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뇌원차와 법안종의 천태학

뇌원차(腦原茶)는 900년대 중반 고려에서 기원한 차이고, 그 이름이 아주 특이하다. ‘뇌원차’란 이름이 다른 나라에서 쓰인 사례는 없고, 이름이 지어진 경위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뇌원차는 고려 초 혜거국사(惠居國師, 899~974)가 만년에 갈양사(현 화성 용주사)로 하산할 때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드린 예물로 처음 등장한다. 국사의 ‘하산’은 늙고 거동이 불편해진 국사를 조용한 절로 모시는 의식을 말한다. 하산을 하면 국가의 제전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예우는 철저했다. 또 같은 사원에 여러 시기에 국사를 하산시킨 사례도 없었다.

광종 시대의 기록은 약간의 금석문을 제외하면 사서의 기록이 매우 적다.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도 광종의 치세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후대의 최승로가 올린 상소문이 있다. 이 상소문은 ‘광종이 직접 맷돌에 차를 갈아서 행사에 올렸을 정도로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했다.’고 비판하였다.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여기서 언급된 차가 바로 뇌원차이다. 뇌원차는 사서의 기록이 제법 남은 제6대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대에 자주 등장한다. 성종은 공신의 장례에 부의(賻儀)로 뇌원차를 보냈고, 이는 차가 중요한 제물로 사용되었던 당시 상황을 엿보게 한다.

광종 시대 부의에 대한 자료가 남았다면 뇌원차란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팔관회나 연등회에도 빠지지 않고 차례(茶禮)가 등장하므로 뇌원차가 제물로 쓰였음을 짐작할 만하다. 뇌원차는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고형차(固形茶)이고 오늘날에도 전승되는 떡차[餠茶]나 엽전 모양의 돈차의 변형된 형태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가장 오래된 차나무인 운남성 임창향 죽청 고 차 수(香竹菁 古茶樹). 운남성농업과학원에서 공자보다 700년 앞서 자라기 시작하여 현재 3,200년이 되는 건장한 차왕수라고 감정하였다. 나무 높이가 10.6m, 나무줄기 둘레가 5.82m.
가장 오래된 차나무인 운남성 임창향 죽청 고 차 수(香竹菁 古茶樹). 운남성농업과학원에서 공자보다 700년 앞서 자라기 시작하여 현재 3,200년이 되는 건장한 차왕수라고 감정하였다. 나무 높이가 10.6m, 나무줄기 둘레가 5.82m.

뇌원차 기원의 시대적 배경

태조 왕건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종과 정종 두 임금은 정변 속에서 재위 기간이 짧았다. 광종은 이를 교훈 삼아 왕권의 기반을 굳히면서 태조처럼 26년간 재위하였다. 광종 시대는 양자강 북쪽 황하 유역에서 짧은 기간에 5대의 왕조가 바뀌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한다. 남쪽 양자강 유역에는 10개의 작은 나라가 북쪽 5대의 큰 나라와 종속관계로 맺고 있었다. 그러나 10국은 기원한 시기도 앞섰고, 국가도 훨씬 안정되었으며, 왕위도 여러 대를 계승하였다. 755년 당나라 현종이 안사의 난으로 몽진한 백년 지나 다시 양자강 유역에서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양자강 하류에서 절도사였던 전유(錢鏐)가 세운 오월(吳越)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가 지역 단위로 작은 국가를 세웠다. 이들 10국은 당나라가 망한 다음에도 70년 가까이 나라를 유지하였으므로 실제로 100년 이상 건재하다가 970년대에 이르러 송의 초기에 흡수되었다. 고려 태조와 광종 말기에 이르기까지 5대10국의 분열은 고려가 국제적 위상을 높이면서 군사적 통합에 이어 제도적 통일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뇌원차는 당나라 멸망 후 대륙이 분열되고 고려는 통일 후 왕권을 강화하던 시기에 생산한 고유한 차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이름의 명확한 기원조차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적어도 여러 가지 중요한 견해가 등장하였다. 먼저 뇌원차는 신라에서 차를 재식하여 생산한 이래 고려에서 확인되는 최초로 사용한 차 이름이었다. 고려가 후삼국 통합 후 공신세력을 누르고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던 시기에 차의 생산과 가공에 힘썼고 국왕이 직접 사용한 고유한 차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뇌원차보다 늦지만 용단(龍團)은 뇌원차가 기원한 후 건국한 송나라 때 양자강 유역에서 생산한 왕실의 차였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예산의 서남 끝자락에 위치한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이 석탑에서 송의 용단이 나와 이를 보물처럼 귀히 다뤘던 사실이 전하지만 뇌원차가 실제로 발견된 사례는 전하지 않는다. 용단은 원반 모양의 보이차를 연상시키고 모양에 대한 그림도 현재 전한다. 고려의 뇌원차가 고형차였다면 발효차이고, 장기간 보관이 용이한 모양이었다고 짐작된다. 고려의 뇌원차는 분량을 나타낼 때 ‘각(角)’이란 단위를 사용했다. 10각의 뇌원차가 1근의 대차(大茶)와 같은 무게로 짐작된다. 이를 고려할 때 지금도 형태가 남아있는 푸얼차(普洱茶)의 3배 크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대차는 원형의 큰 차로서 같은 고형이고, 오래 지날수록 건조와 발효를 통하여 품질이 향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하여 그야말로 비바람을 맞으면서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국왕이다. 젊은 시절 궁예의 부하 장군일 때부터 여러 전장에 투입되었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난세의 장군으로서 안정된 생활은 불가능하였다. 전장에서 그나마 우호적인 군사연합을 구축하려는 토호가 딸을 바치면 그곳이 현지의 처가였고 가정이었다. 그러나 떠나면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즉위한 다음에 세력을 키우기 위한 정략결혼이 빈번하였지만 모두가 난세를 살아가는 방편이었다. 결국 왕위가 안정된 다음에 불러들여 서열을 갖추어 다처의 형태로 포용하였다. 태조는 통합을 이룬 후 8년을 더 살았다.

태조 왕건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인 중에는 짧은 기간을 함께 보내고 까마득하게 잊혔다가 비구니로 출가한 사례도 있었다. 즉위 후 문득 생각이 나서 옛 여인을 찾아본 결과 출가를 하였으므로 갸륵하게 여겨 환속시킨 후 부인으로 대우한 사례가 두 번 있었다. 장군으로 여러 전장을 누볐고 즉위 후에 공산전투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던 왕건은 지금의 안동 고창전투에서 토호들의 도움으로 전세를 만회하였다. 태조는 여러 토호의 딸을 비빈과 부인으로 차등을 두어 모두 포용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 통념이 이런 상황을 관대하게 바라보았다. 고려 사회는 일부일처제였고, 여성의 지위는 조선시대 보다 훨씬 높았고, 재산상속도 균분이었다. 다만 국왕의 여러 비빈이 있었고 난세에 장군으로 국가를 비난보다 아량으로 포용하며 관대하게 평가를 하던 시대였다.

고려에서 차는 고급 음료였다. 수요는 인구와도 관계가 있었지만 고급차는 생산지보다도 수도인 개경이 최대 소비지였다. 특히 왕족과 귀족인 공신의 수요가 많았다. 뇌원차는 국가의 제전이나 왕실의 제의는 물론 고급 관인의 제의에 사용되었다. 국왕이 공신의 상례(喪禮)에 부의로 사용하는 고부가가치의 귀한 특산물이었다. 이를 관장한 기구로 후대에는 ‘차방(茶房)’이라 불리는 국가기구가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의 뇌원차는 국가와 왕실이 위탁한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소(所)나 부곡(部曲) 등 특수한 직할지역에서 위임받아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용단을 눌러 만들 때 사용하는 틀의 모양. 왕실을 의미한 용과 봉황을 그린 문양이 있었다. 고려 뇌원차는 송의 용단보다 먼저 기원하였으나 제조방법은 굳은 고형차라는 점에서 상통하다. 어떤 문양의 포장을 썼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았다.
용단을 눌러 만들 때 사용하는 틀의 모양. 왕실을 의미한 용과 봉황을 그린 문양이 있었다. 고려 뇌원차는 송의 용단보다 먼저 기원하였으나 제조방법은 굳은 고형차라는 점에서 상통하다. 어떤 문양의 포장을 썼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았다.

천태종 포함한 고려 4대 종파

고려 태조는 불교계에 대해서 특정 방향을 설정하고 강요하지 않았다. 신라의 경우 국가에서 주밀(綢密)하고 효과적으로 통치하였다. 황룡사나 불국사의 남아있는 기록으로 주지의 임명이나 중요 경전과 사찰관리에 대한 특성이 고려에 와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기부터 불교계는 사찰에서 독자적으로 주지직의 승계나 기존의 대사원을 중심으로 연결된 승계를 강화하였다. 여기에는 종파의 요소가 강화되었음이 확인된다. 고려 태조는 현실의 상황을 중요시하고 이를 다원적으로 경쟁시켜 새로운 수도인 개경에 중요한 종파의 사원을 창건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몇 개 종파로 통일시켰다. 신라 때는 황룡사의 주지가 전국의 승직 임명을 관장하는 국통(國統)으로 불렸다. 이에 비해 고려 불교계는 국사의 선발도 공개적으로 추천을 받았고 국사의 권한도 국통과는 달랐다. 국사는 주지 임명이나 사원의 주지를 임명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다. 일반 과거보다 승과(僧科)가 앞서 열려 열띤 토론을 시행하면서 고승의 도력을 공개적으로 경쟁시켰음이 확인된다.

고려의 법안종은 광종 시대의 부족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하여 탁본의 법첩(法帖)에서 찾아낸 금석문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한 후 36년이 지나 세운 지금의 경북 칠곡군의 선봉사의 ‘천태시조 대각국사비음기(碑陰記)’에서 확인되었다. 이 비음기는 미술사학자로 금석문연구에 기초를 세운 초우 황수영 박사의 소개로 알려졌다. 필자는 비음기를 더욱 정밀하게 판독하여 고려 천태종의 출발을 알리는 가장 중요한 금석문으로 활용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고려불교사에 천태종이 더해져 3대 종파에서 4대 종파로 자리 잡았다는 근거가 되었다.

선봉사 비음기는 고려 중기의 불교 종파가 천태종을 합쳐 4대 종파 시대를 열었다는 증거다. 이 비음기의 판독으로 고려불교사의 체계가 바뀌었다. 이보다 앞서 통설처럼 암송하였던 오교구산(五敎九山)은 후에 가공된 체계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입증되었다. 고려 전기 불교계는 국사와 왕사의 책봉이나 왕실의 진전사원(眞殿寺院, 왕이나 왕비를 제례를 위해 세운 절)에서 보더라도 3대 종파였다. 선봉사 대각국사 비음기는 고려 후기에 불교계가 4대 종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법안종에 기울었던 5대 산문의 선종이 천태종의 기반이 되었다는 가장 뚜렷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더욱 중요한 점은 고려 광종 시대에 법안종에서 유학하였던 고승들이 대각국사의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바탕으로 화엄사상의 원융사상에 흡수되었고, 법안종에 기울었던 선종의 5대 산문이 천태종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봉암사지증대사비(鳳巖寺智證大師碑)’에 수록된 14산문에서 5산문이 고려 중기에 천태종으로 빠져나갔고 남은 9산문에서 고려 선종이나 조계종사가 새롭게 정립되었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고려 천태종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않으면 고려불교사는 물론 한국불교사의 체계도 제대로 세우기 어렵다. 고려의 수선결사(修禪結社)에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불교의식으로 지었다고 입증된 ‘선문조사예참의문’은 선종구산설이 천태종이 확립된 다음에 천태종으로 빠져나간 5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문의 기반을 소급하여 서술한 후대의 체계였다. 근거도 없는 후대의 기록을 소급하여 정설로 행세하였던 가설에 불과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오교구산설이란 한국불교사에서 가공의 체계이고 벌써 바로 잡아야 했던 대상이었다. 아직도 한국불교사는 뼈대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개설서가 적지 않다.

좌측부터 법안문익 선사, 천태덕소 선사, 영명연수 선사의 진영. 
좌측부터 법안문익 선사, 천태덕소 선사, 영명연수 선사의 진영. 

법안종과 천태학 그리고 뇌원차

고려 광종은 유능한 관인을 선발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처음 실시하였지만 승과는 이보다 앞서 기원하였다. 금석문을 통하여 확인한 결과 불교계의 자율적인 개선을 통하여 승과를 단계별로 나누는 등 정비하였다. 선발된 고승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이론과 수행을 발전시켜 종파별 특색이 강하였다. 이미 화엄종과 유가종이 교종을 대표하였고, 남종선을 바탕으로 선종과 함께 조계종이란 용어가 고려 초기부터 쓰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조계종’이란 남종선의 조사인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이 법을 펼쳤던 보림사의 조계산을 강조하고자 붙여진 종파이름으로 남종선의 정통임을 밝히려는 의도로 고려에서만 쓰였다. 삼국의 고승은 수와 당나라에서 유학한 다양한 종파보다 학파에 탁월한 고승이 활약하였다면 신라 말기에는 선승이 고려 광종 때는 10국의 하나인 오월 지역에 법안종으로 유학한 고승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당나라 말기의 선종은 북종선이 먼저 주도하였고 다음에 남종선이 풍미하였다. 북종선은 황하 유역에서 찾아지지만 당나라 말기에 맥이 끊어졌다. 반면 남종선은 양자강 유역에서 성행하였다. 양자강 유역의 하류인 오월은 남종선의 일파인 법안종이 유행한 지역이다. 법안종은 정치는 물론 경제와 사상적 특색을 지니고 5가(家) 중 마지막에 성립되었고 기존 남종선과 달리 불교사상의 통합성이 강하였다. 고승으로 오월의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6)가 대표자였다. 영명연수는 만년에 양자강 남쪽의 영명사(永明寺)에서 15년간 주석하였고 법명과 함께 붙여진 이름이다.

영명연수는 관직에 올랐다가 늦깎이로 출가하였다. 법안종의 개창조인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을 계승하였던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에게 출가하여 그를 계승하였다. 이들 세 분의 고승은 점층적으로 다양한 사상을 포용한 특징이 있었다. 법안문익은 선과 계율을 강조하였고 기록이 많이 전하지는 않으나 천태덕소를 제대로 평가한 안목을 지녔다. 덕소는 천태종의 장점을 수용하였고 영명연수는 그가 정리한 〈종경록〉 100권에서 보듯이 교학과 선과 정토사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파의 사상을 통합하여 선종이 이후 불교를 주도하는 기초를 세웠다.

고려의 선종사에서 광종 시대는 불교제도를 확립한 중요한 시기였고 법안종에서 유학한 선승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석문을 제외하면 역사기록이 너무나 부족하다. 원주 현계산 거돈사는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 930~1018)이 주석한 도량이다. 이외 당시 법안종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승려들은 산청 지곡사에 주석한 진관선사 석초(釋超, 912~964), 도봉산 영국사에 주석한 혜거(慧炬)국사(갈양사로 하산한 惠居와 다름), 합천 영암사에 주석한 적연국사 영준(英俊, 932~1014) 등이 있다.

오월은 차가 많이 생산되던 지역으로 당시 고려의 차가 법안종에 특별한 관계를 생산되었다는 글이나 사료는 없다. 뇌원차의 이름이나 가공에 영향을 주었다는 근거는 아직 국내 연구자들이 입증하지 못하였다. 뇌원차란 이름의 내력이나 생산지와 가공에 대한 부분은 신라 대렴(大廉)이 지리산 남쪽에 차를 처음 재식하였다는 시배지(始培地)에 대한 견해만큼이나 다양하고 치열하다. 뇌원차의 생산지에 대한 논란과 복원이 다양하게 시도되면서 더욱 기존 견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런 현상이 신라에서 차를 재식한 시기와 성행한 시기 그리고 차보다 앞선 전통 음료 등 여러 분야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가 되었다.

차와 선종은 관계가 깊다. 차와 선종이 당의 궁중과 조우한 시기는 적어도 8세기 중반으로 올라간다. 2세기 후에 고려에서 뇌원차가 나타났고 성종과 현종 시기에 절정에 올랐다. 이후에도 뇌원차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이를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한 편의 글은 너무나 부족하다. 더욱이 뇌원차와 선종과의 관계도 선종산문에서 출발한 기원과 함께 규명할 과제이다. 나아가 한국사에서 고려불교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제대로 정리하는 일도 중대한 과제의 하나이다.

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 교수와 이탈리아 나폴리 동양학대학교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LA캠퍼스에서 강의하였다. 북경대학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하였다. 두계학술상·출판문화저작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고려불교사연구〉·〈한국중세불교사연구〉·〈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지공선현〉·〈한국의 중세문명과 사회사상〉 등 다수의 저서와 30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사 진= 문화재청〉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사 진= 문화재청〉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탁본.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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