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토록 불서(佛書)를 모았을까?

구인사 천태종역대조사전에 모셔진 대각국사 의천조사 존상.
구인사 천태종역대조사전에 모셔진 대각국사 의천조사 존상.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우아하고 점잖은 광기’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기 할아버지를 가리켜서 “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거의 책에 미치다시피 한, 가장 고귀한 질병이라 할 수 있는 애서광증(愛書狂症)에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쓴 말입니다.

〈젠틀 매드니스〉는 제목 그대로 책에 미친 사람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읽는 사람보다는 모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지요. 희귀본이나 유명인사가 오래 소장한 수택본(手澤本), 명망 있는 작가의 초판본을 발견하면 어디든 달려가서 값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들입니다. 책을 모으는 일은 그저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도서수집가인 메리 하이드 애클스는 열정적인 수집가가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넉넉한 재산과 교육 그리고 자유입니다.

고려의 의천 스님은 책을 열정적으로 모을 수 있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입니다. 책을 사랑하고 책을 모으고 책을 읽는 데에 평생을 바친 인물로서, 어쩌면 우리 땅에서 첫째가는 ‘젠틀 매드니스’라 해도 좋습니다. 왕자였던 까닭에 왕실 후원을 아낌없이 받을 수 있었고[재산],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책을 보는 눈[교육]이 있었지요. 게다가 스님이었으니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습니다[자유].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으니, 의천 스님이 그토록 열심히 모은 책이 불교 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의천 스님이 태어난 1055년은 우리나라에 웬만한 불교 사상이 다 들어온 시기입니다.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의 공인(公認)을 한국불교의 시작점으로 삼는데, 70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불교는 사람들의 정신에 온전히 안착해서 고려 땅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자분자분 밟는 대지 위에 이미 불교가 스며 있었습니다. 그러니 스님의 온몸 세포 하나하나가 불교 일색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경전이나 논(論)은 스님이 이미 섭렵했을 테고, 경론에 대한 석학들의 해설서까지도 두루 모아 탐독하면서 조금 더 깊이 있는 이론들을 만나고픈 열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 바람은 한걸음 나아가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불교 서적을 고려 땅에서 한 광주리에 다 담아 보리라는 꿈으로 커져갑니다.

스님의 이 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고려를 넘어 외국으로까지 그 행보를 넓혀가고 책을 찾고 책을 구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힘들여 모은 책을 외국에 보내주기도 합니다. ‘잰틀 매드니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교책 수집에 광적인 열의를 보인 스님이지만 혼자만 끌어 안고 있지 않고 그 책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같이 나누자는 그 마음이 스님의 편지글과 지인들과의 편지글에서 전해집니다.

그런데 스님은 대체 왜 책 수집에 자신의 삶을 걸었을까요? 왕실의 넘치는 후원을 받으며 으리으리한 사찰을 짓고 그 속에서 종교권력을 휘두르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불교책을 모두 모으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각국사문집〉과  〈신편제종교장총록〉.
〈대각국사문집〉과  〈신편제종교장총록〉.

책 수집과 관련한 글 가운데 스님이 쓴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의 수집을 발원한 글(〈대각국사 문집〉 제14권 수록)’이 있습니다. 교장이란 말은 붓다 가르침[敎]에 대한 모든 글[藏]이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에 담겨 있는데, 그 경을 읽고 연구한 학자들의 책(교장)을 수집하려는 소망을 밝힌 글입니다.

이 상소문은 부처님 가르침과 교화행을 찬탄하는 글로 시작합니다.

“세존께서 가르침을 베푸신 것을 말해보자면, 참다운 진리[眞常]의 경지를 혼자 즐길 수 없어서 모습 아닌 모습[非像之像]을 구름처럼 일으켰고, 대비(大悲)의 마음에 들려주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을 떠난 말[離說之說]을 바람처럼 일깨워주셨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궁을 떠나 수행자로 살아가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깨어난 자’ 즉 붓다가 됐습니다. 깨닫고 보니 그 경지가 행복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세속의 행복은 남의 것을 빼앗아 얻은 것이요, 쓰레기가 남고 더 큰 갈망으로 이어지는 것이지만, 보리수 아래에서 얻은 행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품게 된 그 행복을 법열(法悅) 즉 진리의 즐거움이라고 하지요. 이런 즐거움에 잠겨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한동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을 세상과 나누려는 마음이 일어났고, 그러려면 몸을 움직여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붓다가 된 이후의 그 몸[像]은 흔한 세속 사람의 몸이 아닌[非像] 깨달음을 이룬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의천 스님은 “모습 아닌 모습”이라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는 말을 해야 합니다. 상대가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온갖 말을 다 동원해서 들려주고 또 들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은 세속의 말과는 차원이 다른 말입니다. 귀를 아프게 하고 욕망으로 이끌고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그런 세속의 말을 떠난 말[離說]을 사람들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힘들 때면 절에 와서 ‘좋은 말씀’을 부탁하지만, 그 좋은 부처님 가르침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좋은데 그렇게 살기가 어디 쉬운가?”라며 살던 대로 그냥 삽니다. 그러다 힘들면 다시 찾아와 부처님 말씀을 청하지요. 이런 모습들을 보자니 오래 전 부처님도 중생으로 살 때 그랬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았고 그런 모습에 애잔함을 느껴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법문하는 것은 ‘법의 구름이 몰려와서 바람을 일으켜 법의 비를 내린다.’고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이런 모습은 구름이 뭉게뭉게 커지는 것과 같고 바람이 몰려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의 우레를 내리치고 법의 비를 두루두루 세상에 내려 보리의 길을 가리켜 보여주고 해탈의 문을 열어주셨으니 그 덕분에 자기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간 이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의천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를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감’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 모두가 제자리를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으며, 수행을 하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이후 부처님은 반열반하셨고 그 가르침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노력하여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냈고 중국으로 건너와 우여곡절 끝에 두루두루 세상에 퍼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의천 스님은 상소문의 중간쯤에 의미심장한 내용을 적었습니다.

“제가 전생에 착한 일이라는 걸 조금해서 그 덕분에 귀한 집에 태어났고, 눈먼 거북이 나뭇조각 만나는 것보다 더 귀하다는 인연으로 부처님 법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미륵부처님 법회자리에 나아가서 그 자애로운 모습을 직접 뵙고자 합니다. 하여, 경전공부 열심히 하고 온갖 불사도 정성스럽게 올렸지만, 그 모든 일을 완성하기도 전에 이 하찮은 몸이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글 제목에는 ‘19세에 지음[年十九作]’이라는 글귀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의천 스님이 직접 나이를 적어 넣은 것인데 왜 굳이 이렇게 글을 쓴 나이를 밝혔을까요? 19세란 나이가 어쩐지 제 마음에 깔깔하게 남습니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채 10년이 되지 않았을 시기입니다. 열아홉이란 나이는 무쇠도 씹어 소화시킬 정도의 건장한 젊음을 연상하게 됩니다. 생애 후반의 글에서 스님은 자신의 병을 언급하지만 이 글에서 보면 일찍이 병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허약한 몸을 유지하기가 버거운 듯 이런 말도 합니다.

“아무리 몸이란 것이 덧없기 짝이 없는 것이라 해도 그렇다고 스스로 살기를 포기할 수야 있겠습니까. 온갖 좋은 약을 구해와 먹는다 해도 이 중생의 몸에는 자애의 바람과 지혜의 이슬이 가장 좋은 보약이니 귀한 인연을 맺어 큰 복을 얻고 싶고, 부처님과 천상(佛天)의 도움을 받아서 건강한 몸을 얻고 수명을 연장하고 싶습니다.”

열아홉 청년 수행자의 글이라기에는 너무나 애절한 문장입니다. 그렇다고 의천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에 기대어 제 한 몸의 건강과 장수를 비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 소망을 이루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뒤이어 밝히고 있지요.

“이 땅에는 예전부터 인도에서 전해진 부처님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지만, 경론은 다 있는데 그 경론을 해설하고 풀이한 책[疏鈔]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동서고금 모든 불교사상가의 책들을 한곳에 다 모아서 유통하여 부처님 태양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릇된 견해의 그물을 풀어버려 부처님 법을 다시 일으켜서 널리 국가를 이롭게 하고 싶습니다. 사바세계 모든 중생이 함께 금강(金剛)처럼 단단한 선(善)의 씨앗을 뿌리고 다 함께 보현보살의 길을 배워 노사나 부처님 고향[진리의 경지]에서 길이 노닐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대각국사 의천에 대해서 언제나 국가적인 큰 불사를 거론합니다. 왕자였고, 왕실 원찰의 주지였고, 송나라의 걸출한 인재들과 교유하고 화폐유통을 건의했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습니다. 화엄과 천태가 고려 땅에서 탄탄히 뿌리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역시 그의 공로입니다.

그런데 19살에 쓴 이 상소문을 음미하면 의천 스님을 향한 그동안의 관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세속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스스로 포기하고 구도자의 길을 택한 데에는 한창 나이의 왕자들과 어울리기에 육신이 미약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활발하게 뛰놀기보다는 고요한 곳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성향을 키워간 것은 아니었을지. 하지만 스님은 미약하고 병든 육신을 비관하는 데에 멈추지 않고 남은 생은 불교 서적을 모두 모아 널리 유통시키는 일에 쏟아붓겠다는 큰 원을 세우고 있습니다.

재산과 교육 그리고 자유를 갖춰야 책을 수집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의천 스님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하게 살며 구도자로서 보현보살처럼 수행을 닦아 익혀 진리의 경지인 비로자나부처님 땅에서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그 마음, 그 소박하고 간절한 한 구도자의 서원 말입니다.

초조대장경은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소실되었고, 속장경으로 불리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은 몽고군의 3차 침입 때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전한다. 해인사 대장경 판고(板庫)에 보관되고 있는 경판은 재조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은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소실되었고, 속장경으로 불리는 〈신편제종교장총록〉은 몽고군의 3차 침입 때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전한다. 해인사 대장경 판고(板庫)에 보관되고 있는 경판은 재조대장경이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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