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보다 더 만화스러운 삶
웹툰 ‘초월’ 계기로 불자 거듭나

“만화는 불량서적이다.”,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책이다.”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만화가에 대한 인식 역시 좋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공포의 외인구단〉. 이 한 편의 만화가 출간되면서 뒤바뀌었다. 사람들은 까치집 머리의 반항아 ‘오혜성’에게 열광했다. 만화방을 찾는 어른이 크게 늘었다. 만화를 원작으로 드라마와 영화가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만화 한 편으로 한국 만화계의 판도를 뒤흔든 인물, 그가 바로 이현세(67·법명 보덕)다. ‘만화’라는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오며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만화가 이현세를 서울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나봤다. 최근 네이버 웹툰에서 ‘늑대처럼 홀로’를 연재 중인 그는 “죽는 날, 그 순간까지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미대 꿈 접고 만화가 입문

이현세의 만화 인생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그 출발점을 조부모에서 찾았다. 그의 조부모는 1920년경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밤낮없이 일하던 조부는 일본 순사가 쏜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조모는 세 아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도 가난은 늘 함께했다. 견디다 못한 작은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겠다.’며 다시 만주로 떠났다. 그 사이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졌다. 작은아버지는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복을 입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 한 끼를 먹고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떠났다. 얼마 후 마을에는 국군이 진주했고, 이현세의 집안은 ‘부역자(附逆者)’로 낙인찍혔다. 이때 이현세의 큰아버지가 헌병대에 끌려가 행방불명이 됐다. 집안에는 막내아들만 남았다. 이현세의 아버지다.

이현세는 1956년 포항 흥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모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며 그를 큰어머니 호적에 올렸다. 부역자 집안이란 낙인과 아버지의 부재는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의 빌미를 제공했고, 어린 이현세를 외톨이로 만들었다. 또래들이 전쟁놀이를 하며 온 마을을 뛰어다닐 때, 그는 방 안에 앉아 공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1959년,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덮쳤다. 온 마을이 물에 잠겼다. 그의 가족은 경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흥해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현세에게 경주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자동차가 쌩쌩 내달리고, 화려한 극장 간판이 거리에 내걸려 있었다. 그곳에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만화책이었다. 그는 경주시립도서관을 다니며 어린이 만화를 읽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돈이 생기면 곧장 만화가게로 달려갔다.

9살이 되던 해, 경주역에서 일하던 삼촌(친부)이 작업 도중에 전선을 보지 못하고 밟아 감전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삼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큰 상실감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파편처럼 남아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에 내다 파셨는데 늘 저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장에 가는 날이면 꼭 국밥집에 들러 제게 국밥 한 그릇을 시켜주시고, 당신은 막걸리 한 사발을 드셨죠. 그때는 ‘삼촌은 술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커서 생각해보니 수중에 돈이 없어서 그러셨던 것 같더라고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국밥 한 그릇 대접하지 못했다는 게 항상 마음에 남아있어요.”

청소년기는 방황의 시기였다. ‘부역자 집안’이라는 낙인은 어린 그의 삶까지도 옭아맸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당시는 연좌제가 있어서 부역자로 찍히면 공무원이나 은행원 같은 안정된 직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대 진학을 목표로 세웠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적녹색약 판정을 받아 이 꿈을 포기해야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만 가혹한 것 같았다. 그 무렵 출생의 비밀도 알게 됐다.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배신감과 좌절,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뒤섞여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 결심은 가혹한 세상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다. 모두가 ‘불량서적’이라고 매도하는 만화 속 흑백세상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4년 상경해 모래내(현 남가좌동)에 자리 잡았다.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업실을 찾았지만,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어렵게 순정만화가 나하나 작가의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입문, 이정민·하영조 작가의 화실을 거쳤다. 이후 부선망독자(父先亡獨子)로 6개월간 파주에서 복무한 후 제대한 뒤 본격적인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그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최소한의 수면시간과 식사시간 외에는 오롯이 만화를 그리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결국 상경 4년 만인 1978년,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인 군인과 베트남 여인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만화 〈저 강은 알고 있다〉로 공식 데뷔했다. 이 시기에 친구 여동생과 9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도 했다.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동안 ‘나만의 매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어느 날, 영화 ‘지상 최대의 서커스(1964)’를 보고 나서 어린 시절 우연히 본 서커스 공연이 떠올랐다. 이 기억을 토대로 스토리를 구상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실망해서 원고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만삭의 아내가 “재미있는데 왜 버렸느냐?”며 자신이 구겨서 버린 원고를 다리미로 한 장씩 펴고 있었다. 아내가 되살린 원고를 수정·보완해낸 책이 1979년 출간한 단편만화 〈최후의 곡예사〉다.

“〈최후의 곡예사〉에서 처음으로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혜성(까치)’ 캐릭터를 그렸습니다. 까치집 같이 산발한 머리의 반항아 오혜성은 저의 또 다른 모습이었죠. 이후에 〈시모노세키의 까치머리〉, 〈까치의 5계절〉 등의 작품을 통해서 마동탁·엄지 등의 캐릭터를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연이어 까치 시리즈를 출간한 이현세는 1982년 히트작 〈공포의 외인구단〉을 세상에 내놨다. 이 만화는 출간과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초기 대본소용 만화책으로 출간됐는데,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곧바로 서점용 단행본으로 발매됐다. 어린이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던 만화가 서점에서 판매되며 ‘성인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화계의 판도를 바꾼 이현세 작가는 1979년 출간한 단편만화 〈최후의 곡예사〉를 통해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혜성의 캐릭터를 구체화했다.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만화계의 판도를 바꾼 이현세 작가는 1979년 출간한 단편만화 〈최후의 곡예사〉를 통해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혜성의 캐릭터를 구체화했다. 

시대 흐름 맞춰 웹툰 작가 변신

〈공포의 외인구단〉의 흥행 후 이현세의 일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먼저 인터뷰와 특강 요청이 쇄도했다. 그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원고료도 크게 올랐고, 무엇보다 톱 연예인만 찍는다는 주류 CF도 촬영했다. 덕분에 지독했던 가난과 작별할 수 있었다. 1983년 〈공포의 외인구단〉은 영화화됐고, 1987년에는 조봉남 감독이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 ‘떠돌이 까치’로 만들었다.

이현세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린 성공에 정신이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만화가로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속편을 내자.’는 제안이 많았지만, 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작품을 독자가 늘 궁금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 〈국경의 갈가마귀〉(1982)·〈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1987)·〈아마게돈〉(1988)·〈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1988)·〈남벌〉(1994)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그렸고, 줄줄이 흥행에 성공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 애니메이션 열풍이 불었다. 그는 장편 SF만화 〈아마게돈〉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제안받았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 기꺼웠던 그는 제의를 수락했다. 전문성을 높이고자 제작위원회를 구성했고, 본인이 작품 총감독을 맡았다. 한국 애니메이션 부흥의 초석이 될 거라는 기대 속에 1996년 1월 20일 애니메이션 ‘아마게돈’이 개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큰 실패를 겪었지만, 그는 이 일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더욱 발전하기를 원했다. 그는 제작 이야기와 실패 원인 등을 분석한 〈아마게돈 백서〉를 출간했다. 〈아마게돈 백서〉에 수록된 수익 대차대조표에 따르면 당시 제작에 소요된 경비는 25억 300만 원이었고, 수입은 13억 8,700만 원에 그쳐 순 손실액이 11억 1,600만 원에 달했다.

이후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그는 유사역사학 서적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1996년 말부터 대하역사만화 〈천국의 신화〉를 그렸다. 100권 분량의 단행본이 목표였다. 그런데 1998년 작품이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검찰에 약식기소를 당했다. 그는 3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반발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법에 저촉이 될까?’하는 고민이 그의 손을 주춤거리게 했다. 결국 잠시 작품 활동을 멈춰야 했다. 7년이 지난 2003년이 되어서야 대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그는 뒤늦게 표현의 자유를 얻었지만, 이미 만화계는 단행본에서 웹툰으로 판도가 뒤바뀐 후였다.

재판 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스포츠서울에 골프를 소재로 한 만화 〈버디〉를 연재했다. 하지만 2012년 위암 판정을 받고 말았다. 그는 투병 중에도 〈한국사 바로보기〉·〈세계사 넓게보기〉(2012)를 출간했고, 완치 후에는 〈만화 삼국지〉(2013)를 그렸다. 또 웹툰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따라가고자 관련 기술을 배웠다. 이후 미완성으로 남겨뒀던 〈천국의 신화〉 후속편을 2015년부터 네이버에 연재하며 ‘신인’ 웹툰작가로 발을 내디뎠다.

2017년 8월 창의포럼에서 대중에게 특강을 하고 있다. 

웹툰 ‘초월’ 그리며 불교와 인연

이현세는 2017년 서울 은평구청과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으로부터 초월 스님(1878~1944)의 일대기를 다룬 웹툰 제작을 의뢰받았다. 초월 스님의 행장은 그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07년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던 중, 초월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뒤늦게 조명을 받았다.

초월 스님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군자금을 확보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 전달했고, ‘혁신공보’를 발간했으며 승려독립선언서를 제작, 배포했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만주로 향하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격문을 쓰려다가 체포됐다. 1943년 출소했지만, 다시 수감돼 1944년 청주형무소에서 입적했다. 웹툰 제작은 초월 스님 선양사업의 일환이었다.

“진관사에 방문해 초월 스님이 제작했다는 태극기를 직접 봤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솟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하겠습니다.’ 승낙했어요. 사실 저는 불자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꾸준히 신행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다니는 사찰도 없었어요. 다만 어머니와 할머니가 불자이다 보니 불교에 친숙했던 정도였죠. 그런데 초월 스님 웹툰을 그리면서 불교에 성큼 가까워졌어요. 이때부터 ‘불교신자’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이현세는 웹툰 제작과정에서 고증을 철저히 지키되,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2018년 다음웹툰(현 카카오웹툰)에 ‘초월’을 5회 분량으로 연재했다. 이때의 인연을 계기로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으로부터 ‘보덕’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2019년에는 조계종 불자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작가 데뷔 후 44년간 작품 활동을 지속해온 이현세는 1994년 한국만화문화상 공로상을 시작으로 제3회 아시아만화인대회 특별상(1999)·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만화부문 특별상(2001)·제2회 고바우만화상(2002)·대한민국문화예술인상(2005)·서울특별시 문화상(2006)·대한민국만화대상 만화부문 대통령상(2007)·제7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2016) 등을 수상했다.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가장 뜻깊은 상으로는 2022년 8월 웹툰협회로부터 받은 ‘황금펜촉상’을 꼽았다. 그는 “황금펜촉상은 ‘젊은만화작가모임’이 원로 만화가에게 주는 공로상”이라며 “후배들이 저를 ‘자랑스러운 선배님’이라고 인정해준 것 같아 기뻤다.”고 말했다.

이현세는 1997년 세종대학교 예체능대 영상만화학과(현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지금까지도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만화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길의 끝에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음을 가질 때 사막을 건너는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강한 만화가의 길을 걷는 이에게 ‘자기 확신’은 나아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등불과 같다.”고 말했다.

이현세의 삶은 만화보다 더 만화스럽다. 만화 속 주인공은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간다. 인생이라는 만화 속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는 만화가 이현세. 그의 작품에 담긴 단단하고 견고한 신념이 시련과 마주한 모든 이들의 마음에 희망을 샘솟게 하는 한 송이 연꽃이 되길 기대한다.

1988년 서울 잠실 가락오피스텔에 위치한 이현세의 화실.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작품을 구상·작업했다. 
1988년 서울 잠실 가락오피스텔에 위치한 이현세의 화실. 그는 이곳에서 다양한 작품을 구상·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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