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의사 집안의 2대 독자로 태어난 필자는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마마보이’로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데는 뜻이 없어 늘 비리비리한 모습이어서 어머니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서강대 1학년 여름방학 무렵인 1974년 6월 말 문득 자신을 돌아보고 ‘한심한 놈’임을 어렴풋이 인지하게 됩니다.

그 후 1년간 몸부림을 치다가 독서를 통해 석가세존의 ‘독화살의 비유’를 접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어 1975년 9월 초 서강대 혜명회(慧命會)에 입회해 불교경전 공부를 시작했으며, 10월 18일에는 선도회(禪道會) 종달(宗達) 이희익(1905~1990) 선사 문하에 입문해 참선 수행을 병행하였습니다.

발우공양을 익히다

입회 5개월 무렵입니다. 혜명회 회원들과 함께 1975년 12월 21일부터 4박 5일 동안 고창 선운사에서 개최된 생애 첫 수련회에 참석해 기초교리와 생활선(生活禪)에 대한 강의를 듣고 좌선 수행을 했으며, 공양(식사) 때 스스로 먹을 만큼만 발우(鉢盂)에 덜어 먹는 법을 어깨너머로 대강 익혔습니다.

한편 이 수련회를 통해 들기름을 주로 사용해 구운 김, 고사리·버섯·콩나물·시래기 및 제철 식재료 등을 이용한 나물무침이나 국 또는 찌개, 절에서 직접 만든 위생적인 두부 등으로 조리한 ‘몸을 편안하게 하는 절 음식’을 두루 접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 음식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께서 주로 참기름을 사용해 같은 식재료들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주셔서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집에서 먹던 채식과는 차원이 다른 특유의 고소한 풍미(風味)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22일이 동짓날이라 낮에 새알심을 빚었고, 저녁 공양 때 그동안 세속에서 잊고 지냈던 새알심 넣은 팥죽도 새롭게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마곡사 수련회 이전까지 개인적으로 또는 수련회를 통해 몇 군데 더 사찰에 머물면서 자연스레 절 음식을 양껏 즐겨 먹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때마다 ‘공양을 마치고 발우[食器]를 싹싹 비운 다음 마실 물로 발우에 고춧가루 한 개도 남기지 않도록 헹궈 마신 후, 발우를 세척한 청수를 아귀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청수에 음식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바늘구멍만 한 아귀의 목구멍을 막아 아귀가 굶주리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런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었으나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으며, 또한 음식에 대한 감사한 마음 역시 티끌만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소심경’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77년 6월 말, 4박 5일간 혜명회 회원 30여 명과 함께 마곡사로 수련회를 갔습니다. 당시 주지셨던 도문(道文, 1935~) 스님께서 매일 한 차례씩 울림이 있는 멋진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또한 공양 때마다 우리를 포함한 전체 대중이 둘러앉아 함께 공양했는데, 이때 정갈한 절 음식뿐만 아니라 도문 스님의 철저한 지도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발우공양의 정신’을 온몸으로 익힐 수 있었습니다.

수련회 첫날 첫 공양 때 스님께서는 먼저 ‘소심경(小心經)’이란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면서 간략하게 요지를 설명하신 다음 선창(先唱)하면 따라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용이 전부 한문이라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시키시는 대로 20여 분 동안 합송(合誦)을 한 다음, 공양을 했는데 대강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선반 위의 발우를 집어들면서 ①하발게(下鉢偈) ②회발게(回鉢偈) ③전발게(展鉢偈) ④십념(十念) ⑤진언(眞言) ⑥봉반게(奉飯偈) ⑦오관게(五觀偈) ⑧생반게(生飯偈) ⑨정식게(淨食偈) ⑩삼시게(三匙偈) ⑪절수게(絶水偈) ⑫해탈주(解脫呪) ⑬수발게(收鉢偈) 순으로 염송하며 발우를 선반 위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참고로 보기를 들면 ‘회발게’에는 석가세존의 일생 가운데 네 번의 극적인 사건들이 다음과 같이 담겨있습니다.

“석가세존은 가비라성에서 태어나셨고, 마가다국에서 도(道)를 이루셨으며, 바라나성에서 법(法)을 설하기 시작하셨고, 구시나가라에서 입적(入寂)하셨습니다.” 결국 이 게송에는 이들 사건을 뼈대로 삼아 세존의 모든 구도 여정을 세밀히 살피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사료됩니다. 덧붙여 필자가 불교에 입문할 때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확신을 준 것도 바로 세존의 일대기를 접하고 난 후였습니다.

오관게의 오묘한 쓰임

이처럼 공양을 하는 과정만으로도 저절로 수행이 무르익어가도록 구성된 ‘소심경’ 가운데, 특히 ‘오관게(五觀偈)’는 그 핵심이라 사료되어 필자는 결혼하기 전까지 5년 동안 독거하며 홀로 식사할 때마다 ‘오관게’를 염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습관화되어 결혼 후 지금까지도 염송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종달 선사 입적 후 지도법사직을 승계한 뒤에는 수련회나 추모식 등을 주관할 때마다 식사 때 오관게를 합송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구체적으로 “1. 이 음식은 어디에서 왔는고? 2. 내 닦은 바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3.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집착을 떨치고 4. 이 몸을 지탱하는 좋은 약으로 알아 5. 모두 함께 참나를 찾기 위해 이 음식을 받노라.”란 ‘오관게’의 오묘한 쓰임[妙用]에 대해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피상적인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을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바삐 쫓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네 가지 고마움[四恩]’, 즉 부모·이웃[환경]·공동체·스승의 고마움을 일상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새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적어도 하루에 세 번 있습니다. 바로 식사를 할 때입니다. 특히 혼자 식사할 때 밥을 먹기 전에 먼저 ‘오관게’를 마음속으로 천천히 새겨 보십시오.

그러노라면 누구나 첫째, 이 음식이 내 식탁에 놓일 때까지 농부의 땀을 포함해 태양·비·흙 등 온 우주가 다 기여했음을 인지하고, 저절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둘째, 우리 모두 인간인 이상 온몸을 던져 100% 맡은 바 책무를 다하지 못함을 알기에, 늘 반성하며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셋째, 사실 책무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온갖 집착,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때문임을 인지하게 되면 저절로 이를 내려 놓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넷째, 약을 과다 복용하는 사람은 없듯이 자신에게 알맞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면 건강에도 좋고, 매년 조 단위의 음식 낭비도 줄여 환경 청정을 포함해 두루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다섯째, 그런데 이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국 ‘참나’를 온몸으로 체득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아침(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일과를 계획하며(돌아보며 반성하고) 하루를 시작(마무리)하는 습관을 가지면 좋습니다.

돌이켜 보면 필자의 경우 식사 때마다 오관게를 염송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두루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머리만이 아닌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날마다 참선 수행을 통한 내적 성찰 능력 향상과의 상승효과 때문이라 사료됩니다.

수련회 회향 때의 충격

앞서 마곡사 수련회 때 도문 스님은 제자의 잘못을 보는 즉시 대학생들 앞임에도 불구하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사정없이 때리는 등 서릿발같이 엄격하셨습니다. 반대로 당시 모시던 은사이신 동헌(東軒, 1896~1983) 선사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해 효상좌임을 생생하게 체감했습니다.

당시 한 제자가 아직도 ‘일의일발(一衣一鉢)’을 실천하고 계시기 때문에 승복을 빨면 마를 때까지 방에서 속옷 차림에 이불을 두르시고 참선 수행을 하시는 등 계율을 철저히 지키시는 독한 스승이라고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최근 동영상을 보니 어느 여름날 기자가 인터뷰 도중 조실 방에 잠자리채를 둔 이유를 여쭙자, 파리가 방안에 들어오면 불살생(不殺生) 계율을 어길 수 없어 잠자리채로 잡은 후 바깥으로 놓아주신다고 대답하시더군요.

한편 수련회 마지막 날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회향 법문 도중에 갑자기 “대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느냐! 수련회 밥값은 안 받겠으나 그 대신 20년 후 내가 손을 내밀 때는 곱절로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모두에게 ‘삼귀의계’·‘오계’에 이어 ‘법명’을 주시면서 “본인은 아니더라도 자식은 꼭 출가시켜야 한다!”고 호통을 쳐 모두 얼떨결에 “예!”라고 대답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고로 스님께서는 필자 생애 최초로 ‘중원(重元)’이라는 법명(法名)을 지어 주셨는데, 아마 필자가 마마보이임을 꿰뚫어 보시고 ‘늘 신중(愼重)한 몸가짐에 으뜸인 이가 되어라!’는 화두를 주셨다고 사료됩니다. 사실 이 법명은 필자가 선도회 입문과정을 마치고 1980년 3월 종달 선사님으로부터 ‘법경(法境)’이라는 거사호(居士號)를 받기 전까지 필자의 서명으로 사용해 오다가, 지금은 쓰고 있지 않으나 요즘도 가끔 이 법명의 뜻을 되새겨 보곤 합니다.

수련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수련회 이후 1995년 추석 명절 때 우면산을 오르던 도중 ‘대성사’에 들러 법당에서 삼배를 올리고 나오다 도문 선사를 뵙고 잠시 다과 대접을 받으며 환담한 이후 직접 뵐 기회는 다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론이나 유튜브 동영상 등을 통해 선사의 근황을 지속적으로 접해 오고 있는데, 역시 기대한 대로 소속 종단의 그 어떤 불협화음에도 초연하게 용성(龍城, 1864~1940) 선사의 대각(大覺) 가풍을 널리 드높이며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던져 한 사람이라도 더 깨우쳐주시려 애쓰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뵐 때마다 늘 마곡사 수련회의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아직도 수련회가 계속되고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 밥값과 이름값을 해라!’라는 일갈(一喝)로 필자에게 다가오네요.

필자의 견해로는 석가세존의 가르침이 몽땅 녹아 있는 ‘소심경’ 가운데에서도 핵심은 ‘오관게’이고, 이 구절 가운데에서도 특히 다섯 번째인 ‘참나 찾기’가 백미라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치열한 수행을 통해 참나를 온몸으로 체득한 이들은 석가세존과 역대 스승들께서 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깊은 통찰(洞察)과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보시물이 함께 텅빈)멋진 나눔[報施]이 둘이 아닌 향상(向上) 여정을 이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식사 때마다 오관게를 온몸으로 염송하면서 반드시 이번 생에 어느 날 문득 ‘참나’를 명료하게 체득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해 봅니다.

참고로 필자의 경우 날마다 세 끼 식사 때 외에도 잠들기 직전, 1978년 여름 송광사 수련회에서 구산(九山, 1909~1983) 선사로부터 직접 들어 새긴 다음과 같이 게송을 염송하며 한 번 더 ‘참 나 찾기’ 성찰을 합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마는,
이 몸은 언젠가는 한 줌 재가 아니리.
묻노니 주인공아! 어느 것이 참나이련고?

아울러 이 지면을 빌어 도문 선사와 마곡사 수련회 때 함께 했던 법성 스님 및 대중 스님들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서강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1983년 3월 강원대 교수를 거쳐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며 14명의 박사학위 제자를 배출했다. 1975년 선도회 종달 선사 문하에 입문했고, 1990년 선사 입적 직후 지도법사 직을 승계했으며 지금까지 15명의 법사를 배출했다. 1991년과 1997년 숭산 선사에게 두 차례 입실점검을 받았다. 저서와 편저로 〈두문을 동시에 투과한다〉·〈날마다 온몸으로 성찰하기〉·〈무문관-온몸으로 투과하기〉·〈온몸으로 읽는 지구촌 효이야기〉·〈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