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로 조성한
희귀한 목조 관음보살상
복장물 세 묶음 나와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높이 6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 고려, 높이 6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난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주는 자비로운 관음보살님을 현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 아닐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목조관음보살상은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가녀린 팔과 다리에 흘러내리는 천의와 옷주름, 섬세한 손끝의 긴장감과 화려하면서도 번잡하지 않은 장신구를 갖추고 있다. 오른 무릎을 세우고 왼쪽 다리는 내려뜨린 채 어딘가에 걸터앉은 자세는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가 찾아간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의 관음보살 모습을 재현한 듯하다. 경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자세는 고려와 조선시대 불화에 그려진 수월관음(水月觀音)의 모습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 이러한 자세의 관음보살상은 상대적으로 그 사례가 많이 남아있지 않고, 고려시대 불교목조각품 중 현존하는 예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관음보살상은 더욱 존귀한 보살상이다.

제작연대와 제작기법

이 관음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소장품 도록에 소개되어 학계에는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관음보살상이 고려시대에 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하나둘 발견되었다. 관음보살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시대 불상 입방체의 인체 표현이나 경직된 표정과는 전혀 다른 입체적인 조각상임을 알 수 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얼굴의 부피감, 등 뒤에서 어깨를 타고 두 팔 위로 흘러내린 천의, 높은 보관, 가슴과 다리에 걸친 장신구, 손목과 팔찌 그리고 허리띠까지 그 세밀함은 세련되고 귀족적인 고려의 미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X-ray 촬영 결과 두 눈에는 수정을 넣었고, 몸은 총 15개의 부재를 결합하여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올려 묶은 상투 형태의 머리 모양, 얼굴의 앞면, 머리 뒷면과 몸통, 하체, 양 팔다리와 두 손, 그리고 오른팔에 걸쳐진 천의 앞뒷면은 각각 별개의 부재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여러 부재로 만든 이유는 부재별로 조각하면 복잡한 자세를 잘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부를 비우고 목재의 두께를 얇게 만들어 뒤틀림을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육안으로도 보이는 몸체의 갈라진 틈은 바로 이러한 접합 부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져 표면의 금박층이 갈라져 생긴 선이다. 접합 부위는 못으로 연결했지만 보계와 머리, 얼굴의 앞면 등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착했다. 이처럼 여러 부재를 조립해서 만들고, 눈에 수정을 넣는 방식은 고려시대 목조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목재는 전나무이고, 연대 측정결과 목재의 연대가 1220~1285년으로 밝혀져 이 관음보살상이 고려시대에 제작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영험한 복장물: 다라니경 판본

불교에서 ‘복장(腹藏)’이란 불상 안에 여러 물건을 넣는 행위로 살아있는 부처를 떠올리며 불상에 영험함을 부여하는 의식의 산물이다. 관음보살상의 복장물은 총 세 묶음이 발견되었는데 머리에서 한 묶음, 복부에서 두 묶음이 수습되었다. 복장물이 흔들리지 않게 공간을 메우는 충전물이 없다는 점에서 복부에서 나온 복장물은 위치가 이미 교란(攪亂)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머리에서 나온 복장물은 교란되지 않았다. 머리 부분에서 나온 종이 뭉치는 다라니경 목판본이었는데, 그 안에 오색 실뭉치와 원통형의 금속체가 들어있었다. 다라니경 판본은 〈대수구다라니경(大隨求陀羅尼經)〉의 하나였고, 일종의 주문인 진언을 한자와 실담자(悉曇字)로 병기해 판각했다. X-ray 촬영 당시 원통형의 금속체는 관음보살상의 머리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다라니경으로 감싼 방울을 목과 같은 특정 신체 부위에 납입한 것처럼 머릿속의 금속 물체도 무언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다라니경 판본과 원통형 금속체는 관음보살의 정신을 담은 영험한 성물로서 보살상의 얼굴 앞면을 부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고려시대 종이에 찍은 것으로 밝혀진 〈대수구다라니경〉 판본은 호림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밀교대장(密敎大藏)〉 권 61 판본과 매우 유사해 고려시대 인출본으로 추정된다.

전통과 변용의 상징: 오보병과 후령통

복장물 중 두 번째 묶음은 삼베로 만든 보자기인데 이를 ‘황초폭자(黃綃幅子)’라고 한다. 이 안에 다섯 개의 직물 뭉치와 반짝이는 후령통(喉鈴筒)이 들어있었다. 직물을 열어보니 이 정체불명의 물건은 나무로 깎아 만든 것으로 맨 위를 하얀 솜뭉치가 감싸고 있었다. 다시 이 솜을 들춰보니 이 안에 곡물이 들어있었다. 나무로 만든 물체는 위가 불룩하고 아래가 홀쭉하여 마치 고려시대 청자나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매병(梅甁) 모양이다. 실제 병처럼 깎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 위에 옻칠을 하고, 이 중 도금을 하거나 초록색 안료를 칠한 사례도 있었다. 이런 형태의 오보병(五寶甁)은 한국 복장물의 전통과 변용을 새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우리나라에서 복장의식이 시행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적어도 13세기에는 불상 제작과 봉안에서 보편적인 의식으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복장물로는 수정구슬 같은 심주(心珠)와 방울인 후령(喉鈴), 합 모양인 사리통과 팔엽통 등이 남아있으며, 각종 향·약재·보석류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상징적이며 추상적인 형태는 우리나라 복장물만의 특징이다. 현재 전하는 복장 의식은 1824년 용허(聳虛) 스님이 불상 제작과 관련한 여러 경전 내용을 모아 놓은 〈조상경(造像經)〉에 의거하고 있다. 조선시대 복장물의 핵심은 긴 원통형 모양의 용기인 후령통으로 그 안에 여러 곡물·약재·향·광물을 담은 오보병을 넣었다. 오보병은 실제 병 모양이 아니라 직물에 곡식·한약재·향·광물 등을 넣고 돌돌 말아 실로 감은 형태이다. 그리고 직물은 동서남북과 중앙 각 방위별로 청·적·백·흑·황색의 천을 방형·삼각형·원형·반월형 등 오방경(五方銳)으로 만들었다. 그동안 이와 같은 보병 형태를 왜 ‘병(甁)’이라 불렀을지 그 유래에 대해 많은 의문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명주 풀솜으로 끈을 만들어 입구를 막은 오방색의 다섯 병, 즉 진짜 병 모양의 오보병이 이 고려시대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실물로 발견된 것이다. 오보병은 각 방위별로 금속으로 만든 오방경과 함께 범자로 진심종자(眞心種子)가 쓰여 있는 삼베편과 또 다른 범자인 오륜종자(五輪種子)를 쓴 비단에 차례로 싸여 황초폭자에 담겼다. 이 때문에 오보병이 상징적인 형태로 변모하기 전후에는 실제 ‘병’ 형태의 오보병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황초폭자에 함께 싸여 있던 후령통은 뚜껑에 ‘후혈(喉血)’이라고 하는 긴 관이 연결되어 있고, 연꽃잎이 표현되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인 15세기경 나타나는 특징이다. 후령통 안에는 사리를 상징하는 천연 진주 7과와 심주(心珠)인 하얀 진주가 들어있었다. 주석과 납으로 만든 후령통과 연꽃 모양 팔엽연화는 보석처럼 반짝였고, 심주를 감싼 쪽빛 직물은 마치 어제 물들인 듯 그 색채가 생생하다. 오보병을 감쌌던 삼베편이나 비단의 문양 역시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 문양이고, 복장물 중 세 번째 묶음에서는 1399년 판본의 〈묘법연화경〉 ‘견보탑품’과 15세기 판본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이 발견되어 이 복장물들은 조선 전기 관음보살에 후납된 복장물로 보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수구다라니경〉 판본 40.4×38cm, 〈대수구다라니경〉 안에 싸여 있던 원통형 금속체, 높이 2.9cm, 황초폭자 안의 오보병과 후령통 발견 모습,  목조관음보살좌상의 X-ray 사진. 얼굴 정 중앙에 원통형 물체가 있으며 부재별 접합 부위에는 못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수구다라니경〉 판본 40.4×38cm, 〈대수구다라니경〉 안에 싸여 있던 원통형 금속체, 높이 2.9cm, 황초폭자 안의 오보병과 후령통 발견 모습,  목조관음보살좌상의 X-ray 사진. 얼굴 정 중앙에 원통형 물체가 있으며 부재별 접합 부위에는 못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수께끼 같은 오보병 제작 시기

그렇다면 이 나무로 만든 오보병은 언제 제작된 것일까? 관음보살상 머릿속 복장물과 같은 13세기인지 아니면 하복부의 다른 복장물처럼 15세기인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관음보살상의 오보병은 실제 병의 형태와 기능을 나무와 옻칠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오보병의 시원적 형태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오보병과 같이 발견된 씨앗 중 보병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온 일부 씨앗은 종이로 싼 예도 있고 싸지 않은 예도 있다. 이는 기존의 복장물에서 흘러나온 일부 곡물을 복장물을 후납할 때 다시 정방형의 종이에 싸서 넣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른 광물의 경우에도 종이로 일일이 포장을 해서 다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 종이에 싸여 있지 않은 곡물은 후납한 후에 보병에서 다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보살상의 개금 중수가 이루어질 때 기존의 복장물이 다시 정리되고 금속으로 제작된 후령통과 오방경이 새로이 추가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목조관음보살상의 조사를 시작한 계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간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대상품을 조사하면서 필자는 불상과 관련해 교란된 복장물 조사와 정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2008년 보존처리를 계기로 복장물의 정리와 조사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2012년 목조불상 조사사업을 기획하고, 2014년 첫 보고서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Ⅰ〉을 발간했으며, 2015년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에서 관음보살상을 공개했다. 처음 조사 계기부터 전시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결과 고려시대 목조 불상의 여러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13세기 수월관음상을 일반에 공개해 관음보살의 자비로움을 여러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성과로 남게 되었다.

신소연
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2012) 개최, 반가사유상실·불교조각실 개편(201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발간(2014·2016), 특별전 ‘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2015) 개최, 반가사유상실 ‘사유의 방’ 개관(2021) 등의 업무를 진행했다.

북쪽 보병(나무에 옻칠, 높이 4.2cm)과 중앙 황색보병(나무에 옻칠과 금박, 높이 4.3cm).
북쪽 보병(나무에 옻칠, 높이 4.2cm)과 중앙 황색보병(나무에 옻칠과 금박, 높이 4.3cm).
위에서 부터 황색보병 발견 당시 모습, 후령통(높이 5.2cm),  심주(지름 7.9mm).
위에서 부터 황색보병 발견 당시 모습, 후령통(높이 5.2cm),  심주(지름 7.9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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