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형상은 모두 마음에 의지하여 세워집니다.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깨끗한 자성 위에 경계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른 바 정혜(定慧)가 비추어 또렷하고 고요하고 맑게 깨어서 작용하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견해를 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고정돼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일이 허다합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무상(無常무상(無相)이란 고정된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묻혀 현실을 망각하고 산다면 허황된 삶과 진배 없습니다.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과거의 허상에 빠져 지금의 나를 가두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견해를 좇는 대신 심법(心法)을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심법은 분별을 만들어내지 않을뿐더러 진여의 본성에 군더더기를 입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릇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속(眞俗)과 범성(凡聖)의 차이도 없습니다. 분별도 없거니와 차별 또한 두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허망을 경계하고 진실의 깨달음을 추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불교는 비진리, 거짓과 환상의 가설로부터 눈을 뜨게 하려는 종교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삶과 진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이러한 가르침에 반하여 유교에서 불교에 귀의한 이가 바로 당()나라의 이태백입니다. 대시인이자 유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태백은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벼슬을 살았습니다. 당시 그는 잠서(潛書)를 저술해 세상에 널리 유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불교를 극력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태백은 설숭명교(契嵩明敎) 스님 자신이 저술한 <보교론(輔敎論)>을 가지고 논변을 벌이다 깨친 바가 있어 처음으로 불경을 구입해 탐독했습니다. 그리곤 크게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교설은 <반야심경> 한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불도를 쉽게 알 수 있겠는가?”

태백은 이후 불교에 귀의해 청련거사(靑蓮居士)라 이름하고 살았습니다. <반야심경>54구절 267자에 불과하지만 <대반야경> 600권의 궁극적인 이치를 모두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심법의 요체였으니 태백이 이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불교에 귀의한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은 고정된 형체나 모양이 없습니다. 마음은 자취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찾는 일은 환상입니다. 허망한 경계를 좇는 일인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은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섭니다. 언제나 담담하고 고요한 경지를 구축합니다.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마음은 외물(外物)에 감응되어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도 되고, 반대로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에 물든 것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표현합니다. 그러기에 망심을 끊어버리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회복해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은 주관적 관념의 실재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차릴 때 환상과 거짓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면 망상으로 빠져 버리게 됩니다. 망상에 사로잡힐 때 문제는 사회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미국 뉴욕 버펄로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도 한 젊은이의 망상에 의해 비롯됐습니다. 미국 검찰은 사건 조사 결과 총기난사의 범인이 흑인이 백인을 몰아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이렇듯 망상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망상은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이란 점에서도 반드시 극복돼야 할 요소입니다. 감정으로 뒷받침된 주관적인 확신을 가지고 신앙처럼 받아들이므로 버펄로 총기사건과 같은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이라면 망상 대신 지혜를 증장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를 보게 하는 힘이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된다는 점을 잘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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