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호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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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 연꽃이 천년을 산다
진흙 물결도 없는데
한 번 돋아나면 오직 적멸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니 꽃은 피고 지는 게 아니라
화려함 뒤에 숨어
나무의 숨결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거다
처음엔 그저 썩지 않게
다스리는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틈 하나 없이
나무를 껴안고 놓지 않는다
이것은 밀봉이 아니라 밀착
색(色)이 공(空)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
봉황의 춤이 허공중에 스민다
바람이 색을 민다
풍경 소리가 찰방찰방 헤엄친다
지붕 아래 꽃들이 소리 나는 쪽을 본다
색과 색이 만나 서로의 색을 탐독한다
꽃의 안쪽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될 때까지
나는 화두 밑을 걷고 또 걷는다
머리 위에 꽃의 말이 내려앉는다
대웅전 안쪽 문수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웃을 것만 같다
몸속이 화심(花心)으로 가득 찬 기분
꽃의 마음이란
식물성 부처를 만나는 일이었을까
절 쪽만 바라봐도
날개를 편 단청이 꿈속으로 날아왔다

 

 

경건히 무릎 꿇어 두레상을 받습니다
투박한 질그릇에 담기는 경전 한 권
퍼내도 마르지 않을 무량심을 읽습니다

가슴 떨린 질곡의 삶, 어둠을 헤쳐 나와
둥근 테두리 단전 끝 꾹꾹 눌려 다져서
따뜻한 모성의 온기를 지어 올린 어머니

켜켜이 치성으로 쌓아올린 눈물의 탑,
에인 상처 언저리에 살점으로 돋아나는
자신을 버려야 피는 불가해한 꽃이여

우주의 가장자리 솟아난 우뚝한 산,
온몸에 뜸을 들여 쏟아낸 젖빛 봉우리
받쳐 든 고귀한 사랑 공양을 받습니다

 

 

 

차갑고 축축한 무엇이 뒷목에 뚝 떨어져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금이 간 베란다 지붕 틈으로 굵은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진눈깨비가 녹은 물이 천정으로 새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지붕 곳곳을 살펴보니 비가 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리모델링 한 지 얼마 안 된 집이라더니, 베란다 천정은 공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닥에 놓인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빗방울이 떨어진 박스의 표면이 호피무늬처럼 얼룩덜룩해져 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서 박스를 안으로 들여야 했다.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박스 안의 내용물을 어느 공간에 처박아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노트북과 스피커가 놓인 앉은뱅이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상 서랍은 비좁을뿐더러 박스 안의 물건들을 자주 대면하게 될 것 같아 싫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옷걸이와 서랍장 사이에 뜬 공간이 있었다. 박스 하나쯤은 정리해 넣어도 될 크기였다. 그런데 어쩐지 내 몸에 불결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싱크대 위의 수납장 문을 열었다. 칸칸이 인스턴트 식품들이 채워져 있어 당장은 짐 들일 공간이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박스는 벌써 빗물에 젖어있었다. 나는 투명한 테이프로 막아둔 박스의 틈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박스의 두께 때문에 그 안의 내용물까지 젖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방안에 들이려고 박스를 들어 올리려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마침 진눈깨비는 그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마저 내리쬐었다. 나는 박스를 그대로 베란다에 두고 건조시키기로 했다.

앉은뱅이책상에 꽂힌 일러스트레이터 교본을 꺼내 들었다. 중간 페이지에 끼워둔 우편물을 손에 들고 ‘본인 확인 요망’이라는 붉은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본인이 아닌 경우 우편물을 뜯지 말 것과, 뜯었을 경우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경고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 문구는 메시지가 의도하는 것과는 달리 누구에게라도 뜯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일러스트레이터 교본에 우편물을 끼워 다시금 책꽂이에 꽂았다. 갑자기 쇄골과 명치의 중간 부분에서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저릿함이 전해져 왔다. 책상 위에 놓인 야구공을 집어 가슴팍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병원에서 가슴뼈가 앞으로 점점 튀어나오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원인은 알기 어렵다고 했다. 처방받은 관절염 치료약을 얼마간 먹어보았으나 효과는 없었다.

통증이 시작된 건 두어 달 전이었다. 우편물을 받자마자 가슴뼈가 깨지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심장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듯 갑갑한 느낌이 들어 손이 저절로 벽을 짚었다. 신용정보회사가 나의 주소지를 알고 있다면, 그 사람 또한 나의 거처를 알고 있는 걸까. 살갗이 아리는 느낌이 들었고, 살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내가 먼저 살인을 해야만 이 불안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이사를 서둘러야 한다는 것 외엔 다른 대처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버려진 항구도시가 된 이곳에 정착하기로 한 것은 서울과 거리가 멀다는 것과 집값이 싸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에서는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인구가 대거 빠져나간 구도시를 살리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한 청년들에게 주거비와 창업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색적이고 개성 넘치는 상점들과 다양한 볼거리들을 유치시켜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인가 보았다. ‘무일푼의 젊음이 도시 하나를 재건할 만큼 위대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않고 이사를 감행했다. 주거든 창업이든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신용이 좋아야 했다. 다행히도 집값은 턱없이 저렴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집밖을 나섰다. 길 위에 서자마자 어디선가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반주도 없이 가창자의 목소리만 허공에 울려 퍼졌다. 유행가도 아닌 그 가락은 어쩐지 귀에 익었다. 깊은 동굴 속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풍부한 성량 때문이었을까. 비탈길에 나란히 선 지붕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판소리인지 민요인지 아무튼 누군가가 창을 하는 듯했다. 서울로부터 먼 곳으로 밀려난 사실이 실감되었다.

여기저기 아스팔트가 깨져 있는 골목길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균열이 생긴 자리에 이름 모를 풀들이 쭈뼛쭈뼛 돋아나 있었다. 허물어진 담과 부서진 대문들, 대청 유리가 박살난 채로 방치된 집들이 길을 내어주었다. ‘아들과 딸’이었던가? ‘육남매’였던가? 커다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달동네 골목을 누비며 김밥인지 떡인지를 팔고 다니던 어느 여배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골목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세트장 같은 분위기였다. 벽에 붙은 흑백의 광고 포스터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했거나 노인이 된 배우들의 앳된 얼굴이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콧등이 매워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삶을 겁내며 후퇴하는 생을 반복할 거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항구에 다다르기까지 30여 분을 걷는 동안 문이 열린 음식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백반이라고 쓰인 음식점을 지나칠 때마다 유리문에 바짝 다가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부엔 테이블과 의자가 먼지를 이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항구에는 홍어나 생선회를 파는 곳이 많았는데, ‘주말에만 장사합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이고는 모두 문을 닫아둔 상태였다. 나는 끝내 문을 연 식당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다시 걸어 올라갔다.

내려갈 땐 보이지 않았던 담벼락의 시화들이 골목길을 오를 때는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시집살이의 고단함이나 항구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의 애환, 부모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 등을 노래한 이 지역 주민들의 시들이 향토적 이미지의 그림과 어울려 담벼락을 장식했다. 하나같이 유행가 가사처럼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유명 시인들의 작품도 눈길을 끌었는데, 내겐 주민들의 시보다 감동이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먼 산 너머로 이어지는 외줄기 길을 홀로 걷는 나그네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쓰인 ‘길’이라는 시는, ‘길은 언제나 뒤에 있다’라는 아리송한 의미의 시구를 반복했다. 나그네의 앞으로 길게 뻗은 길을 그린 시화와는 모순된 의미를 내포한 시구였다.

집 앞에 다다르니 더 높은 언덕에 위치한 파란색 지붕의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당에 긴 평상이 있고, 그 위에 여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등이 굽은 할아버지가 느린 동작으로 쟁반에 음식을 날랐다. ‘설마 식당인가?’하고 가까이 다가갔으나 상호가 적힌 간판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집을 좀 더 기웃거려보았다. 철제로 된 다층 선반에 과자와 생필품 등이 진열되어있는 집안의 내부가 보였다.

- 여기, 식당이에요?

나는 빈 쟁반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할아버지를 향해 대문 밖에서 소리쳤다.

- 뭐 먹을라고?

- 밥이요.

- 들어와!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안채로 들어갔다. 나는 마당의 평상에 펼쳐진 상 중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것에 앉았다. 모두 바다를 옆에 두고 앉아 있었지만, 나는 담벼락을 향해 돌아서 앉았다. 얼마쯤 후에 할아버지가 안채에서 나왔을 땐 오이무침, 고구마줄기무침, 멸치볶음, 김치 등이 수북하게 쌓인 접시와 흰 쌀밥이 고봉으로 담긴 공기를 들고 나왔다. 초장이 아무렇게나 묻어있는 손으로 반찬을 내려놓고 가는 할아버지를 보니 입맛이 사라졌다. 그런데 참깨를 뿌린 게 아니라 쏟아부어 만든 반찬들을 보니 이내 식욕이 일었다. 할아버지에게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 남자여 여자여?

화장기 없는 얼굴에 후줄근한 점퍼. 남자처럼 짧게 커트한 머리 때문에 나는 종종 할아버지처럼 묻는 사람들을 만나곤 했다. 그들은 내가 예쁘장하고 마른 남자라고 생각했다.

-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데요.

- 잉?

- 술이나 주세요.

할아버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술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깨강정인지 오이무침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세상에 없는 고소한 맛이었다. 어디선가 “저 사람은 누구여?”라고 하는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에어팟을 귀에 꽂고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 파일을 재생시켰다. 최신 유행의 케이팝마저도 구수하게 만드는 이상한 분위기의 음식점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젖은 박스가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바닷바람이 들이치는 창을 닫으려 베란다로 나갔다. 창 너머로 여객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그것은 언뜻 폐선처럼 보였다. 수평선을 첩첩이 가로막은 섬들 때문이었을까. 들어왔으니 나가는 길도 분명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여객선은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없어 그대로 낡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을 가로막는 저 섬들을 바닷속으로 꾹꾹 눌러 평평한 길을 내고 싶었다.

방안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메일을 열어보니 편집을 해야 할 텍스트 파일이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나는 어렵사리 정규직이 된 출판사를 1년도 채 못 되어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해 이곳에 내려온 터였다. 이전 직장에선 마감일만 잘 지켜준다면 꾸준히 일을 주겠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편집할 텍스트를 열었다. 얼마간 행간 사이를 무심히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불쑥 마우스를 거칠게 밀어내며 책상에서 일어섰다.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라는 문장이 눈동자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베란다 창을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필터를 앞니로 지그시 깨물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내 연대보증의 주채무자에도 죄가 없다는 건가?’ 연기를 빨아들이며 가늘게 뜬 눈으로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덜 마른 박스가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우편물을 받은 다음 날 나는 회사에 병가를 냈다. 서울 인근의 템플스테이가 가능한 절로 들어가 우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수취인불명 처리가 되도록 반송할 것인가, 아니면 당당하게 뜯어보고 옳고 그름을 따져 순리대로 해결할 것인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얻은 정규직 직장이었다. 세금 신고가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4대 보험의 혜택이 주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사회인이 된 것이 화근이었다. 평범한 일상을 갖겠다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 수치스러웠다. 절간을 내려가기 전날 밤 나는 충동적으로 우편물을 뜯어보았다. 매우 정중한 어조로 국가에서 신용회복지원을 하고 있으니 속히 보증채무 9800만 원을 상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로 주채무자인 그 사람의 이름과 연대 보증인인 나의 이름이 검고 굵은 글씨로 박혀있었다. 채무가 형성된 날짜도 명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정확히 내가 스무 살이 된 해였다.

나는 휴대폰의 전원을 켜고 무심히 ‘연대’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었다. 나는 한동안 초점 없는 눈동자로 흰 벽을 응시했다. 늙고 시커먼 놈이 발버둥치는 어린 소녀를 부둥켜안고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나는 채무고지서를 차곡차곡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내가 채무를 해결한다면 그는 채무에서 벗어날 터였다. 그리고 그는 어딘가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생각해낼 것이다. 그렇게 다시 그의 인생에 호출되느니 차라리 이 사회에서 영원히 증발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편이 나았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이른 봄이 찾아왔지만 박스는 여전히 베란다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습도가 높은 항구마을이라선지 박스는 완전히 마르기도 전에 곰팡이를 피워냈다. 거무티티한 점들이 박스 아래에서부터 점점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박스를 살짝 들어보았다. 박스 아래에서 엄지만 한 바퀴벌레가 재빠른 발놀림으로 기어 나왔다. 비명을 지르며 빗자루 위에 바퀴벌레를 올라타게 한 후 창문 밖에 털어내 버렸다. 이렇게 방치해 두다가 박스 안의 내용물이 영영 무용지물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박스를 방안으로 들이고 허브 향기 물씬 풍기는 온실을 가꾸어볼까. 제법 널찍한 면적에 투명한 재질의 천정에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이 베란다는 향기로운 잎과 꽃을 지닌 허브를 심기에 너무도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곁눈으로 박스를 흘겨보았다. 손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새로 받은 텍스트 파일을 열어보았다. 우주의 미래에 관한 원고였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사진이 많아 작업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인디자인 프로그램에서 작업할 파일을 불러와 텍스트 박스를 클릭했다. 순식간에 200페이지가 만들어졌지만, 세부 디자인을 하는 건 지금부터였다. 이미지를 배열하기 위해 페이지를 정렬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아스라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뱃고동 소리와 한데 어울려 진동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소리였다. 폐 속 깊이 들이마셨던 공기를 조금씩 끊어 내뱉으며 성대를 굵고 거칠게 진동시키는 그 목소리에 나는 한동안 집중력을 잃고 있었다. 그 소리가 사라질 즈음 무심히 베란다로 고개가 돌아갔다. 곰팡이 핀 박스가 또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아래로 굴러 들어간 야구공을 꺼내어 가슴을 마사지했다. 세상엔 낫지 않는 병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았다.

집밖을 나섰다. 속이 뻥 뚫리는 생맥주를 한잔 마시고 싶었으나 이 동네엔 그럴만한 술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파란 지붕 집에 가서 막걸리나 한 사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굵은 시골쥐가 튀어나올 것 같은 폐가의 골목을 지나는데, 담벼락 밑에서 자그마한 깡통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깡통이 저절로 움직이다니……. 나는 발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붉은 갈색으로 변색된 베이키드빈스 깡통은 언제 움직였었냐는 듯 얼음이 돼 있었다. ‘잘못 본 건가?’ 하고 그만 길을 내려가려던 순간 깡통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가만히 깡통 가까이로 가 쪼그리고 앉았다. 제법 딱딱해 보이는 집게발이 깡통 밑으로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녹슨 깡통으로 집을 삼은 소라게가 골목길을 바삐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집을 이고 어디선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따라 바다로 내려가려는 것일 터였다. 소라게에게 바다로 뻗은 잘 닦인 길을 내주고 싶었다. 나는 2차원 생명체인 소라게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3차원 존재로서 시혜를 베풀 듯 깡통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깡통 속의 소라게는 녀석의 집게발이 연상시키는 몸집보다도 훨씬 작았다. “불쌍한 것.”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다와 연결된 도랑물 위에 깡통을 띄워 보냈다. 물살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가던 깡통은 이내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살다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조력자로부터 오는 이런 비약적인 행운을 만날 수도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신비로운 행운이 내게도 주어지기를 빌며 소라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마당 안으로 깊이 들어가 평상에 앉았다. 허리가 휘다 못해 ‘ㄱ’자로 꺾인 할머니가 무릎을 짚어가며 느릿느릿 다가왔다.

- 뭐 먹을라고?

- 막걸리 하나 주시고요, 메뉴판 없어요?

할머니가 덜렁거리는 틀니를 훤히 내보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 그냥 말해 봐.

메뉴판 없이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이 낯설어 어물쩡대는 사이,

- 손두부 한 접시 먹어봐, 그럼.

하고 할머니가 정해 주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는 왼편에 있는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베란다 창 너머로 보았던 크고 낡은 배는 항구에 그대로 정박해 있었고, 그보다 작은 고깃배들이 스스로 길을 내며 수면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길도 나지 않는 물 위를 왔다갔다하는 배들의 풍경을 보니 골목길 담벼락에서 본 시구가 떠올랐다. ‘길은 언제나 뒤에 있다.’ 배가 지나간 자리마다 길이 생기는 수면을 보니 그 시구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다른 이들이 걸어가며 닦아 놓은 길은 길이 아니고, 스스로 지나간 자리가 길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깨를 넣어 만든 양념이 3센티 두께로 얹어진 손두부를 앞에 두고 막걸리를 마셨다. 노을빛이 옆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참기름 냄새 때문인지, 바닷바람 탓인지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걸리를 사발에 따르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 부재중 수신이 있는지 확인했다. 신용정보회사에서 연락을 주기로 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산사에서 내려온 날 우편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분을 밝히니 상담원이 다짜고짜 “소송이 걸린 채무가 다섯 건이죠?”라고 내게 물어왔다. “제가요?”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알기로 내게는 주채무자로 인한 보증채무 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상담원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소송이 걸린 그 채무는 주채무자인 그 사람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가 여전히 쓰레기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나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주채무자와 혈연으로도, 지연으로도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상담원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채권자에게 주채무자의 채무에 대한 보증을 허락한다는 그 어떤 의사 표현도 한 적이 없음을 강조했다. 채권이 형성된 시기의 나는 스무 살의 재수생이었고, 누군가의 보증을 설 만한 능력도 없었다는 말을 보탰다. 그렇다면 왜 서류상으로 내가 주채무자의 보증인이 되어 있는지를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목구멍에 작은 풍선 하나가 들어온 느낌이더니 점점 크게 부풀어 성대를 꽉 막아버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상담원은 “일단 더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런 후로 어쩐 일인지 수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노을은 서쪽 섬 너머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푸르스름한 하늘과 바다, 노을을 삼킨 섬 끝, 눈물방울처럼 총총히 켜지는 고깃배의 불빛. 술을 부르는 풍경을 탓하며 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단번에 들이켰다. 도무지 취하지가 않아 밤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어느새 평상은 이 지역 방언과 서울 표준말을 쓰는 사람들로 만원이 되어 있었다. 늙은 두 양주(兩主)는 안방과 대청에까지 손님을 받았다. 친절하거나 청결하지도 않은 집인데 손님이 바글거렸다. 안방에서는 누군가 창을 하는 소리도 새어 나왔다. 이따금 어디선가 들려오던 노랫가락의 진원지가 이곳인가 보았다. 에어팟을 귀에 꽂고 휴대폰에 저장된 음악 파일을 재생시켰다. 부드러운 뉴에이지 선율이 구수한 창을 뒤로하고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 정말 ……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나는 습관처럼 또 그렇게 중얼거렸다. 답도 없는 물음을 한동안 그렇게 수도 없이 내뱉다가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일어났다. 안채에서 분주하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할아버지에게 값을 치렀다.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동안 저고리를 입고 창을 하는 사내를 건너다보았다. 북채를 쥔 고수와 막걸리 사발을 들이키며 앉아 있는 사람들. 너무도 전통적이어서 오히려 생경해 보이는 장면이었다. 거스름돈을 건네받고 대문 밖을 나섰다. 사내의 소리가 집 앞까지 따라왔다. 풍부한 성량으로 꼬리를 길게 늘이는 그 소리는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닫을 때까지 계속 울음을 끊어냈다.

⊙⊙⊙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눈을 떴다. 코끝에서 역한 감 냄새가 났다. 소주병과 과자봉지가 나뒹굴고 있는 방바닥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밤새 게워낸 탓인지 푸른 위액만 토해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박스에는 곰팡이가 더욱 화려하게 피어있었고, 바닥엔 라이터 몇 개가 나뒹굴었다. 어젯밤 술김에 박스를 불태우려다가 차마 그러지 못했던 흔적이었다. 박스에는 언젠가 나를 변호해야 할 날이 오면 꺼내놓을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여성문제상담소 상담원의 조언에 따라 협박용 문자와 이메일, 영상 파일,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와 상흔을 찍은 사진 등을 모아둔 것이었다. 법적인 대응을 예비해 보관하기 시작한 게 벌써 15년을 훌쩍 넘겼지만, 나는 그것을 활용하지도 버리지도 못했다. 주채무자는 지금도 살아있고, 나는 여전히 그와 채무로 연대된 관계였다.

힘없이 누워 텔레비전을 틀었다. 중학생 소녀가 자신을 성추행한 친모의 동거남을 경찰에 신고했다가 살해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다. 친모의 동거남이 소녀의 시신을 유기한 장소가 이 지역 부근이라서 정신이 번뜩 들었다. 친모가 그 일을 도왔다는 소식도 이어지자 전원을 껐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언젠가 그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노모가 운영하는 식당 앞을 찾아간 것이었다. 서울 외곽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그 음식점 인근에 렌트한 차를 세우고, 한 달여간 그 사람의 출입을 감시했다. 전기충격기와 휘발유통을 조수석에 싣고 그를 기다리면서 엄마를 대신해 그 식당에서 서빙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그래야만 제맛이 난다는 이유로 식재료로 쓰일 개를 산 채로 나무에 매달아 야구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죽였다. 나는 개의 신음을 들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에서 재사용이 가능한 것을 골라내고, 만취한 손님들 몰래 술병의 수를 늘려 값을 올려 받았다. 그가 개의 배를 갈라 내장을 골라내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나는 쪽방으로 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에게 바지를 벗어주었다. 내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손에서는 늘 개의 피비린내가 났다.

당시 나는 끝내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보신탕’이라는 간판을 ‘가마솥영양탕’으로 바꾸고 장사하는 그의 노모만이 가끔씩 마당에서 목격되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이 사회에서 멀리 격리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혹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서서히 인정해가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물을 끓였다. 컵라면 하나를 뜯어 상에 올리고 냉장고에서 단무지를 꺼냈다. 컵라면에 끓은 물을 붓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컴퓨터를 열어보았다. 마감일을 넘긴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메일을 열어보니 편집자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들어와 있었다. ‘갑자기 왜 마감일을 지키지 않느냐? 당신이 끝내지 않아 발 묶인 작업이 벌써 세 건이다, 그 일만 마치면 더 이상 오더를 내리지 않겠다.’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컵라면을 절반쯤 남기고 싱크대 개수대에 버렸다.

밀린 작업을 모두 끝내고 작업한 파일을 편집자에게 전송했을 때는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러고 보니 9시간 동안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저녁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하며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는데, 유명 포털사이트 실시간 뉴스난에 ‘IMF 외환위기 연대보증 채무자 구제’라는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화면 가까이로 두 눈을 들이밀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연대보증 채무자에 한하여 외환위기 시기에 성립된 채권을 삭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외환위기 당시의 보증채무라면 나도 속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더니 이렇게도 끝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알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런 삶의 비약이 실현되는 건지도 몰랐다. 전화를 걸어 면책 대상자에 내가 포함이 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런 기대를 하는 스스로가 몹시 구차하게 느껴져 그만두었다. 바닷바람을 마시고 싶어서 베란다로 나가려는데 박스가 가로막고 앉아 있었다. 또 술 생각이 났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파란 지붕집에는 아직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마당의 평상에도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밤이 되면 인적이 더 뜸해져 유령마을이 되는 동네에서 다른 식당을 찾기는 무리였다. 나는 파란 지붕집 대문에서 서성이다가 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평상엔 자리가 없었다. 안방과 대청에도 자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냥 돌아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 밥 먹고 가. 금방 돼.

나는 못 이기는 척 할아버지가 안내하는 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이 놓인 벽면에 상을 하나 놓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출입구에는 꽤나 점잖은 인상의 남자 두 명과 중년의 여자 한 명, 그리고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법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나는 맑고 투명한 피부에 다크서클이 희미하게 내려와 있는 소녀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내 소녀 시절이 생각났다. 그즈음 나는 주채무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늘상 눈가에 멍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어른 팔뚝만한 크기의 생선찜을 가운데 두고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었다. 벌써 취했는지 하나같이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방 안 구석 깊이 들어갔다. 장롱을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등 뒤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철제로 된 옛날식 밥상에 양푼이 비빔밥과 미역국, 김치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나는 소주 한 병을 시켜서 비빔밥을 안주 삼아 먹기 시작했다.

-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루하루를 그저 땜질하듯이. 미래도 없이…….

비빔밥과 소주를 씹어 먹으며 속으론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주를 반병이나 비웠을까. 등 뒤의 무리들이 나누는 얘기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엿들을 의지가 전혀 없었으나 그들의 말소리가 저절로 내 귀에 달라붙었다. 얼마나 잘 들렸냐하면 마치 그들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자 둘은 이 지역 대학의 교수들인가 보았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자는 젊은 교수의 부인이고, 소녀는 국악을 하는 대학생인 것 같았다. 여자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두 남자들이 몹시도 수다스러웠다. 민어찜을 앞에 두고 민어를 사고팔았던 파시(波市)가 언제 형성되었는지, 이 지역 사람들이 민어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 등 민어 시장의 부응 및 쇠퇴사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생선 한 마리 먹는 데에 그렇게 많은 말이 필요한가 싶었다.

나는 비빔밥을 한술 크게 떠서 와구와구 씹어 먹었다. 그때 젊은 교수가 씻김굿에 관한 흥미를 드러냈다. 나이든 교수는 이 학생이 씻김굿 전승자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 씻김굿 명인이신 한 선생님께 전수 받았지라.

분명 소녀의 것인데 세상사에 닳고 닳은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였다.

- 배우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부인이 물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무녀인 한 선생의 신딸로 입양된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상갓집을 자주 찾아다녔고, 망자의 저승길을 닦아주는 씻김굿 12마당을 3만 번쯤 부른 것 같다고 했다.

- 굿은 한 대목씩 배울 수가 없거든요. 할 때마다 가사도 달라지고, 무엇보다 연로하신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세요. 전체를 연행할 수는 있어도 한 대목씩 끊어서 시범을 보이는 것은 못하시거든요.

씻김굿을 배우려면 전체를 반복해서 배워야지 부분만을 배울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말이 인생은 전체를 살아보아야 알지 부분을 살아서는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 같은 인생도 끝까지 살아봐야만 알 수 있는 그 어떤 미래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몇 번을 살아봐야 인생행로의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할아버지에게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저 어린 것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부터 상갓집에 가 망자를 달래는 노래를 했다니, 아동학대가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소녀의 소리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 목소리는 그렇게 타고난 거예요?

부인이 또 물었다. 소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나는 소녀가 한 선생님을 따라 폭포수가 떨어지는 계곡에서 창을 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폭포가 이기나 소녀가 이기나 소리로 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녀의 목에서 동백꽃잎 같은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소녀는 제 목소리가 목이 쉬어도 계속 소리를 내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 성대에 계속해서 상처를 내서 굳은살이 쌓이게 만드는 거죠.

불현듯 곰팡이 핀 내 베란다의 박스가 눈앞을 스쳤다. 나의 상상력으로 그 박스를 복사해 ‘Ctrl+v’를 여러 번 누르니 박스는 어느 순간 베란다의 널찍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을은 물론 바다와 하늘도 내다보지 못하도록 두껍게 쌓인 내 굳은살의 이미지였다.

- 목이 아프진 않아요?

- 처음에 상처를 내기 시작할 땐 아팠는데, 이젠 아무 느낌이 없어요. 전혀 아프지 않아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막걸리 사발을 달라고 했고, 그것에 소주를 가득 따라 부었다. 꿀떡꿀떡 들이마시며 바닷가라선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씻김굿은 우리나라 최고의 굿입니다.

젊은 교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씻김굿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며 그것의 미학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강원도 강신무의 굿과 달리 세습무인 남도의 씻김굿은 정제되고 담백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 씻김굿 중에 ‘길닦음’ 한 대목 들려줄 수 있어요?

나는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순간 나의 등으로 시선이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학생을 술자리에 앉혀놓고 노래를 부르라고 갑질하다니. 그런데 나와 달리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들을 웃게 만들었다. 남도 사람들은 흥이 많아 노래를 안 시켜주면 화를 낸다고 나이 든 교수가 추임새를 넣었다. 음식을 나르던 할머니도 ‘야 끝나면 나도 한 자락 할란다.’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나는 비빔밥을 한 입 크게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손두부 한 접시와 소주를 추가로 주문했다. 어느새 내 상다리 옆에는 소주 3병이 비워져 있었다.

소녀가 소리를 시작하기 위해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었다. 뒤를 흘끔 돌아보았더니 나이든 교수가 장구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잠깐!

젊은 교수의 목소리가 다시금 끼어들었다. ‘거 참 말 더럽게 많네.’하고 나는 등을 돌려 한 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는 길닦음이 연행되는 상가의 한 장면을 아내에게 자세하게 묘사했다. 가로로 긴 하얀 옥양목 천으로 저승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그 위에 망자의 혼이 담긴 자그마한 상여를 올려 왔다갔다하며 부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눈앞에 그가 묘사한 장면이 선연히 펼쳐지는 것을 의식했다. 얼마나 선명했냐 하면, 내 방 한가운데에 하얗고 긴 옥양목이 베란다와 대문 사이에 깔려있고, 그 위로 곰팡이가 검게 피어나는 박스가 올라타 있는 장면이 저절로 그려질 정도였다.

저음으로 깊게 내리꽂히는 구음이 길게 이어졌다. 소녀의 허파로 들어간 공기는 굳은살이 두껍게 배인 성대를 진동시키고, 두 입술 사이에서 파열된 음파가 공기 중에 흩어진 미세한 입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안방은 물론 대청과 그 너머의 평상, 그리고 저기 바다 너머까지 소녀의 굳은살에서 나온 소리가 파동을 일으켰다. 나는 숟가락을 상에 가만히 내려놓고 밥 먹기를 멈추었다. 씻김굿 12마당을 통째로 3만 번쯤 부른 것 같다더니, 마치 3만 번쯤 윤회를 거듭한 이에게서 나는 웅숭깊은 소리가 들려왔다. 씻김굿이라는 소리는 그것이 생겨난 이후 3만 명이 넘는 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해 보내지 않았을까. 나는 소녀의 소리가 일으키는 파동을 통해 생의 모든 기억을, 아니 내 전생의 기억까지도 깨워낼 것 같았다.

(제에헤 보살이로구나. 제에헤 보살이로구나) 소녀가 들어온다. 느린 걸음으로 나의 방을 가로질러 베란다의 박스 앞에 선다. 어느새 하얗고 긴 옥양목 천으로 된 하얀 길이 베란다와 현관 사이에 깔린다. 박스는 강철로 된 큐브처럼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무여 나무여) 소녀는 나의 박스에 손을 얹고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울음 섞인 목청을 떤다. 그러자 박스가 서서히 공중에 떠올라 하얀 길 위에 선다. (어둔 길은 밝혀서 닦고 좁은 길은 널리 닦아 불쌍하신 금일 망제 새왕 극락을 가시옵소서) 박스는 천천히 대문으로 나아간다. 소녀가 박스가 나아갈 길 앞에 서서 애달픈 곡조를 이어간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에 이르자 박스가 멈춰 선다. 소녀는 굳은살이 두꺼운 성대를 간절하게 떨어보지만 박스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이승길도 사백 팔십리 저승길도 사백 팔십리, 구백 육십리 그 가운데 불쌍하신 망제님은 그 다리 건너 새왕을 가시오.) 소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박스를 향해 슬프다 못해 애원에 가까운 소리로 달랜다. 박스는 현관문으로 얼마만큼 나가려다가는 다시금 멈춘다. (길 거둬 가고 배 거둬 가세 길 거둬 가고 배 거둬 가세) 흰 길이 두루마리로 말리기 시작한다. 박스는 베란다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

방안으로 들어온 긴 햇살에 눈을 떴다. 모래알이 박힌 것처럼 목구멍이 깔깔했다. 습관적으로 베란다의 박스를 바라보니 간밤의 장면들이 벼락같이 뇌리에 꽂혔다. 만취 상태로 집에 들어온 내가 베란다와 현관 사이에 두루마리 휴지를 길게 풀어놓고 소리를 하며 박스를 내보내려 했었다. 꿈쩍도 않는 박스를 향해 노잣돈이 없어서 그러냐고 소리치면서 만 원권 한 장과 천 원권 두 장, 체크카드 등을 휴지길 위에 뿌리기도 했다. 박스가 움직이지 않자 9800만 원은 내 목숨을 팔아도 안 나온다고 우는 소리를 해댔던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폐와 휴지를 밟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술주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파란 지붕집 안채에서 비빔밥이 담겨 있었던 양푼에 내가 먹었던 것을 그대로 토해냈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내가 소녀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장면이 이어졌다. 소녀를 따라 소리를 했던 것도 같았다. 가사는 내가 즉흥적으로 붙였는데, 자식에게 사랑을 주기보다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중요했던 어머니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소녀와 그 일행들에게 주채무자인 그 사람이 우리 모녀를 어떻게 짓밟았는지 얼버무렸던 것도 같았다. 조금은 황망해하면서도 애처롭게 여기는 듯한 그들의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울을 보며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전날의 일이 후회되면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화장실을 나와 방안에 앉아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두 팔을 무릎에 얹고 앉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굳은살이 만들어낸 소녀의 웅숭깊은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야구공으로 가슴뼈를 마사지하다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책상 위의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신용정보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운이 좋게도 내가 면책 대상자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신호가 서너 번 이어지자 나는 서둘러 통화를 끊어버렸다. “나의 채무기록이 삭제되었느냐?”는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삽화=이지미〉

집을 나와 파란 지붕집을 멀리 피해 골목길을 내려갔다. 택시를 타고라도 해장국집을 찾아가고 싶었다. 빈집의 을씨년스러움도 담벼락의 시화들도 모두 무심히 지나쳐 항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곁눈에 달라붙은 빈 깡통의 움직임이 내 발목을 붙들었다. 붉은 갈색으로 변색된 베이키드빈스 깡통이었다. ‘설마 얼마 전 도랑에 내려놓았던 그 깡통은 아니겠지?’하고 깡통 가까이로 서서히 다가갔다.

녹슨 깡통 밑으로 가지런한 발이 뻗어 나오자 얼마 전의 그 소라게가 여전히 골목길을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도랑에서부터 물을 거슬러 오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소라게의 다리들이 건반 위의 손가락처럼 바삐 움직여 골목길을 내려갔다. 순간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소라게는 내게 ‘네가 만들어 준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내 길은 언제나 나의 뒤에 있다.’라고 말하며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항구까지 걸어가 택시를 탔다.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하냐!’ 도로를 달리는 내내 녹슨 집을 이고 기어가는 소라게의 잔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인근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앞에 내려 콩나물해장국을 사 먹고 장을 보았다. 벌써 여름이 되어 가는데도 화원에서는 상추·깻잎·고추·토마토·쑥갓 같은 식용작물의 모종을 팔았다. 불현듯 박스를 치워야만 베란다에 온실을 가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몸집보다 훨씬 큰 깡통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생명체도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스티로폼 박스를 주워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기 위해 대문 앞에 서니 등기우편 도착 알림 메모장이 가압류 딱지처럼 붙어있었다. 오래전 법원으로부터 받아본 적이 있었던 가압류 통보서가 뇌리를 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는 건 묘한 일이었다. 나는 전보다 훨씬 두껍게 튀어나온 가슴뼈를 매만지며 마음에도 굳은살이 쌓이는가보다고 생각했다.

메모장을 떼서 집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박스는 철거를 반대하는 시위대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위에 털퍼덕 앉았다. 그 자세로 빈 스티로폼 박스에 흙을 채웠다. 어느새 상추·고추·깻잎 등의 작고 푸른 것들이 베란다 여기저기에 깃발처럼 솟아있었다. 바질페스토 파스타에 루꼴라 샐러드, 모히또 칵테일은 아니더라도 삼겹살을 곁들인 쌈밥에 소주 한잔 정도는 먹을 수 있는 미래가 그려졌다. 참 오랜만에 다가올 시간이 기다려졌다.

박스를 밟고 올라가 항구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낡은 여객선은 언제나처럼 그대로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어선들은 정오의 햇살 아래에서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 소박한 몸집의 어선들이 닦아 놓은 금빛 물길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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