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흙과 실뿌리

대파 모종을 사서 텃밭에 심었다. 대파가 자라날 공간의 넓이와 높이와 그늘을 짐작하면서. 그러나 이 짐작은 참으로 가늠이 쉽지 않다.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대파는 더 큰 의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심은 대파 모종은 한데서 겨울을 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대파 모종을 심으려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집 할머니의 텃밭에서 자라던 대파를 한겨울 내내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눈이 내려 한 뼘만큼 쌓여도 대파의 푸른 새싹이 꿋꿋하게 자라나던 그 기억 때문일 테다. 그 촛불 같은 생명력 때문일 테다. 얼음이 얼고, 찬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던 생명의 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오늘 대파 모종을 심고 조리개로 물을 듬뿍 뿌려주었다. 흙 속으로 가느다랗고 하얀 대파의 실뿌리가 밤새 내려갈 것이다. 마치 캄캄한 밤에 하늘에서 연약한 입김의 눈송이가 하나둘 내려오듯이. 대파의 실뿌리가 아래로 더 아래로 점차 내려가면 흙은 그 부드러운 품을 열고, 돌멩이는 비켜앉을 것이다. 그리고, 땅속의 오랜 서사 속에 한 페이지 한 줄씩 대파에 관한 문장이 끼워질 것이다.

아픈 자식을 업고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는 입관 체험 행사장에 다녀왔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스님께서 말씀해주셨고, 이어서 입관 체험 참여자들은 수의를 입고 스스로 작성한 유서를 낭독했다. 한 참여자가 낭독한 유서의 한 대목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픈 자식을 업고서 살리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미련이 없지 않지만, 사는 일이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잘 지내다 간다.”

참여자는 눈물을 흘렸고,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나도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아픈 나를 업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셨다. 내가 열다섯 살 때였다. 몸이 큰, 앓는 나를 살리려고 어머니께서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셨는지 용하다는 의원들을 찾아다니셨다. 멀고 먼 흙길을 업고 뛰시면서. 내게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더 또렷해지는 장면이다.

나그네 같고 티끌 같은 번뇌

오늘은 한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들었다. 스님의 말씀 가운데 “나그네 같고 티끌 같은 번뇌”라는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의 대의가 무엇인지 오래 생각해보았다. 나그네는 어딘가에 잠시 머물거나 곧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 아닌가. 티끌은 티와 먼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잔부스러기와 가늘고 보드라운 티끌을 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번뇌라는 것이 곧 떠나갈 것이고, 잔부스러기와 같은 것인 줄을 알라는 말씀일 것이다. 정처 없는 보잘것없는 것에 마음이 시달리거나 괴로워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이다. 동시에 번뇌를 끊어서 스스로를 쉬게 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번뇌는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나를 옭아매는 그 번뇌를 바로 보는 것일 테다. 거짓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테다. 나를 결박한 지금 이것이 번뇌이고, 지금 이것이 번뇌의 내용임을 알면 번뇌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보는 사람으로, 곧 각자(覺者)로 살면 ‘나그네 같고 티끌 같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유채밭을 생각하며

제주에는 유채밭이 많다. 이른 봄이면 곳곳에 연노란색의 유채꽃이 핀다. 올해 봄에 유채꽃밭을 보면서 나도 작게나마 텃밭에 유채를 파종해서 내년 봄에는 유채꽃밭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 유채를 파종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마을을 들렀다가 유채가 벌써 꽤 자라서 군데군데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벌써 유채꽃이 필 때인가?’라고 혼자 의아해하며 중얼거렸다. 유채 씨앗을 판다는 상회를 예전에 미리 두어 군데 알아두었는데, 곧바로 전화를 넣었다. 다행히도 유채 씨앗은 11월 중에 뿌리면 봄에 꽃을 볼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성급한 내가 “11월 초순에 뿌리나요? 11월 말에 해도 될까요? 언제가 좋을까요?”라고 여쭸더니 저쪽에선 조금은 심드렁하게 “보리 뿌릴 때 유채도 뿌리니까 11월에 하면 돼요.”라고 응답했다. 그러면서 “꽃을 볼 거예요? 수확할 거예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꽃을 보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1kg에 6,000원 하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겠다며 언제 한 차례 상회에 다녀가라고 했다. 농사일에 서툴러서 아직은 작물의 파종이나 모종 심는 때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꽃과 나무와 작물의 농사를 언제쯤 시작해야 하는지를 적는 ‘영농일지’ 공책을 하나 장만했다. 거기에 그달 해야 할 일들을 적어 넣기 시작했다. 네 계절이 지나면 어느 정도 영농일지도 빼곡하게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소 서툴겠지만 나도 땅을 일궈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되어 있을 것이다. 조만간 유채 씨앗을 사러 상회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동시에 농사일이라는 게 바로 코앞의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한두 계절을 미리 내다보고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하나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우연히 들렀던 그 마을에서는 왜 지금에 벌써 유채꽃을 피워 올릴 생각을 했을까? 사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제주라고는 하지만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 마을에 가면 석 달이나 먼저 핀 유채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감나무와 꾸지뽕나무

내가 새로 집을 지어서 살고 있는 제주 애월읍 장전리 집은 아내가 태어난 집터이다. 아내가 태어나 두어 살까지 살았던 곳인데, 그 후로는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 빈집을 허물고 새로 집을 지었다. 옛집을 허물되 불을 때던 부엌 쪽 외벽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그을린 흔적이 있는 그 외벽을 보면서 이 집에 살았던 시절의 곤궁과 그 가운데서 피어났을 정담과 행복을 함께 떠올려보곤 한다. 옛집이 앉아 있던 집터 주변의 돌담과 나무들은 되도록 그대로 살려서 집을 지었다. 물론 허물어진 돌담은 새로 쌓았다. 집 주변에는 동백나무가 곳곳에서 자라고 있고, 감나무도 두 그루 있다. 작년에만 해도 감나무에 감이 별로 열리지 않았는데, 올해는 나무를 잘 보살핀 덕인지 감이 꽤 열렸다. 그리고 요즘은 붉게 익어가고 있다. 나는 감이 익어가는 그 빛깔의 바뀜을 매일 살펴보고 있다. 매달린 감을 손으로 쥐어보며 얼마나 말랑말랑해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고도 있다. 그런데 감이 익어가니 벌써 새들이 날아와 감을 쪼아 먹다 날아가곤 한다. 새는 참 영리하고, 또 두려움도 많아서 집 쪽을 향해 뻗어있는 감나무 가지에는 잘 앉지 않고, 길을 향해 뻗어있는 가지에 와서 감을 쪼아 먹다 날아간다. 그래서 감나무의 반쪽 가지에는 감이 드물어졌고, 반쪽 가지에는 감이 다닥다닥 붙어서 열려 있다. 감이 빨갛게 무르익을수록 날아오는 새들도 많아지고, 또 그나마 감이 많이 남아 있는 반쪽의 가지에도 머잖아 감의 수량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남을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 혼자 감을 다 먹을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다만 새들이 먹다 남긴 감과 성한 감을 한 소쿠리 정도만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집 주변에는 꾸지뽕나무도 두 그루 있다. 수령이 많은, 큰 나무이다. 꾸지뽕나무에도 열매가 열려 이제 제법 익었다. 나는 아침마다 꾸지뽕나무 아래에 가서 열매를 줍는다. 그러나 꾸지뽕 열매를 얻는 일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있다. 새들이 쪼아 먹고, 또 벌레들이 갉아먹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이 열매 또한 나 혼자 먹을 생각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이 꾸지뽕 열매를 줍던 일에 대해 한 편의 시를 썼다. ‘별미(別味)’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매일 아침 꾸지뽕나무 밑에 가 꾸지뽕 열매를 주워요// 꾸지뽕 열매는 음력 시월이 다 가도록 가지에 붉게 매달려 있어요// 오늘 아침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나무 밑에 가 꾸지뽕 열매를 주웠어요// 이제는 꾸지뽕 열매를 새가 쪼아 먹고 벌레가 갉아 먹어 놓아요// 나는 새와 벌레가 쪼아 먹고 갉아 먹고 남긴// 꾸지뽕 열매 반쪽을 얻어먹으며 별미를 길게 즐겨요

모든 열매는 해와 구름과 바람과 흙과 밤과 낮과 빗방울과 이슬과 눈송이가 기른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땀도 들어 있다. 하지만 또 거기에는 새의 노래와 땅속 벌레의 노동도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나의 몫은 반쪽이 채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소쿠리의 감이나 한 쟁반의 꾸지뽕 열매를 얻는 일도 내게 충분히 넘치는 일이다. 게다가 혼자 다 먹을 욕심도 전혀 없다. 그 많은 감과 그 많은 꾸지뽕 열매를 어떻게 독식할 수 있겠는가. 나눠 먹는 것이다. 나눠 먹어야 더 맛있다.

은은하다

글쎄, 이제 나는 은은한 것이 좋다. 요란스럽지 않고,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좀 어슴푸레하고, 좀 흐릿한 것이 좋다. 향기도 너무 진하지 않고 그윽한 것이 좋다. 극적인 것을 이제는 바라지 않는다. 평범한 것이 좋다. 보통의 것이 좋다. 이제는 날이 차가워져 창문을 닫아놓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다 보니 집 안에 있는 것들에게 좀 더 시선이 쏠리게 된다. 그 가운데 내 감각은 난초에게로 간다. 난초는 요즘 한창 꽃이 핀다. 햇살이 잘 드는 창 쪽에 놓아두었더니 난초의 꽃이 더 환하다. 그리고 거기서 고요하게 향기가 온다. 은은한 향기가 은은하게 온다. 마치 귓속말을 내게 하듯이. 향기는 은근하되 오래 머문다. 그 향기는 내 흰 이마와 목덜미도 한 차례 쓰다듬고 간다. 내 늑골에도 얹힌다. 향기가 아늑해서 나는 무엇에든 조용하게 말을 건네고 조용하게 몸을 움직이게 된다. 귤밭에서 건너온 귤꽃의 향기가 마당에서 저녁연기처럼 머무르던 때처럼 하루가 안온하고 평화롭다. 마당에서 자라는 은목서도 곧 꽃이 필 것이다. 그러면 집 안팎에서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니 그러면 내 마음으로부터 향기가 조금은 번져 나올 것이다. 이제는 정말이지 멀리서 오는 종소리처럼 가만한 것이 좋다.

문태준 _ 시인.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맨발〉·〈가재미〉·〈그늘의 발달〉·〈먼 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노작문학상·애지문학상·서정시학작품상·목월문학상·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BBS 제주불교방송 총괄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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