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풍요 상징…두 마리 토끼 잡는 해 되길”

십이지신 중 토끼, 〈사진=삼각산 도선사 청담유물관〉
십이지신 중 토끼, 〈사진=삼각산 도선사 청담유물관〉

2023년 계묘년은 검은 토끼의 해다. 십이지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토끼는 옛 사람들에게 역경을 슬기롭게 대처하는 동물이자, 장수·풍요 등을 상징하는 길상(吉祥)의 존재로 인식됐다. 계묘년 새해를 맞아 ‘토끼’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호랑이의 힘찬 기세로 시작했던 2022년이 저물고 ‘검은 토끼의 해’인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토끼는 십이지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동물이다. 올해는 천간(天干)의 ‘계(癸)’가 흑색을 나타내 ‘검은 토끼의 해’로 불린다.

묘(卯)의 방향은 해가 떠오르는 정동(正東), 달은 음력 2월, 시간은 오전 5~7시를 나타낸다. 토끼를 의미하는 한자 ‘卯’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다. 묘월(卯月)은 만물이 땅을 밀치고 나오는 봄을 나타내며, 농경사회에서 한 해 농사의 시작과 관련된 중요한 시기로 여겨졌다. 또 묘시(卯時)는 아침을 여는 새벽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토끼는 ‘시작’의 의미와 함께 만물의 생장(生長)·번창(繁昌)·풍요(豐饒)를 상징하는 동물이 됐다. 또한 토끼의 강한 번식력은 다산과 번성·불로장생을 의미한다.

친근하고 영민한 동물

옛 사람들은 토끼의 생김새와 행동 습성에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부여했다. 양옆을 향해 위치한 토끼의 눈은 360°의 시야각을 갖는다. 또 빛에 대한 감도가 사람보다 8배 높아 어두운 곳에서도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다. 판소리 ‘수궁가’에 ‘토끼가 눈이 밝아, 별호를 명시라 하옵기를’이라는 구절에서 표현되듯이, 토끼의 눈을 ‘명시(明視)’로 칭했다. 또 토끼의 동그랗고 빨간 눈은 초식동물의 경계심으로 여겨, 불안한 모습을 ‘놀란 토끼 눈’이라고 표현했다.

토끼의 입은 작고 윗입술이 콧구멍에서부터 세로로 찢어져 내려온 시옷(ㅅ) 모양이다. 모양새가 구순구개열과 비슷해 세로로 갈라진 입술 모양을 ‘토순(兔脣)’·‘토결(兔缺)’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임산부가 토끼 고기를 먹으면 토끼의 입모양을 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금기가 생기기도 했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서 오르막길을 재빠르게 뛰어오른다. 쉴 새 없이 쫑긋거리는 크고 긴 귀로 천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민첩하게 도망간다. 서양에서는 〈이솝우화〉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통해, 동양에서는 ‘토끼의 기세’라는 의미의 사자성어 ‘탈토지세(脫兎之勢)’를 통해 토끼의 민첩성을 나타냈다.

오르막을 잘 뛰어오르는 특징 때문에 토끼가 등장하는 꿈은 대개 길몽(吉夢)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토끼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경박하다고 여겨, 정월의 첫 토끼날[卯日]에는 언행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는 풍습도 생겼다.

과거 한반도에는 주로 산토끼가 서식했다. 산토끼는 대부분 갈색·회색털을 가지고 있어서, 조상들은 가끔 보이는 흰털의 토끼를 특별하게 여겼다. 조선후기 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 ‘토끼는 1,000년을 사는데, 500년이 되면 털이 희게 변한다[兔壽千歲 五百歲毛變白].’는 기록을 남겼다. 토끼의 흰 털에 ‘장수’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 회화인 ‘화조영모도(花鳥翎毛圖)’에 묘사된 토끼에 흰색 털이 많은 이유도 이러한 인식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다정한 토끼 한 쌍을 그린 ‘쌍토도(雙兎圖)’는 부부애와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며, 매가 토끼를 바라보는 ‘추응토박도(秋鷹兎搏圖)’는 새해를 축하하는 세화의 대표 주제다. 민중은 토끼를 통해 한 해의 풍요와 행복·건강 등을 기원했다.

토끼는 굴을 파고 그 안에 사는데, 한 번에 세 개 이상의 굴을 파는 습성이 있다. 이는 초식동물인 토끼의 생존전략일 테지만 민간에서는 민첩하고 영민한 동물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관련 설화에서는 일반적으로 토끼를 약하지만 지혜로운 자로, 호랑이를 강하지만 어리석은 자로 표현했다. 또 판소리계 고전소설인 〈별주부전〉에서 토끼는 힘없는 민중을 대변하며, 권력자인 용왕을 지혜로 호기롭게 골탕 먹이는 승리자로 나타난다. 이는 토끼처럼 약한 서민이 꾀와 기지를 발휘해 부패한 권력자를 효과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민중의 바람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경전서 ‘보시·희생’ 상징

불교 경전에서 등장하는 토끼는 주로 ‘보시’를 위해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헌신적이고 선한 존재로 묘사된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경(本生經)〉에는 이러한 토끼의 이미지가 잘 담겨있다.

옛날 어느 숲에 토끼와 원숭이·자칼·수달이 살고 있었다. 품성이 너그러웠던 토끼는 세 동물에게 진리를 가르쳤고, 동물들은 숲에서 오계를 지키며 정진했다. 어느 날 토끼는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보고 동물들에게 “포살일(布薩日)을 맞아 수행자에게 공양할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수달은 물고기 7마리, 자칼은 도마뱀과 우유, 원숭이는 망고를 가져왔다. 풀을 주식으로 삼는 토끼는 인간에게 공양할 수 있는 음식이 없어 ‘스스로를 보시하겠다.’고 서원했다.

이 모습을 본 제석천(帝釋天)은 수행자의 모습으로 이들을 시험했다. 수달과 자칼, 원숭이는 흔쾌히 자신들이 준비한 음식을 공양했다.

그러자 토끼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털에 붙은 벌레들을 살리기 위해 몸을 세 번 턴 뒤 주저하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제석천이 피운 불은 차가웠고, 한 가닥의 토끼털도 태우지 못했다. 제석천은 “너희들의 공덕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한 뒤, 중생들에게 이러한 공덕을 알리고자 달에 토끼 형상을 새겼다.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토끼는 석가모니 부처님, 수달은 아난다, 자칼은 목건련, 원숭이는 사리불의 전생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인도 설화에도 등장하는데, 설화가 불경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의미가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또 불교의 전래과정에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토끼의 보시’ 이야기 등으로 일부 각색되어 알려졌다.

이외에도 〈보살본연경(菩薩本緣經)〉·〈잡보장경(雜寶藏經)〉에 굶주린 수행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보시한 토끼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역사 속 토끼와 유물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토끼는 고구려 6대 태조왕 25년에 처음 등장한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태조왕본기’에는 ‘부여국에서 온 사신이 뿔이 3개 달린 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고, 태조왕은 이들을 상서로운 짐승이라 여기며 사면령(赦免令)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의 명승 ‘토끼비리’의 지명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길을 잃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며 길을 안내해 ‘토천(兎遷)’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다.

고려 현종 2년(1011년) 5월에 서경(현 평양) 사람이 하나의 머리에 두 개의 몸이 달린 토끼를 왕에게 진상했고, 제26대 충선왕 원년(1309년)에 토끼가 궁궐 내 수창궁(壽昌宮)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전한다.

고구려 고분벽화(덕화리 2호분)와 통일신라 수막새, 고려시대 동경(銅鏡) 등 토끼가 등장하는 유물도 다양하다. 12세기에 조성된 고려시대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의 받침다리는 토끼모양이다. ‘토끼 같은 자식’이라는 말처럼 부부애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창덕궁 대조전 굴뚝, 경복궁 교태전 뒤뜰 석련지의 건축물에 토끼 형상이 새겨져 있다.

사찰의 전각·벽화 등에서도 다양한 토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인 순천 선암사 원통전의 ‘투조모란꽃살문’ 하단에는 달에서 방아를 찧는 토끼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또 서울 화계사 나한전 벽화에는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건네는 토끼의 모습이, 김제 금산사 보제루에는 누운 자세로 건물을 받치고 있는 한 쌍의 토끼가 묘사돼있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천불보전·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내부 창방·양산 통도사 지장전 내벽 등에서도 토끼 형상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그림·자수·도자기·베갯모·보자기 등 다양한 공예·조각품에서 토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민중이 저마다의 염원을 토끼 형상에 담아 곁에 두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토끼와 관련해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모두 놓친다.’는 속담이 있다. ‘욕심을 부려 여러 일을 한 번에 처리하다 보면 모두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한 번에 두 가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두 마리 토끼를 잡다.’로 사용되고 있다. 새롭게 밝아온 계묘년에는 번영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의 기운을 가득 받아 각자의 목표를 모두 성취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한다.

구례 화엄사 구층함 천불보전 지붕 밑의 토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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