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호, 입춘과 목우(木牛)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입춘 지나고서 날이 훨씬 푸근해졌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낮에는 볕이 곱게 부서진다. 볕 아래 있으면 옷을 하나 더 껴입은 듯하다. 볕은 금잔디처럼 대지에 쏟아진다. 입춘을 맞아 절에서 입춘방을 얻어 와서는 그걸 집에 풀칠해 붙였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쓰여 있다. 선행을 하면 선과(善果)를 얻게 될 것이다. 함께 받은 한 장에는 바랑을 멘 동자 그림이 있고 그 아래에 짧은 문장이 씌어 있었는데, “이 세상에 내 것 어디 있나. 사용하다 모두 버리고 갈 것을…….”이라고 적혀 있었다. 욕심을 덜 부리고 나눠주면 선과를 얻게 될 것이다.

얼마 전 제주 관덕정을 지나가는데 입춘굿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관덕정은 과거 제주 읍성의 중심이다. 나무 땔감을 지고 와서 해산물로 바꿔가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관덕정 마당에서 목우(木牛) 한 마리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얽고 매어서 만든 나무소였다. 어느새 큰 소가 밭을 갈고 오곡의 씨를 뿌릴 때여서 목우를 모셔둔 것이었다. 풍년을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허멩이답도리’라는 행사도 열리고 있었다. ‘허멩이’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존재라고 했다. 좋지 않은 기억이나 병, 버리고 싶은 것을 허멩이가 다 지고 간다고 했다. 마당에 서서 모쪼록 모든 생명에게 행복이 있고, 경사가 많기를 축원했다.

난전(亂廛)

가끔 제주 동문시장에 간다. 제주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과 산간의 과수원에서 딴 과일들이 주로 거래된다. 동문시장의 명물은 단연 갈치이다. 갈치가 길게 펼쳐져 있어 마치 은빛이 꽉 찬 느낌이다. 이외에도 옥돔·고등어·낙지·홍해삼·개불·보말·뿔소라 등이 싱싱한 채로 팔린다. 이번에 갔더니 방어도 제철을 맞았다. 특이한 것은 방어 머리만을 파는 가게도 있었는데, 한 채반에 오천 원에 팔고 있었다. 보기 드물다는 생선인, 말린 장대도 선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참몸이었다. 몸은 모자반을 뜻하니 참몸은 곧 참모자반이다. 몸을 파는 가게 주인은 추자도산이라고 일러줬다. 참모자반은 미역·톳·우뭇가사리와 함께 해녀들이 주로 채취한다. 제주 시내 식당에서는 돼지고기를 삶은 물에 참모자반을 넣고 끓여 몸국을 내놓는다. 참몸을 보니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동문시장에는 난전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난전은 길가에 벌여 놓은 가게를 일컫는다. 대개는 허가 없이 좌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한다. 그러나 허가가 없더라도 뭐라 트집 잡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제주 동문시장에도 이 좌판 장사를 하는 분들이 꽤 많다.

그런데 오늘 나는 한 좌판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내가 사는 시골 마을의 내 옆집 할머니였다. 할머니께서는 냉이를 캐 와서 팔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보는 순간 어제저녁에 옆집 할머니가 갖다 줬다며 봄 냉이 한 소쿠리를 들고 들어오던 아내 생각이 났다. 시장에 내다 팔 냉이를 캐서 그 일부를 우리 집에 주신 것이었다. 가슴에 뭔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의 냉이를 사서 시장을 빠져나왔다. 냉이를 살 때도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가시 생각

집터에 딸린 수림(樹林)에는 꾸지뽕나무와 팽나무·동백나무 등이 자란다. 꾸지뽕나무와 팽나무는 나이가 많다. 품도 넓고, 키도 크다. 꾸지뽕나무 열매는 늦가을에 익어서 새와 벌레와 내가 함께 나눠 먹는다. 팽나무는 그늘이 좋고, 시원하다. 그런데 이 수림에 덤불도 함께 자라나서 서로 엉켜있고, 어떤 덩굴은 꾸지뽕나무와 팽나무를 감고 타고 올라간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에 뻗은 덤불과 덩굴을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덤불과 덩굴 곳곳에 가시가 바늘처럼 뾰족하게 돋쳐 있었다.

일을 끝냈을 때 내 손등은 여러 군데 긁혔고, 손가락에는 가시가 여럿 박혀 있었다. 어두운 전등 아래 어두운 눈으로 가시를 빼내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바늘을 가져와서 바늘 끝으로 내 살을 찌르고 들추며 박힌 가시를 빼내려고 했는데 역시 아내도 어두운 눈이어서 쉽지가 않았다. 밤새 덜 뺀 가시 생각뿐이었다.

아침이 밝아 두 눈이 좀 더 환해졌을 때 가시 박힌 손가락을 보니 가시가 박힌 자리가 부어 있었다. 손톱으로 눌러서 짰더니 까만 가시 조각이 살가죽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그게 뭐라고 아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 보았던 덤불과 덩굴도 머릿속에서 일순에 싹 사라졌다.

미미한 것이지만 어떤 미미한 것은 바위보다 더 무겁게 또 독사보다 사납게 우리의 마음을 누르고 할퀸다. 이 작은 가시에 비유할 만한 것이 내게 참 많을 것이다. 그런데 허물을 두고서 이 가시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과 재생

제주에서는 정월에 오름이나 목장·들판의 초지에 불을 놓는다. 새별 오름의 들불 축제는 들불 놓기의 대표적인 행사이다. 이러한 들불 놓기는 대지에 새로운 풀이 돋아나게 돕는다. 문무병 선생은 ‘오름에서 피어오르는 불은 새 풀을 재생하기 위해 활활 억새를 태우는 화입(火入), 재생의 불’이라고 책에 쓴 적이 있다.

내 집에도 조그마한 땅이 있어서 지난 일요일에 밭둑을 깎고 마른 억새와 풀을 끌어모아 밭에 불을 놓았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바람이 없는 날을 골라 논과 밭 그리고 논둑과 밭둑에 불을 놓으셨던 일이 생각났다. 기다란 작대기로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고, 또 거두어 넣으시면서 들불을 놓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처럼 큰 면적에 불을 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법 불길이 활활 일었고, 연기가 솟아올랐고, 불의 열기가 뜨거웠다. 바싹 마른 풀이어서 타들어 가는 소리도 제법 일었다.

들불 놓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내 몸 구석구석에서 불 냄새가 났다. 내 마음의 초지에도 불을 놓은 듯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초지에도 머잖아 새 풀이 돋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마음도 생활도 신생의 그것이 될 것 같았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수평선

제주에서는 어디에 살든 금방 해안에 이를 수 있다. 어느 날의 격렬한 바다는 한 척의 어선도 제 품에 띄우지 않지만, 또 어느 날의 한없이 잠잠한 바다는 제 품에 수많은 어선을 띄운다. 조용한 바다는 말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 같다. 내면을 잘 다스리는 사람 같다. 말이 거칠지 않고 눈빛이 선한 사람 같다. 그리고 잠잠한 바다의 그 끝에는 수평선이 눕는다.

나도 ‘수평선’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있다. 파도가 밀려오고 해조음이 있는 해안 한쪽에 한 사람이 있고, 바다의 저쪽 끝에 또 한 사람이 있어서 이 둘 사이에 바다의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고 상상하며 쓴 시였다. 나는 그 긴 테이블에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이 놓여 있다고 썼다. 바다의 이 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들의 목록은 내가 상상한 것이지만, 대체로 바다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활동과 그 활동을 감각적인 비유를 들어 드러낸 것이었다.

얼마 전 한 화가에 대한 일화 한 편을 들었다. 괴짜로 알려진 한 사람이 화가를 찾아왔다고 한다. 수평선이 그려져 있는 화가의 그림을 보고 이 사람이 물었다. “저 수평선은 마음 안에 있습니까? 마음 밖에 있습니까?” 그러자 화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릇이 큰 사람에게는 안쪽에 있을 것이요,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는 밖에 있겠지요.” 이 사람은 화가를 향해 절을 세 번 올렸다고 한다. 바다에 나갈 때마다 바라보게 되는 수평선이건만, 수평선은 때로는 막막하기만 하고, 때로는 푸른 해초처럼 신선한 생각이 자라나게 한다.

말의 그늘

말에는 어두운 부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부분은 오해를 낳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말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간혹 하게 된다. 아예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을 때가 있다. 괜히 그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 때가 있다. 말의 어두운 부분을, 말의 흙먼지를 얼굴에 뒤집어쓸 때가 있다. 그러고 집에 들어가면 내내 겨울밤처럼 적적하다.

차나무 뿌리

소설가 한승원 선생이 쓴 장편소설 〈초의(草衣)〉를 읽고 있다. 소설 가운데 초의선사가 운흥사 다감 스님의 말을 떠올리는 대목이 있다. 운흥사 다감 스님은 이렇게 이른다.

“차나무는 골짜기면 골짜기, 너덩걸이면 너덩걸, 음지면 음지, 등성이면 등성이 …… 그 어디든지 다 좋아한다. 이 나무뿌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지 아냐? 자기 키 세 배쯤이나 들어가 있어. 옆으로 뻗는 것이 아니고, 반듯하게 직립으로. 그래서 차나무는 옮겨 심으면 죽어버린다.”

차나무의 성정에 대해 들려준 이 말을 기억하며 초의선사는 이렇게 생각한다. “차나무의 잎사귀가 요란하지 않은 깊은 맛과 향기를 내는 것은 직립의 깊은 뿌리 때문이다. 사람도 뿌리가 이래야 한다.”

소설의 이 대목을 읽으며 아주 오래 전 선운사의 차밭에서 차꽃을 보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주 맑은 꽃이었다. 세상에 이처럼 깨끗한 꽃이 있을까 싶었다. 이제서야 알고 보니 탁함이 없던 그 차꽃은 꼿꼿하고 곧은 뿌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첫 보름달

올해 정월대보름의 달은 한 해 중 가장 작은 ‘미니 문’이라고 했고, 또 해가 지기 전에 달이 떠 하얗게 보이는 ‘화이트 문’이라고 했다. 나는 작은 언덕에 올라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흰 빛의 원광(圓光)이 하늘에 보였다. 나는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이 보름달처럼 모든 관계가 모난 데 없이 부드럽고 너그럽기를, 또 이 무량한 빛이 모든 생명들을 환하게 비추기를.’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 내 눈에 작은 소년이 보였다. 기도를 올리시는 어머니 옆에서 정월대보름 달빛을 받으며 마당에 서 있던 소년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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