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잊히는 생명의 소멸
이태원 참사 계기로
생명 존엄 되새겨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샌님 같은 젊은 주인과, 그와 정반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친 바다 같은 늙은 조르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끝없이 문자로 인생을 탐구하려는 주인에게 그러지 말고 그냥 인생을 살아버리라며 조르바가 쉬지 않고 조언하고 채근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데, 어느 날, 이 젊은 남자에게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마을의 젊은 과부를 보고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젊은 과부는 은근히 마을에서 적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 청년들이 그녀를 향해 몸이 달아오르고 애를 태워도 꿈쩍하지 않는 도도함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일은 증오의 화신이 되어버린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 앞마당에서 그 젊은 과부의 숨통을 조이게 됐다.

모두가 독 안에 든 쥐처럼 바들바들 떠는 그녀의 비참한 종말을 기다리고 있던 바로 그때 딱 한 사람, 조르바가 뛰어 들어 칼을 든 사내를 힘겹게 물리쳤다. 간신히 숨을 돌리고 그곳을 떠나려던 순간 또 다른 마을 남자가 단칼에 그녀를 해치웠다.

바들바들 떨면서 살 길을 찾던 과부는 조르바 바로 옆에서 단칼에 숨통이 끊어졌고, 눈엣가시 같은 원수를 치워버려 속이 시원해진 마을 사람들은 그 길로 흩어졌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젊은 과부를 살리지 못한 조르바의 긴 탄식이 이어지는데, 그 중 한 문장이 이렇다. “이 땅이 그런 몸을 가꾸는데, 대체 몇 년의 세월을 보내 왔을까요.”

전 세계 인구 몇 명, 아시아 인구 몇 명, 한국의 인구 몇 명, 지난 주 교통사고 사망자 몇 명, 노령인구 몇 명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느 사이 숫자로 존재하는 생명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20221029일 서울 이태원 참사 희생자는 그저 158이라는 숫자로 각인되었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그 158개의 생명, 158개의 몸을 피우고 키우는데 이 땅과 세상은 어떤 공을 들여왔던가. 그 숫자를 해체해 보자. 목숨 하나씩 하나씩이렇게 헤아려보자.

들고 나는 방향을 가르는 선 하나만 진즉에 준비했다면, 비상시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 정도는 들릴 수 있도록 업소의 음악소리라도 통제했다면 온 세상이 공을 들여 키워낸 목숨을 그리 무참하게 떠나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세상에는 지금도 누군가가 숨을 거두고 있다. 누군가는 억울하게 죽고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죽고 누군가는 죽는지도 모르게 죽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명의 소멸을 숫자로 만나고 잠시 ! 저런하며 놀라지만 이내 살아가는 일을 이어간다.

오계와 십악업에서 가장 앞자리에 오는 항목은 불살생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악한 행위라 해도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빼앗는 일보다 더 할 수는 없고, 세상에 아무리 소중한 것이 있다 해도 생명보다 더 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귀하고 중한 것을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걸까. 우리 이렇게 쭉 살아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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