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민속의 의례에는
공감·결집의 힘 깃들어
흐려지는 명절 문화 돌아보자

이번 설 명절을 맞아, 문득 우리의 세시풍속 의례가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삼국시대 초기(4세기 이전)에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됨으로써 민속의례가 정리되고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하지만 소수 귀족과 왕실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거나 부분적 수용이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토속신앙들이 어디든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어디든’이라 한 것은, 토속신앙 모두가 자연과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산이나 들은 물론 시내나 강, 심지어는 부엌이며 마당가의 나무들까지 빼놓지 않았다. 혹자는 그 시대에 유교신앙이 삼국에 얼마만큼은 퍼져있었을 것이라 한다. 그 근거로 신라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한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하기로 했다지만, 삼국과의 관계가 의례를 전하고 받을 정도로 높은 정신적 친화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불교는 이 땅에 자리잡을 때 토속신앙들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상대를 두고 자체 교섭을 거듭한 끝에,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의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정토신앙에 목적을 두고 부심 끝에 얻어낸 긍정적 결과였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가 중흥되었고, 그 사이에 무엇보다 사람들의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 귀족가는 물론 왕가조차 불교를 떠나지 못했다. 더욱이 백성들은 그 자세가 더욱 돈독해져 불교가 민속불교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물론 고승대덕들의 노력이 그만큼 컸음을 그로써 증명할 수도 있었다.

민속불교란 무엇인가? 늘 사람들을 연결 지어 아픔을 찾아내어 이를 어루만져서 새 기운이 돋게 하고, 나아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키울 수 있게 하는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해 사람들의 삶은 자신들 스스로가 어떻게 감당해내고 있으며, 아울러 불교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며,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고 있는지를 쉼없이 살펴온 결과라 할 것이다. 그 결과 어느 곳 어느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서 공감대를 이루고 이를 통해 결집력이 생겨서, 그 힘으로 생활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연속성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의례’이다. 음력 설날에 행하는 ‘통알(通謁)’이라는 의례가 있다. 절 식구 모두가 불전부터 시작해 산 안에 있는 모든 전각을 참배하는 대행사다.

민가에서는 설 명절에 고향을 찾아 혈족들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하지만 이제 옛이야기다. 언제부턴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혈족들이 얼마간이라도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 부족하지만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제는 언제든 원하는 얼굴을 보고 통화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인데도 이 정도로 이어지고 있다.

모여서 가까이는 조부모님, 멀리는 증조부모님부터 고조부모님까지도 그리움을 살려내고, 거기에 그분들이 평소에 주신 가르침을 되새겨 얹는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찌할까나. 어느덧 생활속에 묻혀가는 의례, 또한 피와 살 속에서도 흐릿해져가는 의례를 어찌할까나. 만일 무슨 일로 혈족이 모이는 자리에 가지 못하고 나면, 그동안 잘못 살아왔고, 지금 잘못 살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오래오래 힘들어했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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