은 요괴 손오공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러 신선도 보살도 전혀 구별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부처님 앞에까지 가게 되지요. 누가 진짜인지 서로 싸우며 오는 모습, 대중에게 설법을 하고 계시던 부처님이 그렇게 오는 두 손오공을 보고 한 말씀 하십니다.

“너희들은 모두 한 마음이로구나. 그런데 보아라! 두 마음이 서로 싸우며 오는구나.”

그리고 요괴의 정체를 밝혀내어 물리칩니다. 요괴라 하여 물리쳤지만, 부처님의 말씀 속에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겨 있지요? 우리의 갈등하는 마음, 언제나 둘로 나뉘어 싸워대는 마음의 모습을 담아낸 대목이랄까요? 결국 어느 것도 내가 아니라 할 수 없기에, 보살도 신선도 구별해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금각대왕·은각대왕의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보배 중에 호리병이 있어요. 이름을 불러서 거기에 대답하면 호리병 속으로 빨려들어가 녹아버리는 무서운 신통을 부리는 병입니다. 손오공도 이름을 부르는 데 대답했다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요. 손오공의 몸은 태상노군이라는 신선의 화로에도 녹지 않는 몸이라 어떻게든 빠져나오지만, 엄청나게 고생을 합니다. 이 호리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름에 대한 무서운 집착을 보여주는, 그 집착이 엄청난 장애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아무개다!” 태어난 후 붙여진 이름, 나의 본질에 붙은 하나의 기호를 ‘나’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름이 단지 모습에 붙여진 기호에 불과한 것에 동의하신다고요? 그런데 정작 그 이름을 빨간색 글씨로 쓰면 왜 기분이 나빠지지요? 아무것도 아닌 기호라면 어떤 색깔로 쓰든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이름을 ‘나’라고 생각하는 집착이 드러납니다. 참된 자신을 완성해가는 큰길에 그것이 엄청난 장애가 되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지요.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금각·은각이라는 요괴의 호리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떠내려온 현장법사의 시체

〈서유기〉를 읽다 보면 여러 번 나오는 것이 색(色)의 관문입니다. 색깔 이야기가 아니라 ‘성적인 유혹의 관문’이라는 말입니다. 저팔계야 본디 욕망을 상징화한 존재이기에 계속 거기에 걸려들지요. 그리고 수많은 요괴가 현장법사를 성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런데 현장법사는 한 번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없어요. 정말 재주 없고, 융통성도 없는 것이 현장법사지요. 손오공이 상대가 요괴인 줄 알아서 여의봉을 휘둘러 때려죽이면, ‘잔인하다’ 야단치고, 손오공을 내쫓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요괴의 함정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는데, 그 모습이 어떤 때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장법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서유기〉를 지탱하는 근본입니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종종 욕망과 감정의 화신인 저팔계의 꼬드김에 넘어가 손오공을 야단치고 쫓아내던 현장법사도 〈서유기〉 후반부로 가면 달라집니다. 슬그머니 충동질하는 저팔계를 야단치지요. “네 사형을 그렇게 비방하면 안 된다.”고요. 욕망과 감정에 흔들리는 우리의 모습, 그러면서도 차츰 줏대를 찾아가려는 우리의 모습과 겹쳐져 슬그머니 웃음을 짓게 됩니다.

그런 현장법사를 중심으로 모든 험난을 헤치고 결국 부처님이 계신 곳에 거의 다 왔는데, 엄청나게 넓은 강을 건너야 합니다. 다행히 배도 못 뜨는 그런 강은 아니고, 접인조사(接引祖師), 즉 맞아 이끄는 조사라는 분이 배를 띄우고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보니, 배가 뱃전만 있고 바닥이 없어요! 한문으로 표현하면 ‘무저선(無底船)’, 즉 밑바닥 없는 배가 되네요.

이건 또 무슨 배일까요? ‘줄 없는 거문고’, ‘구멍 없는 피리’, ‘밑바닥 없는 밥그릇’ 이런 표현들 들어 보셨지요? 언어 문자에 자취를 드러내지만, 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진리를 그렇게 표현하곤 합니다. 이 밑바닥 없는 배라는 것도 그런 표현의 하나겠지요. 모습은 빌리되 모습을 넘어서는 최고의 진리, 그 배를 타고 마지막 강을 건넙니다. 그 강을 건너고 나니 강물에 웬 시체가 떠내려옵니다. 살펴보니 현장법사의 시체예요. 이건 또 무슨 일인가요? 아마도 현장법사가 물질적인 육체를 드디어 벗어났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그런 비유에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道敎)와 신선 사상의 영향도 깃들어 있는 것 같고요.

그리하여! 부처님을 뵙고 경전을 얻어 금의환향합니다. 돌아올 때는 구름을 타고 쉽게 옵니다. 현장법사가 강물에 시체[육신]를 떠내려 보낸 다음에는 구름을 탈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그 공덕으로 모두 훌륭한 과보를 받습니다. 현장법사는 전단불이라는 부처가 되고, 손오공은 투전승불이라는 부처가 됩니다. 사오정은 금신나한이 되지요. 유일하게 저팔계는 정단사자(淨壇使者,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사자)라는 한 급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요. 저팔계가 좀 불만스러워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배가 좀 크지 않니? 제사 지낸 제단 위의 음식은 모두 네 몫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말하니 저팔계가 속도 없이 좋아합니다.

이 대목은 좀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요.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 가운데 욕망과 감정이라는 요소의 격을 좀 낮게 보는 것 같아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요소를 다 성불시켜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거든요. 저는 모든 요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성불시키는 것이 바로 대승의 큰 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둔황에서 출토된 10세기경 현장 스님을 그린 작품. 종이, 52×30cm.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둔황에서 출토된 10세기경 현장 스님을 그린 작품. 종이, 52×30cm.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 소장. 

불교적 가르침 속 도교 색채도

〈서유기〉에 조금 불만스러운 대목은 또 있어요. 가끔 도교적인 색채가 너무 덧씌워져 영원한 삶을 지향하는 신선 사상의 냄새가 묻어나는데 불교와는 조금 어긋납니다. 시대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남성 위주의 관점을 보이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한 선관(仙官)과 선녀가 정분이 납니다. 하늘 세상에서는 그 인연을 맺을 수 없어 하계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선녀는 한 나라의 공주로 태어나고 선관은 요괴가 됩니다. 그런데 선녀는 그런 기억을 못하고, 요괴로 등장한 선관만 주동적으로 움직이지요. 그래서 공주를 납치해 인연을 맺고, 아이까지 낳습니다. 결국 손오공 일행에게 토벌되는데, 선관은 하늘 세상으로 돌아가 징벌만 받고 끝납니다. 반면 공주가 되어 내려온 선녀는요? 전생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요괴 토벌과정에서 요괴와 공주 사이에 태어났던 아기들을 요괴를 유인하기 위해 요괴 앞에 떨어뜨려 무참하게 죽이는데, 이 대목에서는 정말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이런 작은 흠들은 다 용서가 됩니다. 중국 사대기서(四大奇書)에 꼽힐 만큼 재미있는 소설! 절묘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중국인들이 모두 찬탄하는 문학성 속에 이 정도의 불교적 가르침을 녹여낸 점은 참으로 감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자인 오승은의 불교 이해가 그만큼 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장법사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탄식하자 손오공이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부님이 지성으로 깨달으시고 한 생각 돌이키신다면, 그곳이 바로 부처님 계신 영취산이겠지요.”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갈 수 있는 부처님 계신 곳, 그곳에 가는 이야기를 이렇게 장대한 이야기로 꾸며낸 오승은의 문학적 역량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생각 돌이켜 부처님 땅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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