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진정 사랑했던 왕자

대각국사 의천 진영.(순천 선암사 소장)
대각국사 의천 진영.(순천 선암사 소장)

스님의 초상화를 ‘진영(眞影)’이라 합니다. 진영이란 ‘진짜 모습’, 그러니까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것이란 뜻이니, 오늘날의 ‘증명사진’에 해당합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겉모습 속에서 참된 것을 찾는다[以影尋眞]’는 멋스런 뜻도 있지만,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접어두겠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는 지금 대각국사 의천의 진영, 의천 스님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스님은 고려 초기인 1055년에 태어났습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지 137년 째 되던 해입니다. 스님이 살아계신다면 960세를 훌쩍 넘으셨을 터, 대략 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내 눈 앞에 펼쳐진 의천 스님의 초상화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습니다. 오래도록 찾지 않았던 고향집의 낡은 장롱에서 우연히 꺼내 든 조상님 사진을 보는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요? 이유는 아마 의천 스님 초상화 좌우 양쪽 끝이 습기로 얼룩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초상화도 조선 시대 후기인 1805년에 도일 스님이 중수한 거라고 합니다. 원본이 남아 있었다면 너무 많이 빛바래졌거나 훼손이 심해 의천 스님의 생김새를 짐작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근대사도, 조선 시대도 뛰어넘어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림 한 장으로 남은 의천 스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스님은 검은 빛깔의 나무 의자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습니다. 화가는 스님을 마주하고서 오른쪽으로 조금 비켜서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속 스님은 살짝 나이가 들었습니다. 얼굴형은 다소 넓적한데 눈·코·입이 한가운데로 모여 있습니다. 눈썹은 짙으나 빛이 바래서인지 구김 때문인지 눈썹 한가운데가 끊겨 있습니다.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잘 정리된 눈썹의 길이에 딱 맞추어 스님의 두 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눈매는 또렷한데 부리부리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눈이 아닙니다. 까만 눈동자가 바로 앞 대상을 또렷하게 응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반듯하게 두 눈을 뜨고 있지만 대상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 당신의 생각에 깊이 잠겨 있는 눈입니다.

의천 스님의 코는 복스럽기도 합니다. 얼굴 한가운데에 두툼하게 자리해서 좌우의 균형을 넉넉하게 잡아주고 있습니다. 코끝은 둥그스름하고 콧볼은 도톰합니다. 인중은 길지 않으며 그리 크지 않은 입술 위아래로 수염이 나 있고 다소 긴 턱 아래에도 수염이 자라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의천 스님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입니다. 어머니 인예왕후가 용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잉태했고, 자라면서는 영특함이 여느 사람들을 넘어섰습니다. 11살에 출가하였으니 왕자로서 누릴 만한 세속의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는 못했겠지요.

아버지 문종은 넷째 아들 의천보다 셋째 아들 희(熙)가 출가하기를 바랐지만, 권력을 향한 욕구가 컸던 형은 동생에게 출가 의무를 넘겼습니다. 김부식이 지은 의천 스님 비문에는, 어느 날 문종 임금이 왕자들에게 “누가 스님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의천 스님이 ‘자신이 출가할 뜻이 있다.’하였고, 부왕은 “기특하다.”며 허락했지만 어머니 인예왕후는 태몽의 비범함을 생각해서 참으로 안타깝게 여겼다고 합니다. 셋째 왕자는 훗날 조카인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 즉위한 뒤 동생 의천 스님을 적극적으로 후원해서 천태종을 개창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의천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부처님을 뜻하는 ‘대각(大覺)’이란 시호를 내려 동생을 기렸습니다.

의천 스님은 11세에 왕사(王師)인 난원(爛圓)에게 출가한 이후 15세 이른 나이에 승통(僧統)이 됐습니다. 승통이란 화엄종과 유가종의 교종(敎宗)에서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를 거쳐서 도달하는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그런데 왕자 신분이던 의천 스님은 승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승통의 승계를 받았다고 하니, 최고권력자 집안이라 출발부터 비범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출가했어도 평생 왕궁의 힘이 미치는 곳에서 지낸 스님은 수행자로서만 살기 보다는 세속의 흐름에도 민감하게 촉을 세우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조정에 화폐 제조와 유통에 관해서 아주 강력하게 청을 올린 일을 생각해보면 그렇지요.

다시 의천 스님의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스님의 눈·코·입 그리고 반듯한 이마와 다소 두툼하게 보이는 광대뼈, 입술 아래로 탄탄하게 내리뻗은 턱을 보자니, 이 분이 만일 스님이 아니라 왕궁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래서 혹시 왕위에 올랐다면 어떤 위정자가 되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국교가 불교였던 나라에서 왕자로서 출가하여 최고 자리인 승통에 올랐으니 어쩌면 승속의 경계를 무단으로 넘나들며 권세의 극치를 달리며 호사를 누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의천 스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세에 ‘사방에 흩어져 있는 불교문헌을 수집하겠노라’ 원을 세우고, 23세에 〈화엄경〉을 강설하는 법석을 시작해 24년간 강연을 닫지 않았습니다. 300여 권에 달하는 경론을 강의했고, 불전 300권을 번역했습니다. 나이 30세에 송나라로 구법하고자 조정에 허락을 구했지만 여의치 않자 제자 수개를 데리고 몰래 건너가 14개월을 그곳에 머물며 경이 있고, 논전이 있고, 스승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겸허하고 진중하게 가르침과 문헌을 청했습니다. 그 모습은 전직 왕자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간절한 구법승 그 자체였지요. 송나라에서 귀국한 스님은 쉬지 않고 불교문헌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분류했으며, 신미년(1091년) 봄에 남쪽 지방으로 다니며 찾은 책이 무려 4,000권에 달합니다.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시를 쓰고 편지를 나누고 깊은 사색으로 경전 내용을 탐구하고 제자를 가르쳤습니다. 이런 열정을 가진 분이 스님이 아닌 왕이 되었다면 어쩌면 의천은 고려조를 대표하는 이지적이고 철학적인 왕, 문학적인 왕으로서 자리매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흔히 고려를 떠올릴 때 ‘초호화판으로 타락한 불교’를 거론하지만 의천이 왕에 올랐다면 이런 평판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스님들의 초상화는 대체로 희끗한 수염이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년의 모습인데 의천 스님의 초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스님은 47세라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입적하신 까닭입니다. 스님의 초상화가 정확히 언제 그려졌을지 모르겠지만 스님의 문집에는 이런 시가 담겨 있습니다.

정교한 기예는 마음속에서 나오는 법
오명(五明)을 어쩌면 그리도 일찍 배웠는가.
나의 형체를 잘 그려주었으니
나의 도(道)도 함께 전해 주시게나.

- 〈대각국사문집〉 중에서

이 시에는 ‘학도 중에 나의 초상화를 그려준 자가 있었는데 그 필치가 묘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시를 지어서 보여주다.’라는 긴 제목이 달린 것으로 봐서, 스님은 초상화에 만족한 듯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자면 “아하, 11살에 출가하여 이날에 이르도록 구법자로 지내온 내 모습이 이렇단 말이지. 이 그림을 보는 이들은 내가 세운 원과 정진도 함께 느껴보았으면 좋겠구나.”하는 스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초상화 속 스님은 중년의 모습이지만 법을 구하고 문헌을 찾아내어 대장경 조판으로 완성하고자 생의 기운을 써버렸는지 그 눈빛에는 깊은 우물을 연상케 하는 텅 빈 적요가 흐르고, 얼굴 가득 무심함이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자꾸 이런 감상에 젖는 이유는, 화엄종을 개혁하고 천태종을 개창하는 거대불사를 진행하면서도 세속 왕권의 추이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생의 마지막 세월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저 부처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가르침을 담은 문헌이 모두 가지런히 모이기만을 원하며 살아온 출가수행자의 삶이지만 문득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버렸는가.’ 하는 쓸쓸한 심정도 스님은 자분자분 내비치고 있습니다.

머리칼이 왜 이렇게 희어졌는고./내 살면서 그만큼 나이 먹어서/
사계절이 교대로 바뀌는 법이니/다시 검은 머리칼은 생각 없다오.
머리칼이 왜 이렇게 희어졌는고./공부하느라 많이 애쓴 때문이지./
공연히 입언(立言)의 뜻만 품었을 뿐/붓 잡지 못한 것을 탄식하노라.
머리칼이 왜 이렇게 희어졌는고./전등(傳燈)한 자리가 타당하지 못해서/
강의하며 물에 그냥 비춰 보노라면/머리 가득 흰 서리가 보기 민망해.
머리칼이 왜 이렇게 희어졌는고./청산에 아직껏 은퇴하지 못해서/
다만 성주(聖主)의 시대를 만났기 때문이니/
나이 쇠하는 줄이야 어찌 몰랐으리오.
머리칼이 왜 이렇게 희어졌는고./모두 도가 없는 부끄러워서/
삼계의 길에서 방황하고 헤매며/봄날 못가에서 자갈만 주웠다오.

- 〈대각국사문집〉 중 ‘조낭중의 시에 화운하여’

스님은 말년에 이르러 자주 병을 앓았습니다. “내가 심장이 허로한 병[心勞之病]이 있는데 요즈음 그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경서를 볼 때마다 심장의 통증을 느껴서 학업이 황폐해지고 있다.”라며 법을 전할 힘이 없어 노심초사하는 속내도 시로 담았습니다. 그 와중에 화엄종의 계보를 정리해 정통성을 확고하게 세우고, 천태종 개창 작업을 마무리하셨지요. 하지만 1101년 8월에 병으로 누운 뒤, 그해 10월 5일 입적합니다. 초상화 속 스님은 귀가 유난히 크고 깁니다. 장수할 상이라지만 스님은 47세로 세연을 다했습니다.

의천 스님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불사는 이후 잊혀갑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고려 때 의천 스님이란 존재에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옛날 옛적에 왕자님이 살았는데, 아름다운 공주님을 만나…….’라는 동화 속 영웅이 아닌, 불교를 진정 사랑했던 왕자, 책을 좋아했고, 책을 모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으며, 진리를 이 땅에 또렷하게 구현하고자 종파의 계보를 단단히 세우느라 삶의 기운을 다 써버린 왕자가 고려 시대에 실제로 살았음을 이제부터라도 기억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다음 호부터는 의천 스님이 남긴 서간을 통해 스님의 삶과 사상, 불교에 대한 열정과 고뇌를 엿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대각국사 금란가사.
대각국사 금란가사.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부도.
개성 영통사 경선원 대각국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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