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이, 여기서 마이 살았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대학시절, 자주 사용하던 낱말들이 있었다. ‘허무’, ‘허전하다’, ‘슬프다’, ‘좌절감’, ‘울먹이다’, ‘천둥같이 울었다’, ‘우울의 극치’ 등이다. 김남조 선생님의 시 강의에서 “허전하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시절 그분의 한마디는 내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졌고, 그 말과 의미까지 내 것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말을 후렴처럼 사용하며 살았다. 그뿐이겠는가? 사실은 ‘나’라는 여자의 그 내면에 이런 ‘청승’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낱말은 그 시절 멋으로 사용했던 표현들이기도 했다. 그냥 멋으로 ‘외롭다’, ‘허무하다’를 연발하면서 아무것도 외롭지 않게 허무하지도 않게 바쁘게 살았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무슨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밤을 꼬박 새우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허전하지 않았고, 허무도 심하지도 않았고, 글로 쓸 정도로 슬프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절망감이 큰 낭패이긴 했지만 나 스스로 인생이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대학 졸업 전까지는 슬픔도 괴로움도 그야말로 없었다. 시는 슬픈 것이라고 빨래를 쥐어짜듯 슬픔을 짜내어 시를 쓰기도 했다. 왜 시는 그렇게 징징 울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을 먼저 하고 그 언어들의 내용을 실제로 현실에서 체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말했던 아픔·고통·허무함은 조금씩 그 실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졸업 시화전을 했었다. 졸업반 방학 때였을 것이다. 고향 화가인 이상남 선배와 함께 고향다방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그 작업들이 불안을 해소하기도 했다. 시화전 준비를 하면서 ‘세상에 문학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문학’, ‘시인’ 참 많이도 읊조리던 말이다. 세상의 상처를 다 업고 살았던 시절, 아직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허전하다’, ‘고독하다’, ‘아프다’, ‘죽고 싶다’, ‘아, 절망 절망’, ‘눈물’, ‘통곡’ 그런 낱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단어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참으로 헤프게 그런 낱말을 사용했다. 그렇게 진정한 나만의 단어가 아니라 세상에 널려있는 단어를 가져다 썼다.

나는 이런 언어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시화전을 쉽게 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용감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먼저 하자고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고향다방으로 아침마다 출근해서 작품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오나?’ 아마도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대학시절,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 것을 다했던 만족감이 있었다. 그 빈곤하고 서투른 시화전을 버젓이 열고도 부끄러움 같은 것은 없었으니 젊기도 젊었었나 보다

새벽 이사

‘절망’, ‘고통’, ‘눈물’의 현실화가 점점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포라는 곳을 아나? 거기로 이사 간단다.”

어머니가 첫 새벽에 전화를 했다. ‘김포?’ 도무지 어딘지 모르는 곳이었다. 너무나 낯선 그곳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서 산다니. 그것도 며칠 후가 아니라 바로 내일이라니. 나는 기가 탁 막혔다. 어머니에게 간다는 말도 없이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선생님께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글만 남겨 두고.

사실 위독은 맞는 말이다. 집 마당을 들어서는 나는 바로 마당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울음이 내게 있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울음, 저 깊은 곳에서 흐르는 통곡을 쏟아 냈다.

그야말로 이사 가는 집이었다. 마당에는 짐이 뒹굴고 정원의 꽃도 울고 있었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어머니는 나를 안고 나보다 더 진한 통곡을 쏟고 쏟고 다시 쏟아 냈다.

“이게 우찌된 일이고?”

울면서 한마디 던졌지만, 어머니는 대답을 눈물로 대신했다. 눈물로 어머니 얼굴은 퉁퉁 불어 있었다. 빚쟁이에게 넘어간 집을 하루라도 빨리 비우라고 해서 이런 절차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빛나던 장독대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올바른 곳이 없었다. 아니, 이곳은 내 집이 아니다. 그러니 가야 한다. 나는 미친 듯 울고 나서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이, 여기서 마이 살았다. 다른 곳에서도 살아보면 조치머.”

집에만 오면 어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하느라 부엌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음식 냄새에 동네가 들썩거렸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도 저녁을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날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 뭐라고 하시겠는가. 배가 고파 쪼그리고 누워 있다가 눈을 떴다. 이미 이삿짐이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새벽 2시였다.

“무슨 일이고. 이 새벽에.”

“그람, 동네 사람 보는데 이 집을 두고 떠나라고?”

어머니는 고향사람 아무도 모르게 떠나기 위해 새벽 2시를 선택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뒹굴었던 방과 다락방과 정원과 내 어린 시절의 모든 ‘집’이라는 안식과 불안과 애착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입은 옷 그대로 짐차에 올랐다.

땅이 내려 앉아 있었다
나 어릴 적 살던 집
유독 앞마당이 푹 꺼져 있었다

가을 무 널어 말리는
햇살 모이는 마당

꼬드득 꼬드득
어머니 애 말리던 곳
달빛은 속없이 휘영청
쏟아져 내리던 날
죄 없이도 그날
마당 한쪽이 무시로 푹 꺼지던 날

〈삽화=필몽>

자다가 울다가

‘고향집’이라는 제목의 시다. 아마도 가슴속에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 고향집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어머니 옆에 앉았다. 그래, 어머니 옆이었다. 창밖은 돌덩이 같은 어둠뿐이었다. 가느다랗게 흐느끼던 어머니의 잔 울음소리는 시동이 걸리고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통곡으로 변했다. 점점 고향이 멀어져 갔다. 점점 우리집이 멀어져 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창을 부숴버릴 것 같았다. 언제 어머니가 고향을 찾을 것인가. 누구나 다 안다. 결코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고향 우리집을 가지 못할 것이다.

뒷자리에 앉은 아버지는 마냥 침묵이었다. 나는 그때 흐느끼는 침묵이라는 생각을 했다 잠도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눈은 그대로 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머니의 울음과 줄줄 흐르는 눈물은 아예 듣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 옆에는 오래 정미소에서 일하던 장 씨 아저씨와 김 씨 아저씨가 졸고 앉아 있었다. 그들도 졸면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아저씨는 친동생같이 좋으나 싫으나 아버지를 돌보았다.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잠시 자동차가 멈추고 그 아저씨들이 무슨 주스 같은 것을 사다 아버지 어머니께 드렸다. 나도 받았다. 고향집에서는 그냥 스쳐 지나가던 아저씨들인데 너무 고마웠다. 사람들은 그렇다. 어디서 언제 베품을 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잘 되면 저 아저씨들에게 돈뭉치를 안겨주겠다. 반드시 갚겠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니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나는 말해야 한다. 김포가 어딘지도 모르고 떠난 것이지만 나는 어머니 옆에서 울다가 자고 자다가 울었다. 자는 시간이 훨씬 길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장장 열두 시간 김포에 도착할 때까지 울었다. 인간의 눈물, 인간의 울음의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두렵고 두려웠다. 몇 끼를 굶었는지 어머니 몸은 꼬부라져 있었다. 장장 집에서 김포까지. 서서히 동이 트고 주변이 다 밝아 오는 아침에, 아니 아침이 지나고 빵인가 무엇인가를 먹은 후 낮이 되어서야 새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차에서 내리다가 기절했고,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당연하다. 인간이 어찌 그렇게 울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삿짐도 풀지 못하고 어머니는 이틀간 병원에 계시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거기도 집이지. 지금도 장장 열두 시간을 어떻게 울었는지 그 눈물은 뼈에서 흘렀는지 마음에서 흘렀는지 알 수가 없다. 눈물을 다 흘리고 나서야 기절했던 어머니는 아마도 포기 못한 어스름 희망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 후 어머니는 눈물이 없었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눈물을 그날 밤 다 쏟았는지 모른다.

김포는 서울 주변이었다. 고요하고 많지 않은 집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집은 아담했다. 더 슬픈 것은 어머니가 조금씩 적응해 나간다는 사실이었다. 포기에는 눈물이 없다. 포기하면서 다 내려놓으면서 어머니는 얼굴에 표정을 잃고, 돌부처처럼 행동했다. 인간에게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어쩌다 어머니는 지나가는 말로 “다 살게 돼 있는기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날 부르고 물으셨다.

“니 언젠가 김천 절에 간 적 있었제. 나 거기 좀 가고 싶다.”

“니 중 될끼가?”

김천 직지사. 대학 졸업 직전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취직도 어려웠을 때 나는 짐을 싸서 고향 부근 김천 직지사로 들어갔다. 내 깐에는 큰 결심을 한 것이다. 방 한 칸을 구하고 거기서 머물렀다. 그때만 해도 직지사는 고요했다. 모든 시간은 나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절간은 처음이라 사실 무섭기도 했다. 공양간 할머니는 친절했다. 손녀처럼 따뜻하게 밥을 해주셨다. 사람들이 절간에 가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불교 경전이 아니라, 수행이 아니라 절 주변의 산과 나무들이 내 마음을 이끌었는지 모른다. 내가 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내 시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은 느리게 갔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는 일은 책을 읽거나 산이나 물 그리고 대웅전을 보는 일이었다. 가끔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짧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시간이 느리다는 걸 처음 느꼈다. 시간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도 그때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나도 모른다. 아마 목표를 가진 사람의 힘이 아니었을까?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시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고민도 멋지게 했던 시절이었다.

무엇인가 주도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를 겨누어 관찰하기도 했다. ‘꿈·희망·소망 그런 것은 이루어지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다. 또 아주 여기서 살아 버릴까? 모든 인연을 끊고 여기서 살아 버릴까? 냇물이 될까? 나무가 될까? 냇가 돌맹이가 될까? 그렇게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화다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니 중 될끼가?”

“아이구 별별 속을 다 썩이네. 니하고 나하고 여기서 죽자.”

결국 어머니께 잡혀 집으로 돌아갔지만, 열흘 머문 직지사는 내게 많은 걸 경험하게 했다. 흔히 사용하던 ‘쓸쓸함’의 의미를 깨우치며 그렇다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미래를 생각했다는 것은 수확이었다. 그러나 별 진전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는 금방 내게로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법당에 걸린 탱화 속에 천수천안을 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 손이 눈이 천 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처님은 몸속에 저렇게 천 개의 손이 천 개의 눈이 있나보다.’ 무슨 일이 잘 안될 때 정말 간절하면 내 몸속에서도 천 개의 손이 천 개의 눈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직지사는 왜?

“마, 다 잊어버리고 절에 가서 앉아 있고 싶다캉께.”

같이 죽자고 고함을 치던 어머니도 그때 아름답던 자연은 바라보셨나 보다. 그리고 그 천수천안이라도 오래 바라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 후 어머니가 절에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차츰 평온을 찾을 때쯤 어머니는 다시 몸져누우셨다.

가지 끝에 서서 떨어졌지만
저것들은
나무의 내장들이다

어머니의 손끝을 거쳐
어머니의 가슴을 훑어 간
딸년들의 저 인생 좀 봐

어머니가 푹푹 끓이던
속 터진
내장들이다

‘낙엽송’이라는 자작시다. 한 여인이 고통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고통은 당신들의 깨달음을 싸고 있는 껍질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과실의 씨눈이 햇빛을 보려면 씨앗이 깨져야 하는 것처럼 당신들은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칼릴 지브란의 〈선지자〉에서 고통편을 계속 읽으며 나는 내 운명의 씨앗을 깨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운명의 씨앗은 더 큰 운명을 만들어 갔다. 피할 수 없어서 운명인가? 운명은 도무지 무슨 힘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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