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

“머할라꼬 결혼할라카노.
니 언니들 다 좋아 보이드나?”

나는 사흘 동안 밥을 많이 먹었다. 밤참도 먹었다. 힘을 길러야 했다. 이 한마디는 작은 기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먹고 또 먹고 그리고 토하고 다시 먹었던 시간을 지나 나는 어머니께 말을 꺼냈다.

“엄마, 나 결혼할끼다.”

사실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이야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완벽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다. 어머니는 단 하나 가느다란 삶의 줄을 겨우 잡아 끌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나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사회적인 일을 하며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딸이 머뭇거리며 꺼낸 이야기가 결혼이었다.

엄마의 입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어머니는 내가 농담으로도 결혼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를 돌렸다. 그 어느 때이건 간에 어머니는 자랑거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아들과 딸들의 우뚝 선 모습을. 그러나 어머니는 “친구들 만나도 나는 입이 없는기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얼마나 뼈아픈 이야기인가. 그렇게 하고 싶은 자랑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으니. 탈탈 털어도 자랑하나가 떠오르지 않았으니. 어머니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입을 달라고, “나에게도 입을 좀 다오!”라고 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외치고 있었는지 몰랐다.

온 얼굴에 화기를 띄우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며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며 자신의 복된 인생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큰 입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당당한 입을 가지고 싶었을 것이다. 흥분해 떠들며 침이 마르지 않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싶은 그 입은, 어쩌면 나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학상을 타고 서울서 대학을 졸업한 딸. 대학 때 떡하니 혼자 시화전을 열고 숙명여대 강당 문학의 밤 무대에서 시를 낭송하고 대학 4학년 때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유명하다는 시인·소설가를 알고 있는 듯하고. 그나마 그것이 어머니에겐 너무 크게 보여서 그 주인공을 자신의 ‘입’으로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생각하기에 딸 하나쯤 결혼을 안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상하게도 내가 결혼이야기만 꺼내면 어머니는 고개를 돌리거나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머할라꼬 결혼할라카노. 니 언니들 다 좋아 보이드나?”

또 이런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결혼하지 않아도 좋은 딸이 왜 하필 나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엄마는 단지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살아도 좋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젤 먼저 베고 있던 베개로 내 머리를 때리고, 머리 맡에 있던 물컵을 내게 던졌다. 물컵은 내 머리에 맞고 깨어졌으며 내 옆에는 사기그릇 하나가 박살이 나서 뒹굴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깨어진 사기 파편이 얼굴을 지나가며 볼에 피가 흘렀다.

갑자기 난장판이 되었다. 어머니는 미친 듯 악을 쓰며 당장 여기서 함께 죽자고 말했다. 그래 그랬으면, 나는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랑 아닌 운명이야기

내 인생에서 가장 불명확한 것은 결혼이다. 그것은 이상하게 나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오해와 곡해가 난무하고, 소설이 몇 개나 나오고, 그 소설이 다시 부풀려 전해진 이야기는 다음 날 다시 완벽한 다른 이야기로 태어나곤 했다. 나는 풍선 속 주인공이 되었고, 그 이야기들은 누가 주도한 사건도 없이 뻥뻥 터지곤 했다. 나는 그렇게 풍문에 묻혀 살았다.

내 결혼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운명이야기라고 하면 조금은 믿을 것 같다. 운명을 믿는가? 사람에게는 운명이 존재할까? 나는 자꾸만 ‘운명’이라는 두 글자에 기댔다. 운명이라는 것이 인생을 지배하는 것일까? 나는 내 인생임에도 나를 빼고 나의 자리에 ‘운명’이라는 글자를 앉혀 놓았다.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간지(干支)로 환산해서 운명을 예측하는 방법인 사주팔자. 한국에서는 ‘운명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라는 뜻에서 이를 통상 ‘명리학(命理學)’이라 부르지 않는가. 어릴 때 기억으로는 ‘점(占)’이라 부르기도 했다. “점친다.”라고 했고 “점 본다.”라고 했고 “점꽤”라 부르기도 했다.

어머니가 잘 맞추는 점쟁이가 있다는 말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제아무리 잘 맞추는 점쟁이도 어머니 인생을 가고 싶은 대로 데려다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다가올 생이 궁금해서, 삶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점집을 찾는지 모른다. 점이란 인생을 흐릿하게, 아니 어렴풋이 예측하는 것이지 변화를 만드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면 자기가 만들어 놓은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살짝 비켜서 운명이라며, 애매모호하게 자신을 덧씌워 놓으려는 수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그랬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인과응보(因果應報)’·‘사필귀정(事必歸正)’·‘자승자박(自繩自縛)’ 내가 아는 문자들을 되뇌이며 말이다.

어머니는 물 한 모금 드시지 않고 누워 있었다.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겨우 나에게 모든 인생 소망을 품고 실오라기 잡은 듯 숨 쉬던 어머니. 어머니의 그 소망은 한갓 낙엽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이었다.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물도 밥도 안 먹고 누워 있으면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딸이 엎드려 울 수도 있다. “엄마 엄마. 나 안가. 나 결혼 안해.”하면서. “엄마 엄마. 일어나 밥 먹어. 나 엄마 옆에 있을 거야. 어서 일어나 엄마.” 그렇게 되는 것을 한 번쯤 상상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지. 이런 나를 두고 네가 떠나겠니?’, ‘딸아, 제발 가지 마라.’하면서 어머니는 눈을 감고 죽은 척했을 것이다. 그러다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저게 정말 가 버리면 어쩌나?’.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눕던 어머니는 머릿속으로 별별 세상을 그리며 바닥을 치며, 안으로 몸속 눈물을 다 흘려 버렸는지 모른다.

‘어쩌나, 저 인간이 불쌍해 어쩌나. 아니다. 저 인간을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까?’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1초에도 천 번은 여러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인생은 너무 야박했다. 운명의 길을 잡아가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 어머니에게 너무 야박했다. 그렇게 모든 생을 포기하려던 어머니의 곁을 나는 떠났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

바람이 많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내 안에 날지 못하는 것들이 바람과 함께 날았으면 하며 바람 많은 곳에 서 있었다. 아픔도 고통도 내 힘으로는 피할 수가 없어 바람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내 안에 갈증이 심해 목이 탁탁 막히는 것들이 흠씬 갈증을 없앨 수 있게 비를 맞을 때가 있다. 오래오래 서 있었다. 그러고 감기가 들어 며칠씩 누워있기도 했다. 햇살이 맑은 날, 은빛이나 금빛으로 반짝이는 날에는 내 안의 축축하고 눅눅한 것들을 말리고 싶어 집 앞 학교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햇살의 따뜻함을 몸 안으로 구겨 넣었다. 마치 생의 난로라도 되듯이.

날 수 있다고? 그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말해 보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 그 희망 때문에 작은 변화라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의 생각을 믿어라.’ 그렇게 말하면서.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볍고 따뜻해졌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바람·비·햇살로 배를 채웠다. 마음을 채웠다. 머리를 채웠다.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시퍼런 나이에도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냥 사는 것이며 그런 삶에서 아침이 오고 밤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불행은 어떤 것인가? 불행도 무엇인지 몰랐다.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 없이 살아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울어도 아버지가 화를 내도 어머니가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불행이라고 단정 지어본 일은 없다. ‘삶이 그러하거니.’ 그렇게 생각했었을까? 결코 행복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불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었다.

언니들의 결혼이 좋아 보이지 않아도 그것조차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길을 가다가 왜 문득 ‘불행’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탁’ 쳤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왜 내가 이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운명을, 운명의 사나운 갈퀴를 생각하며 걸었을 뿐이다.

널 한 마리 장닭이라고 생각하면서
목을 확 비틀어 버리기를
수천 마리

꽈아악 손목을 쥐면
검붉은 진달래즙이
뚝뚝 떨어질 듯

그 진한 피
손목까지 데불고
사라지기도 할 것이니

살의는 순간 생각속에서
무성한 잎들로 푸르게 출렁거리고
입술 한 번 꾹 다물면
혀 위에 가을이 와
붉은 단풍으로
번뜩이는 살의의 죄 져버리곤 했는데

이 악다물면 입안에서도
가득 잇몸의 검붉은 진액이
끈적 끈적
입 안 가득 감돌 것 같은
제 입술 스스로 물어뜯어
입술 다 사라지고 없는

두어 달 몸져 누운 뒤
손톱 사이
푸릇푸릇한 새싹이 돋아 나오기는 할까?

결혼식 전날밤

신(神)은 왜 밤과 낮을 만들었을까? 왜 산과 바다를 만들었을까? 기어가는 굼벵이와 하늘을 나는 새를 만들었을까? 왜 봄과 겨울을 만들고 눈과 비를 만들고 돌과 물을 만들었을까? 또 길을 만들고 굴을 만들고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만나며 살게 했을까?

이해와 사랑과 공감과 위로를 알게 하는 방법일까? 거부와 미움과 질시와 투쟁을 알게 하고 싶었던 걸까? 그 안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는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그래도 가야하는 것이 생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시간은 간다. 씨앗을 심는 속도로 그렇게 가면 될 것이다. 내 나름의 가능성을 믿고 가보려 하는 것이다. 내 발에 맞는 신발도 남이 신으면 발이 아플 수 있다. 누구에게나 신이 하락하는 길이 있으리라는 우격다짐까지 해가며 나는 눈을 감곤 했었다.

밤과 낮, 봄과 겨울, 눈과 비는 그것을 이해시키는 비유법이란 말일까? 누구나 탄탄대로를 걷고 싶을 텐데 왜 그것은 제대로 안 되는 것일까? 섣부른 철학이나 말도 안 되는 인생사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을 위해 흘리는 땀이야말로 우주를 들어 올리는 힘으로 결국은 나를 들어 올리는 힘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마음이 부풀었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받아 들인다’라는 말을 천만 번 하면서 나는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다.

“책장을 일찍 덮지 말라. 삶의 다음 페이지에 더 멋진 나를 발견할테니.”라고 노트에 열 번 백 번 써 왔던 그 멋진 나를 언제 찾을지 모른다.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내 인생사에서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멋진 나’를 기어이 살려내야 한다. 내 어머니를 위해서.

결혼식이 가까이 다가왔다. 결혼식 전날 밤, 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오셨다. 침묵이 길었다. 무릎을 꿇은 두 발이 저린 것은 오래되었다. 침묵이 이렇게 힘든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이게 고문이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비가 너한테 해 줄 말은 이 질문밖에 없다. 세상 말이 ‘남의 자식은 한 다리가 천리’라고 말하지 않느냐? 너는 몇 천리가 되는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지 그걸 묻고 싶구나.”

“……”
“……”
“……”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오래 울었다. 나는 울음에 묻혀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버지……. 죄송해요.”

울다가 목 메인 소리로 천천히 한마디를 뱉었다. 피 같은 한마디였다.

“니 그 한마디로 니 인생이 그런대로 잘 가면 좋겠다.”

아버지는 일어서다가 한 번 비틀거렸다. 아버지 인생도 그렇게 허리가 꺾이는 듯했을 것이다. 편지 잘 쓴다고 용돈을 달마다 올려주셨던 아버지는 내 인생이 화려하게 펼쳐져 나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내 생의 길이 환할 것이라고 믿으셨을 것이다.

다음날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남산의 어느 예식장에 서 있었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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