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단을 다스리는 지도자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작은 모임이든 큰 단체든 하나의 국가이든 지도자는 중요하다. 지도자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집단이나 사회를 앞장서 거느리고 이끄는 사람’ 정도로 간략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막대하다. 다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이끈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집단을 거느리고 이끄는 지도자에게는 상당한 덕성과 지혜가 요구된다.

지금 우리 곁에 덕과 지혜를 갖춘 지도자가 얼마나 있는가? 작은 모임에서 큰 단체 혹은 국가에 이르기까지 너도나도 훌륭한 지도자임을 자부하는 사람은 넘쳐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작은 모임의 리더라 할지라도 완벽할 수 없고, 큰 단체의 장(長)이라 할지라도 모두에게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절망적이고 개탄스러운 뉴스를 훨씬 많이 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패싸움에 여념이 없는 정치인이나, ‘윗선’ 눈치 보기에 바쁜 정부 조직이나, 당리당략에 따라 소신을 팽개치는 정당 조직들의 행태 등을 보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하는 탄식이 그칠 날이 없다. 문화계에서 존경받던 분이 이런저런 볼썽사나운 뉴스의 주인공이 되고, 교육계의 지도자들이 이념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종교계 지도자조차 민망하고 추한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린다. 점점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되고, 막장 드라마로 변해가는 세상이다. 그래도 고원의 노송처럼 꿋꿋이 지도자적 신념을 지키고 의리와 정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인사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미담을 듣기도 어렵다. 패거리 정치, 진영논리, 남 탓과 책임 덮어씌우기의 논란에 귀가 아프고 눈이 어지럽다.

그렇지만 지도자 탓만 해서는 안 된다. 그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으므로 지도자의 무능과 비리는 구성원 전체의 무능과 비리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는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는 것은 개인과 지도자의 공업(共業)이다. 덕성과 지혜가 없는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를 누리는 한, 그러한 지도자를 추종하고 맹종하는 무리가 있어 민심을 갈라치는 한, 퇴보의 내리막은 점점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정치는 욕망의 실현을 위해 달리고 종교는 욕망을 다스리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종교가 정치를 배워서는 안 되고 정치가 종교를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요즘은 종교는 물론이고 교육과 문화·예술·경제까지 모두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고유의 본질을 외면한다.

어느 집단이든 구성원 중 10%, 아니 5%만이라도 정신이 깨어있고 소신이 분명하여 용기 있게 처신한다면, 그 집단의 ‘폭망’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라고 할 때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며 떨쳐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세력이 있어야 그 집단은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5%란 영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시대의 영웅을 기다릴 뿐 스스로 영웅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웅이란 이르지 못할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양보와 배려의 미덕으로 살아가는 시민 모두가 영웅이기 때문이다.

국민이라는 말의 개념은 매우 분명하다. 민본(民本)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일련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추상적인 개념인 듯하다. 사회지도층에게 국민이나 집단의 민의가 선택적 정의로 받아들여지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국민을 볼모로 잡고 진영논리를 포장하는 정치판의 권모술수와 그에 동조하여 거대한 정의처럼 포장하는 세력들을 보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모두가 한통속으로 인간계를 지옥 끝으로 몰고 있다. 5%의 선각자를 아쉬워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杞憂)일까?

<잡보장경>에서는 왕이 나라를 망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현에게 묻지 않고 충언을 듣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즐겨 남의 나라를 치고 인민을 기르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면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나라는 망한다는 의미다. 대승적 가치관 안에서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합심할 때 구성원 모두의 행복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세상이 더 망가지기 전에 집단의 지도자든 구성원이든 용기 있는 소수의 힘찬 사자후가 나와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단 5%만이라도 깨어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그 우렁찬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세상은 조금이나마 향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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