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과 오죽 그리고 달력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설산(雪山)

내가 사는 애월읍 장전리에서는 한라산 산봉우리가 저만치 보인다. 그 산정을 볼 때마다 어떤 위엄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부동의 자세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오히려 위세가 있되 엄숙하고 점잖다. 한라산에 눈이 내려 우러러보는 산정은 이제 고결한 흰 빛이다. 나는 생활을 하다 이따금 산봉우리를 본다. 그럴 때마다 산정은 순은(純銀) 그 자체요, 고고(孤高) 곧 그것이다. 나는 너무 찌든 상태로 살고 있고, 또 나는 너무 혼미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됨됨이가 어떠한지, 불안정하지 않은지, 속내가 난마(亂麻)처럼 뒤얽혀 있지 않은지, 용심(用心)이 옹졸하여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도통 모르는 것이 아닌지를 되묻게 된다. 나는 이 겨울의 계절 동안 내내, 한라산에 복수초가 피고 봄이 되어 산정의 눈이 다 녹을 때까지 설산을 정신의 스승으로 모시고 살 것이다.

김칫독

제주에서는 육지보다 김장을 하는 때가 늦다. 육지 고향집에서 김장김치를 보내와서 벌써 김장을 하는 시기가 되었구나 싶었다. 이웃집에서도 김장을 했다며 막 담근 김치를 갖다 주었다. 아내가 오일장에 가서 김칫독을 사자고 해서 따라갔다. 제법 큰 김칫독 두 개를 차에 싣고 왔다. 그러곤 곡괭이와 삽으로 김칫독을 땅속에 묻으려고 땅을 팠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늘이 지는 뒷마당 쪽에 김칫독을 묻고 나니 어느새 하루가 다 저물었다. 그리고 거기에 김치를 넣었다. 김치냉장고를 하나 사라는 가족들의 권유가 없지 않지만, 김칫독을 묻고 김치를 독에 저장하는 것에는 어떤 운치가 있다. 물론 눈보라가 치는 겨울 저녁에 김치를 꺼내와 달라는 청을 받으면 영 귀찮기도 하지만. 우선 김칫독에 넣어두면 김치가 잘 익어서 더 맛있고, 또 김칫독 뚜껑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면 그게 고상하고 우아한 맛이 꽤 있다. 눈이 온 날에는 흰 눈의 하얀 덮개가 김칫독 뚜껑 위에 하나 더 생기는 것이요, 또 햇살이 들어 뚜껑 위에 쌓여 있던 눈덩이가 살살 녹는 것을 볼 적에는 시간의 바뀜과 흘러감을 고요하게 지켜볼 수도 있다. 게다가 나는 독 안에 든 김치를 상상해보기도 하는 것인데, 그 독 안의 시간은 적요의 시간이고 절제의 시간이며 견딤과 발효의 시간에 해당하는 셈이어서 내 마음이 바깥에 끌리고 요란한 것에 빠져드는 것을 조금은 경계할 수도 있다. 큰 눈이 언제 오려나. 김칫독 쪽을 내다보면서 김칫독 옆에 하얀 눈사람을 하나 세워 둘 생각을 해보고 처마에 길게 달릴 고드름도 미리 생각해보는 겨울날이다.

희사(喜捨)

불교에서는 ‘나눠주는 일을 할 때 나눠준다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얼마 전 다음의 일화로부터 최상의 나눔의 한 가지 실례를 듣게 되었다. 한 스님이 계셨는데 시봉(侍奉)을 하는 사람과 함께 고향인 제주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스님은 아주 가난하게 자랐고, 또 그 일이 늘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생가가 있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지폐를 두툼하게 봉투에 담아 왔다고 한다. 고향 마을에서는 집집이 대문도 없고 문도 걸어 잠그지 않은 채 살았는데, 시봉을 하는 사람이 어느 집에 이 돈을 나눠주실 거냐고 여쭈면, “모든 집이 다 활짝 열려 있으니 아무 집에나 가서 돈 봉투를 마루에 올려놓고 오라.”고 매번 말씀하셨다고 한다. 밭일과 바닷일을 하고 와서 집 마당으로 막 들어섰을 때 찬 마룻바닥에 놓인 돈 봉투를 보고서 크게 놀랐을 동네 사람들을 생각하니 나도 가슴 한편이 솜이불을 덮은 듯 푸근해졌다.

이상화 시인의 고택에 들러

대구 계산동 이상화 시인의 고택에 가서 마당에 심어진 석류나무를 보았다. 고택을 찾은 날이 절기상 대한(大寒)이어서 꽤 추웠다. 석류나무의 키는 고택의 지붕 높이 만큼이나 훤칠하게 컸고, 가지에는 석류가 꽤 여럿 매달려 있었다. 석류는 툭 터져서 마치 열정의 피가 돌고 도는 붉은 심장을 열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파에 한데서 일하느라 손등과 볼이 다 튼 노동의 얼굴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마당에도 기르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내 마당에 기르는 석류나무는 나의 삶의 시간에 내 속가슴에서 자라는 것이었으나 이런 열렬한 애정으로 분투하는 장관을 열심히 보여준 적은 없었으므로 적잖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안방 안쪽 벽에 ‘반다시 애써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육필로 쓴 액자의 조항들을 보았을 때 나는 한 번 더 부끄러움이 없지 않았다. ‘반다시 애써 할 일’의 조목들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위하며 살자. 우리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하고 적고 큰 것도 고맙다 아끼자. 우리는 저마다 할 일에 있는 힘을 다하자. 우리는 혼자 있을 때에도 내가 나를 속이지 말자. 우리는 내 것을 귀여웁게 할 것이요 남의 것만 부러워 말자. 우리는 항상 옳은 일을 하여 뉘우침을 모르게 하자. 우리는 언제 어데서나 오분히 착한 사람이 되자.”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오죽(烏竹)

시골로 이사를 들어왔을 때 아내의 먼 친척이 오죽을 선물했다. 뿌리가 흙덩이에 싸인 오죽을 놓아두고 아내와 나는 어디에 오죽을 심을지를 놓고 긴 고민을 이어갔다. 우리의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통에 오죽은 시들시들해졌다. 댓잎이 떨어지고, 댓줄기도 말라 갔다. 안방과 서재의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오죽을 심었지만, 오죽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몇 달 전 오죽의 줄기가 하나둘 올라오고 푸른 댓잎이 매달리더니 이제는 허리 높이만큼 키가 쑥 컸다. 집 툇마루에서 바라보면 저만치 귤밭 둘레에 맹종죽을 심어 키운 사람이 있어서 언제라도 대나무들을 볼 수 있지만, 내 집 마당 한쪽에 오죽이 있게 되니 또 다른 별개의 아취(雅趣)가 있다. 바람에 쓸려 기울어져도 오죽은 금방 꼿꼿하게 선다. 그제 들으니 바람 소리도 제법 받아낸다. 댓잎에는 윤기가 찰찰 흐르고, 풋풋한 생기가 있다. 된서리에도 시듦이 없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댓잎에 떨어지는 싸락눈 소리를 듣게 될 것을 고대한다. 그 맑은 소리를 듣고 싶다. 댓잎에 싸락눈 내리는 소리는 잠시 한가함을 즐기게 할 것이다. 그러면 또 잠깐 유거(幽居)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날의 빗소리는 파초의 잎사귀에 의탁해 듣고, 겨울날의 싸락눈 치는 소리는 댓잎에 의탁해 듣고자 하는 것이다.

새해 달력과 묵은해 달력

신년이면 해마다 새 달력을 놓아두게 되는데, 예전에는 책상용 작은 달력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벽에 걸어 둘 큼직한 달력이 좋다. 큰 달력에는 날짜도 잘 보이고, 음력도 표시가 뚜렷하게 되어 있고, 절기도 빠뜨리지 않고 적혀 있는 까닭이다. 출판사에서 달력이 우편으로 왔기에 펼쳐보았는데, 2월 낱장에는 동매(冬梅)가 그려져 있고, 9월 낱장에는 달빛에 하얀 물결을 이룬 메밀밭이 그려져 있다. 또 겉장에는 활짝 핀, 표정이 순한 호박꽃이 그려져 있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 대상들을 자연 속에서 보지 않는 것이 아니건만, 그래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을 법하건만, 무슨 까닭인지 내 마음밭에 이 꽃들이 순차적으로 피고 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겨울바람을 맞느라 몸을 몹시 오그리어 살고 있는 때에 꽃들을 보니 마음이 꽃봉오리 안쪽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 꽃들이 피는 때를 새해에 다 살게 되는구나 싶은 것이 기쁜 감정도 썩 들었다. 한 해를 좀 넓은 간격으로 바라보게도 되었다. 하루하루를 성심껏 가꾸는 일도 충분히 좋지만, 때로는 멀리 보는 안목도 키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옛 시절 생각이 잠깐 났다. 구년(舊年)의 달력을 모아두었다가 새 학년 새 학기에 새 교과서를 받게 되면 이것들을 책싸개로 사용하며 한껏 설레었던 일이 떠올랐다. 또 아버지께서 묵은해의 달력을 버리지 않고 뒀다가 그 뒷장에 글씨 연습도 하시고, 한자도 쓰시고, 유행가 가사도 쓰시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나도 그처럼 해보겠다고 집안을 뒤져가며 구년의 달력을 찾아보는 것이니 어쨌든지 달력은 활용할 데가 많다.

아침 인사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집을 요즘 읽고 있다. 메리 올리버는 1935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났다.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자연과의 교감을 주로 노래했다. 메리 올리버의 시집을 번역해서 출간한 출판사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그는 ‘자연 세계에 대한 포기할 줄 모르는 안내자’였다. 2019년 1월에 “여든세 살을 일기로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으로 돌아갔다.”고 씌어 있다.

메리 올리버는 겨울 아침이면 5시쯤에 일어난다고 산문에서 썼다. 계단을 내려와 먼저 커피를 끓이고 그러고선 창문마다 다니며 블라인드를 올려 밖에 다가오고 있는 우주의 은밀한, 여리디여린 아침을 맞이한다고 적었다. 또한 메리 올리버의 시 가운데는 ‘아침 산책’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아침 산책을 하면서 듣고 느낀 자연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시인이 본 아침의 자연 풍경들은 모두 감사의 속삭임과 노래를 전한다고 쓰고 있다. 딱새는 울음소리를 통해 감사를 전하고,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굴러 감사를 전하고, 황금방울새는 감사를 전하고자 눈부시게 빛나게 날아오르고, 사람은 떡갈나무 고목을 끌어안으며 감사를 전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아침에 일어나 어떤 행동을 하며 새날 새 아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일어났네요. 잘 잤어요?”라고 말을 떼거나, 한 컵의 물을 두 손으로 받쳐 들어 천천히 마시거나, 마당으로 나가서 강아지의 등을 쓸어주지만 나의 아침 인사는 너무 밋밋하지 않은가 싶었다. 가령 정원에 핀 수선화가 내게 맑은 얼굴로 건네는 아침 인사에 비하면 나의 아침 인사는 근사하지도 않고 매우 미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태준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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