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

(사진=문지연 기자)

고달사지 유물 발굴서 발굴조각창안
한국적인 세계에 알리고 싶어

옥빛 파도가 넘실거리는 제주도 애월읍. 인근에 위치한 극락사의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 등받이가 길쭉하게 솟은 의자 조각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성인 허리춤 높이의 어린왕자 조각상이 서 있다. 일반적인 사찰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전경이었다. 모두 ‘발굴조각가’로 알려진 이영섭 조각가(60)의 작품이다. 그는 최근 양평에서 제주도로 작업장을 옮겼다.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남긴 메시지를 추적하는 과정”이라고 답했다. 세계 최초로 발굴조각 기법을 고안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영섭 조각가를 만나 파란만장했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삶의 이유 찾고자 출가 고민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제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정신적 유산’이었습니다. 여주 고달사지와 양평 석산리에서 아버지가 남긴 메시지를 추적해 냈을 때마다 제가 고민하던 문제들의 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제주도는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남아 있는 곳이에요. 이곳에서 마지막 추적 작업을 마치면 이제 온전히 저를 바라봐야죠.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자유를 찾는 시간이 될 거에요.”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아버지를 회상하는 그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영섭은 1963년 경기도 여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또래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목수이자 양봉업자였던 아버지는 그의 좋은 친구였고, 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종종 그에게 부처님의 일생, 전등사의 나상 여인 전설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장 인상 깊게 들었던 이야기는 여주 고달사에 관한 전설이다.

여주 고달사지의 작업장. 이영섭은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발굴 조각 기법을 창안했다. 

혜목산 자락에 있던 고달사는 신라시대 ‘고달’이라는 석공이 가족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사찰의 석조물을 조성했고, 불사를 끝낸 뒤 결국 출가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그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산하나 너머에 절터만 남아 있는 고달사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봄이 되면 아버지는 양봉을 위해 몇 달씩 제주도에 내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겨울이 다되어야 돌아왔고, 그동안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나무토막을 조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도서관 사서를 맡으면서 더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밤새 책을 읽느라 시험을 보던 중에 졸기도 했다. 특히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수레바퀴 밑에서〉·〈유리알 유희〉 등은 사춘기 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에 빠졌다. 더 많은 책을 읽으며 해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성인이 되면 출가(出家)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서는 문예부와 미술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미술부 활동을 하는 동안 그는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도화지를 칼로 긁거나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는 등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표현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이 되자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 선생님이 미대 진학을 권유했다. 부모님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는 이모부에게 보내 화공으로 일을 시킬 생각이었다. 가정 형편상 대학 학비도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학비를 자신이 지원하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고, 결국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강원대 미술대학에 지원해 실기시험을 보았는데, 함께 시험을 치는 학생들의 실력이 모두 뛰어났다. 입시학원을 다닌 적이 없던 그는 다른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을 제출했고, 시험에 떨어졌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강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 수업을 받으며 그가 두각을 보인 분야는 ‘조각’이었다. 수업 중에 처음으로 소조 작업을 했는데,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자신이 조각에 재능이 있다고 느낀 그는 곧장 실기실을 찾아가 4학년 선배들과 실습을 하며 조각을 배웠다.

여주·부산·양평 등 국내를 비롯해 이탈리아에서도 작업장을 열고 작품을 제작했다. 이영섭이 이탈리아 작업장에서 작품을 가다듬고 있다.

‘발굴기법’ 위해 테라코타 가마 부숴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는 삼척여자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은 안정되고 좋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느꼈다. 결국 3주 만에 사직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당시 그는 출가자와 예술인의 삶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출가하기 전에 산속에서 한 번 살아보자.’고 생각하며 배낭에 약간의 쌀과 옷가지, 스케치북과 크레용만 넣고 길을 떠났다. 목적지 없이 이곳 저곳을 유랑하다 양구 지역 인근의 화전민촌에 도착했다. 마을 가장 안쪽 계곡 끝에 위치한 작은 집에는 노부부가 소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이곳에 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부부는 흔쾌히 방 한 칸을 내줬다. 그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즐거움에 빠졌다.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차에 입영통지서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3개월여 만에 화전민촌에서 내려왔다. 3년간의 복무를 마친 그는 제대 후 경기도 이천으로 향했다. 연고지도 아닌 지역으로 향한 이유에 대해 묻자 “여주로 가면 이모부의 도자기 공장으로 잡혀갈 것 같았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이모부의 도자기 공장 대신 이천의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예와 가마 제작기술을 배웠다. 직원으로 일을 하기보다 이곳에서 배운 기술을 조각에 응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자기에 사용하는 ‘유약’이 걸림돌이 됐다. 고민하다 옹기장을 찾아가 장독용 가마 제작법을 배웠다. 이후 작업장을 차린 뒤 두 기술을 혼합해 거대한 ‘테라코타(Terra-cotta)’ 가마를 제작했다.

1986년, 그의 작품이 처음 세상에 선보이자 작업장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한국의 테라코타 기술로는 크기가 작은 조각상 밖에 제작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2m가 넘는 테라코타 조각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작품 제작을 주문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발굴조각 기법을 창안하기 전, 가마로 구워낸 테라코타 조각상. 발굴조각 기법으로 땅에서 출토한 불상과 어린왕자 조각상이 전등사 경내에 설치돼 있다. 

소위 ‘잘나가는 테라코타 조각가’로 활동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나는 조각을 왜 하는가? 조각은 내 삶의 전부인가?’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리저리 답을 고민하던 중, 문득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고달사의 전설이 떠올랐다.

생각을 환기하고자 찾아간 여주 고달사지의 전경은 단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곳에 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인근에 작업장을 마련했다. 마침 고달사지에서는 유물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이영섭은 틈틈이 고달사지를 찾아가 발굴 작업을 지켜봤다. 그러던 중 땅속에 묻혀있던 유물이 출토되는 광경을 보게 됐다. 그 순간 그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다가 다시 흐르는 듯했다. 이전의 제작방식을 뒤바꿀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유물의 발굴을 보면서 느낀 ‘시간성’을 작품에 부여하고자, 작품 제작과정에 ‘유물 발굴’을 차용(借用)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굴착기 기사를 불러 테라코타 가마를 부수는 일이었다. 〈벽암록〉의 ‘남전참묘(南泉斬貓)’ 일화처럼 근본 원인을 없애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유물 발굴을 작품 제작에 차용하는 과정은 지난(至難)했다.

모두가 찬사를 보냈던,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테라코타’ 기술을 버리는 일은 팔을 떼어내는 것만큼 힘들었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수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웠다. 그럼에도 온전히 비워내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신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다.

결국 작업을 잠시 미뤄두고 길을 떠났다. 전국을 돌며 고전 건축물과 조각물을 관찰했다. 독일·그리스·이집트 등 해외의 건축물과 조각물도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서양 미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르카이크(Archaic)’ 조각을 보게 됐다.

“아르카이크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 시기[B.C. 650~480]의 조각상을 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됐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그 모습을 보며 결국 ‘원류라 할 수 있는 뿌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곧장 뻗어 나온 줄기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 방법이 ‘발굴조각’ 기법이었죠. 이를 통해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1998년부터 ‘발굴조각가’로 활동해온 그는 “멈추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의 길을 닦아, 가장 한국다운 미를 찾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 제작은 ‘한국의 美’ 찾는 여정”

귀국 후 본격적으로 작품 제작에 나섰다. 종이에 원하는 형상을 스케치하고, 다시 먹을 사용해 한지에 옮겨 그렸다. 형상이 머릿속에 각인되면, 곡괭이로 잘 다져둔 땅을 파고 모양을 잡았다. 그 안에 돌·유리·백자분청사기 파편 등 여러 혼합물을 섞은 반죽을 쏟아 넣고 흙으로 덮었다. 수일이 지난 뒤 땅속에서 작품을 ‘발굴’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국 세상 그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발굴기법’을 창안할 수 있었다.

1998년 11월 서울 토아트스페이스에서 ‘출토(흔적)’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는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작품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풍화(風化)의 흔적과 최소한으로 새겨진 선각(線刻) 등을 보며 “질박함·고졸미(古拙美)·졸박미(拙朴美)가 돋보인다.”고 평했다.

최태만 미술평론가는 “질박하지만 견고하고, 원시적이면서도 풍요로운 형태는 영원불멸한 부동성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정지가 아니라 운동을 예비하는 형태이며, 죽어버린 시간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 ‘언젠가 되찾아야 할 시간성’을 암시한다.”고 호평했다.

그는 전시 기간 중에 국내 대형 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단체전과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2013년에는 ‘소아암환우돕기 자선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사찰을 답사하며 건축물이나 석조물을 관찰하고 공부했다. 그는 불교 신자였지만, 생업이 바빠 별다른 신행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사찰 답사는 그가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방법인 동시에 나름의 신행활동이었다.

2018년, 당시 통도사 도감 도문 스님으로부터 ‘통도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전시’ 제의를 받았다. 불상으로 경내를 채우자는 제안이었다. 천년고찰이라 불리는 통도사에서 전시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불상’ 전시라는 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늘날 불교미술은 분명 발전하고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전통에 머물러 있다고 느꼈습니다. 현대 작가가 과거의 석공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구현한 작품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그 깊이는 얕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소설 〈어린왕자〉를 소재로 한 전시를 여는 게 어떻겠느냐?’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동심의 세계를 사찰 안에 펼쳐보겠다는 심산이었죠. 통도사에서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전시도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최근 제주도에 마련한 작업장의 전경. 손때 묻은 작업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사진=문지연 기자)
최근 제주도에 마련한 작업장의 전경. 손때 묻은 작업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사진=문지연 기자)

이영섭은 ‘보편성의 전복’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다. 사찰에서 만난 ‘어린왕자’처럼 익숙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낯설어하면서도 재미와 흥미를 느낀다는 설명이다.

극락사 앞마당을 장식했던 ‘의자’ 조각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는 의자를 단순히 사람이 앉는 도구로 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류의 문명과 권위, 상징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소재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일상적인 시선을 뒤집을 때 창조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작품 활동의 길을 꾸준히 닦아나갈 때, 고답적이거나 고착화되지 않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꾸준히 작업장을 옮겨 다녔고, 국내·외를 유랑했다. 이영섭은 올해 6월 환갑을 맞아 서울 양재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아울러 프랑스에서 작품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제주도에 새롭게 조성한 작업장에서 출품할 작품을 발굴 중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인근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을 둘러봤다. 작업장 한쪽에 그가 ‘땅에서 건져낸’ 작품 몇 점이 놓여있었다. 투박하고 단순해 보이다가도 세련되어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작업장을 둘러보는 내내 시선을 끌었다. 화려한 기술로 꾸미지 않은 수수한 조각상이 주는 푸근함은 따스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이영섭 조각가. 자유로운 창조를 향한 여정을 떠나는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많은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양평 석산리는 여주 고달사지에 이어 아버지가 남긴 두 번째 메시지를 찾은 곳이다. 이영섭은 꾸준한 작품활동과 함께 아버지가 남긴 ‘정신의 유산’을 찾고 있다. 
양평 석산리는 여주 고달사지에 이어 아버지가 남긴 두 번째 메시지를 찾은 곳이다. 이영섭은 꾸준한 작품활동과 함께 아버지가 남긴 ‘정신의 유산’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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