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앞이 창창하다.
햇빛이 잘 들끼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졸업식 날이다. 대학 졸업이라니. 경남백일장에 당선돼 무시험으로 들어간 숙명여대 국문과는 내 인생의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첫 출발을 하게 해주었다. 1964년 5월 시인으로 등단을 했고, 1965년 2월 25일 졸업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졸업식에 참석한 친구들도 흥분상태였다. 분위기는 새로운 사회에 진출하는 입학식 마냥 뜨거웠고, 간혹 우는 친구도 있었다.

명동과 남동생

대체로 나의 대학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불안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꿈을 향해 돌진하는 젊은 열기는 그 누구 못지않게 뜨거웠다. 즐거웠고, 꿈 맛을 온몸으로 맛보았다고 해야 옳다. 미니스커트도 입어보고, 높은 하이힐도 신어 보았다. 그 차림으로 명동을 할 일 없이 돌아다녔으니 ‘주름을 잡았다.’고 할까? 어스름이 내리면 친구들과 OB캐빈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스로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은 출렁거렸고 파도를 탔다. 모든 것을 해 보았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고 모자란 여대생은 그 당시엔 딱 그렇게 생각했다.

“다 물어봐,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세상도 이치도 철학도 모르면서 허깨비처럼 까불어 대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사흘 밤을 새우며 시랍시고 노트를 채웠으니 언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해 보겠는가? 숙명여대 대학신문에는 자주 내 시가 실렸다. 대학 4학년 때는 ‘자살론’이란 어마어마한 주제의 산문도 실었다. 신바람이 났고, 멋을 부렸고, 상상력을 온몸에 바르고 상상력을 밥으로 먹었다. 그렇게 대학생활은 나를 키웠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보내 준 등록금은 참으로 긴요했다. 덕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미래를 구상하는 열정과 불확실한 멋과 성실을 쌓을 수 있었다.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몇 밤을 새우며 시를 쓰면서 문학의 바다에 뛰어들었고, 세상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게 보는 안목도 넓혔다. 그러다 국문과 학생이라면,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커피를 많이 마셔야 한다고 생각해 하루에 열 잔을 마시고 배탈이 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겐 떼어낼 수 없는 혹이 있었는데, 바로 함께 자취를 하던 남동생이다. 얼마나 놀기 좋은 때였나. 그런데 친구들과 명동을 걷다가도 남동생에게 저녁밥을 해 먹이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다. 남동생은 어머니에게 생명이었다. 아들 하나를 한국전쟁 때 먼저 보내고, 어머니는 남동생에게 전 생애를 걸었다. 그러니 남동생은 어머니에게 목숨이고, 자존심이고, 미래였다. 그 보물 같은 아들을 내게 맡기고, 아침이면 주인집으로 전화를 했다.

“오늘은 돼지고기 넣고, 김치찌개를 해라.”

늘 메뉴가 전달되었다. 놀고 싶고 또 놀고 싶은 대학 4학년. 나는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차려준 후 다시 외출한 적도 많았다. 내가 생각해도 ‘남동생의 돌봄’은 거역할 수 없었기에 순하게 따랐던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돌아갔다. 제대로 안 된 것은 연애뿐이었다. 완전 실패였다. 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지만, 내 오만은 그 남자를 떠나보내게 했다.

대학 시절, 내 거만과 오만은 하늘을 찔렀다. 남자는 천지에 쫘악 깔렸다고 생각하며, 얕보고 건방지게 굴었다. 한 남자가 매일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의과대학생이었다. 열 번 머리를 굽히면 한 번쯤 만나줬다. 계속 찾아왔다. 잘생기진 않았지만 품위가 있었다. 그 남자는 동네 짜장면집이 아니라 소공동 반도조선아케이트 스카이라운지 같은 곳에 날 데리고 갔다.

첫 연애

사실 난 그때 ‘촌티’를 풍기고 있었다. 스카이라운지를 처음 갔을 때, 그가 화장실을 가리키면서 손을 씻고 오라고 했다. “아뇨.” 나는 단번에 거절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별놈이 다 있네. 여자화장실 가는 것까지 가르치네.’ 그리고 탁자 위에 앉아 메뉴를 주문받으려는 직원에게 “물수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남자가 당황하면서 “여긴 물수건 주는 곳이 아니야.”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제야 왜 손을 씻고 오라고 한 건지 알았다. 평소 내가 다니던 곳과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내부는 웅장했고, 창 너머로 시내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였으며, 멀리 남산도 바라보였다. 무려 12층이었다.

나는 조금씩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메뉴를 주문받던 직원이 다시 와서 “어제 아버지께서도 다녀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남자는 어물어물 넘겼다. 잘 아는 관계였고, 가족이 자주 이곳을 오는 것 같았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는 나와는 부류가 달랐다. 나는 차츰 그 남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 남자가 차원이 다른 부자라는 점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다. 당시 1960년대 초에는 옛날 미도파백화점 옆에 상업은행이 있었고, 그 은행 뒤로 동굴바가 있었다. 동굴로 만든 집이었는데 1인분에 요즘 돈으로 15만 원쯤 했다. 내 마음이 완전, 아니 많이 흔들린 계기다. 내 사치성이, 허영이 움직인 것이다. 나는 재물도 큰 매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같이 수원 딸기밭에도 갔다. 그는 제대로 연애조차 안 했지만 나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찾아왔고, 날마다 효창공원을 걸었고, 날마다 나에게 애걸하듯 했다. 손 한 번만 잡자고 해도 뿌리쳤다. 그렇게 건방지고 매몰찬 여자를 그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김남조 선생님이 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숙대 앞 태양다방에서 오후 3시에 약속을 잡았다. 함께 김남조 선생님 댁에 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흥분했고,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 약속은 우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그는 갑자기 시체 해부시간이 잡혔고, 시간에 맞춰 나올 수 없게 되었다. 1시간 20분을 기다렸다. 왜 가버리지 않았느냐고? 김남조 선생님 댁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약속이 되어 있었으니까. 화가 하늘까지 닿았고, 그가 다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인간적 언성으로 몰아쳤다. 미친 듯 말했다.

“니가 인간이야? 니가 남자야?”

그는 이삿짐 트럭을 얻어타고 최선을 다해 왔다고 말했다. 그의 온몸은 땀에 절어 있었다.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서서히 일어나 내 커피값을 치르고 나서 내게 말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그는 돌아갔지만, 나의 화는 식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았다. 오늘 밤 그는 다시 올 것이기에.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그날 마지막 인사를 했잖아요.”

나는 더욱 그에게 몰입했다. 그가 그리웠고, 그가 없는 세상이 허전했다. 그는 날 만나주지 않았다. 애걸을 해도 나오지 않았다. 비오는 밤, 그의 집 앞에서 그를 만났지만 이미 끝난 일이라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궁궐 같은 집이었다. 비 오는 후암동 산자락에서 나는 엉엉 울었다.

그러고도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으로 내 친구를 그의 학교로 보냈다. ‘달자를 한 번만 만나 줘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것은 완전히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끝났다.”고 다시 전해왔다. 그렇게 내 대학 시절의 연애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 아픔은 나 자신을 반성하게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남자에게 무릎을 꿇은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가 대학에서 조교를 하고 있을 때 그가 찾아왔다. 온 가족이 이민을 간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 나를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그리움의 대상이 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미 그를 잊었다. 그 이후 지금껏 그를 본 적이 없다. 외국이 어느 나라인지도 모른다.

내 젊은 날의 오만은 겸허를 배우게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해 울었던 그 시절이 어여쁘다. 오만은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삽화=필몽〉
〈삽화=필몽〉

어버지의 어깨

내 대학 시절은 연애 빼고 모두 우수한 편이었다. 그런 대학 시절이 문을 닫는다. 졸업식에는 아버지만 오셨다. 살이 빠진 듯했고, 얼굴은 우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이 내려앉고, 그 속병으로 일어서지 못한다고 했다. 딸을 대학에 보내놓고, 그 영광의 졸업 그 기쁨을 단연 어머니가 바라보아야 했지만, 어머니는 오지 못했다. 서러움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아버지 혼자 졸업식에 오셨다. 대학은 졸업하지만, 나의 미래도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험난한 사회에 뛰어들어 먹고 사는 일을 홀로 감당해야 하니 두려웠고 무서웠다.

졸업식이 끝나고 아버지는 숙대 아래 남영동에서 불고기를 사주셨다. 늠름하고 자신감 넘치는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내 대학 졸업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시면서 말문을 열다가 닫아 버렸다.

“니 에미는…….”

그러다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가능한 이 시간만큼은 나를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졸업생 중에 달자 니가 젤 특출나더라.”

그리고는 웃으셨다.

“모든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렇게 생각할 건데요.”

우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아버지를,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괴로운 순간이었다. 장차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와야 한다고 언니에게 들었다.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우리 집, 그 한옥이 남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은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큰소리로 호통을 치던, 몇십 명이 넘는 일꾼들을 다스리던 아버지가 아니라 처진 어깨에 자신감을 잃은 아버지를 보며 불쑥 어머니를 괴롭힌 죄를 모두 용서하며 “아버지 괜찮아요, 괜찮아요.”하고 안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고기 값을 내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처량해 보였다. 안방 돈 궤짝에 가득 들어 있던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는다고 마당 한쪽을 파고 깊이 묻었던 그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불고기 값도 무거워 보이는 아버지의 등을 안고 나는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웃었다. 아버지의 팔을 안으며 “우리 아버지 멋있다.”고 말하면서 근심 따위를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근심은 안 보이려고 하면 더 잘 보이는 법이다. 아버지가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넌 앞이 창창하다. 햇빛이 잘 들끼다.”

아버지는 문학적인 분이었고, 시인이었다. 등단이 그리 중요한 것인가. 아버지는 훨훨 나는 새처럼 살고 싶은 분이었지만, 너무 많은 곳에 묶여 있었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살면 살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묶이고 꼬인다. 그것이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대학 4학년, 내가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아버지는 과하다 할 만큼 흥분하셨다. “사극을 보면 딸이 왕비가 되면 아비가 딸 앞에 절을 하던데 내가 네 앞에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연산군 부인도 중종 부인도 신씨 아니었냐?”고 하시며 웃으셨다.

저녁에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몸은 어떤 노?”

“미안하다. 내가 갔어야 하는데…….”

“엄마 마음 내가 다 안다 안카드나.”

그리고 우리는 함께 울었다. 어둑어둑한 아침이 왔고, 나는 햇빛 안에서도 더듬거렸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이 어둠을 뚫고 나가야 했다. 이제부터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등학교·대학교를 외지에서 부모님의 곁을 떠나 공부했지만 늘 용돈은 차고 넘쳤다. ‘왜 사람들은 돈이 없다고 하나?’ 생각했던 그 ‘없음’이 나의 현실로 찾아온 것이다. 내가 돈을 벌어 어머니의 울음을 상심을 절망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급 조교

시인이란 이름을 얻고 대학 졸업을 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얻은 것 같지도 않았다. 시인은 밥벌이에 별 쓸모가 없었다. 1965년, 세상에 여자를 위한 의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다 취직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나도 친구 소개로 을지로의 어느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뿌듯했다. 월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어 달이 지나고 그만두었다. 사장이란 남자는 출근하자마자 “미스신 담배사와.”하고 고함을 쳤다. 담배를 사다주면 내 엉덩이를 한 번 만지고 야릇하게 웃었다.

한 달 월급을 받고, 두 달째는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사장 담배 사다주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세상살이의 첫 번째 좌절이었다. 사회가 무섭고 신뢰가 가지 않았다. 결국 숙명여대 국문과 조교로 의자 하나를 허락받았다. 잘 아는 곳이라 마음은 편했다. 월급이 없는 무급 조교였지만, 과장 선생님께서 교통비 정도의 월급을 주셨다. 그것으로 살았다. 선생님들을 모시고 생활하는 것은 넉넉지 못해도 기쁨이 있었다.

그 시절은 방 하나가 국문과 교수실이었다. 다섯 명의 교수가 한 방에 계셨고, 조교 자리는 문 옆에 있었다. 다섯 명의 교수님이 늘 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선생님들의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큰 혜택이었다. 강사도 화려했다. 백철 선생님, 이어령 선생님, 안수길 선생님, 조연현 선생님, 김윤식 선생님. 그분들을 뵙는 건 자랑거리였지만 갈등과 방황은 그치지 않았다.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언제나 문제였다. 강의를 끝내고 방으로 오신 교수님들이 가끔 내게 물었다.

“신 조교, 몇 살이야?”

“스물다섯입니다.”

“아이구 좋은 나이다!”

어느 선생님이나 똑같은 말을 했다. 좋은 나이라고. 되는 일은 없고, 주머니는 비어있고, 속은 터지는데 뭐가 좋은 나이란 말인가. 나는 속으로 외쳤다. ‘좋으면 너가 가져가!’

정말 막막했던 조교 시절,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울 것 같은데, 그땐 정말 심각했다. 어떻게 살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신달자
시인.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첫 시집 〈봉헌문자〉를 비롯해 수필집 〈나이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백치애인〉,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 수많은 작품을 펴냈다. 만해대상 문예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공초 오상순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달진문학상(시부문), 석정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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