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화 대가 허련 낙향
산사와 어우러지게 조성
화맥畵脈 5대째 이어져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선생은 고향인 진도에 낙향해 화실 ‘운림산방’을 짓고 시·서·화를 즐겼다. 첨찰산 자락의 고찰 쌍계사와 돌담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으며, 현재는 화실과 초가 집 등 영역 전체를 ‘운림산방’이라 부른다.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 선생은 고향인 진도에 낙향해 화실 ‘운림산방’을 짓고 시·서·화를 즐겼다. 첨찰산 자락의 고찰 쌍계사와 돌담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으며, 현재는 화실과 초가 집 등 영역 전체를 ‘운림산방’이라 부른다. 

진도는 고려시대 삼별초가 주둔하며 대몽항쟁을 펼쳤던 지역 중 한 곳이다. 진도에 주둔한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 말기의 장군인 배중손(裵仲孫, ?~1271)을 지도자로 삼고, 현종의 8대손인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 ?~1271)을 새 왕으로 받들어 몽골에 항복한 고려 조정과 대립했다. 삼별초는 용장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龍藏寺)를 궁궐로 삼았다. 지금도 고려시대에 조성된 용장사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함선으로 일본 수군 함선 330척을 괴멸시킨 ‘명량해전’의 역사적 현장, 울돌목도 바로 진도 앞바다다.

이처럼 진도의 역사에는 항쟁·항전의 정서가 강하게 스며있다. 물론 ‘진도아리랑’의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의 예인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근에 섬이 목탁 형상을 하고 있다는 불도(佛島)·‘스님의 가사가 섬이 됐다.’는 전설이 전하는 가사도(加沙島) 등이 있어 불교와도 인연이 깊다. 가사도의 원래 한자명은 스님의 법의를 일컫는 ‘袈裟’와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加沙’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해 전에는 전국민을 충격과 슬픔으로 몰아넣은 침몰사고가 발생한 곳이기도 해 가슴 먹먹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첨찰산 쌍계사 곁에 화실 건립

진도 동쪽에 위치한 첨찰산(尖察山) 아래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이 자리하고 있다. 첨찰산 일원은 국가 천연기념물 상록수림이고, 운림산방 돌담 너머의 고즈넉한 도량은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창건한 사찰로 전하는 쌍계사(雙溪寺)다. 운림산방과 쌍계사는 영역이 구분돼 있지만, 담당을 쳐놓았을 뿐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잘 어울린다.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許鍊, 1808~1892) 선생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한 직후인 1856년 49세 때 고향 진도로 내려와 이곳에 화실을 짓고 ‘소허암(小許庵)’ 또는 ‘운림각(雲林閣)’이라 불렀다. 현재는 이 공간 전체를 운림산방으로 부른다. 소치 선생이 쌍계사 옆에 운림산방을 건립하고 말년을 보낸 이유는 뭘까? 소치는 자서전 〈소치실록(小癡實錄)〉 ‘자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촌(沙村)의 차가운 방아는 석양 따라 멀리 보이고, 계사(溪寺)의 맑은 종소리는 바람결에 문득 들린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니 실로 전생의 인연을 알겠고 …… 조용히 사는 것은 남전(藍田)의 옛 별장과 같고, 빈 방을 지키는 것은 파뿌리처럼 백발이 된 과부와 같다. …… 영(榮) 선생이 소박하게 지내던 것은 따를 수 있다. 파란 시내, 푸른 산속에서 나 자신 마음대로 생활하며, 따뜻한 산 기운과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가운데에 항상 의취(意趣)가 돋아 온다.

자서전의 내용처럼 산사의 맑은 종소리와 아름다운 풍경, 그의 예술세계를 화폭에 담아낼 공간으로 적합했기 때문에 쌍계사와 나란한 곳에 터를 잡았으리라 짐작해본다.

운림산방의 총 면적은 2만 8,740㎡(8,709평), 연건평 2,579㎡(781평)의 경내에는 소치가 기거하던 초가집과 화실인 운림산방 외에도 소치의 영정을 모신 운림사(雲林祠), 소치기념관 1·2관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81년 전라남도 지정기념물 51호로 지정됐다. 그가 머물렀던 초가집은 정갈하다. 맷돌 등 몇몇 유구가 마당 한편에 나란히 나열돼 있고, 방안은 소박하기만 하다. 정갈하고 소박함을 담은 그윽한 향기가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

특히 ‘운림지’로도 불리는 연못은 아름답기로 이름나 있다. 유적지 정비를 잘해놓아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서 소치 선생이 살았던 당시의 소박하고 고즈넉한 느낌은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선비 화가의 단순하고 소박한 느낌의 공간이기 보다는 잘 정비된 관광지의 느낌이 강하다.

사람들이 운림산방을 찾아오게 만드는 가장 큰 볼거리는 ‘운림산방’ 현판이 걸린 화실 앞의 연못인 듯 했다. 오는 사람마다 “연못이 참 예쁘다.”, “멋지다.”고 한 마디씩 내뱉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간다. 멋지고 예쁜 연못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연못의 원 주인은 소치였지만, 현재는 연못에서 노니는 잉어들이 주인 같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잉어들은 서로 경쟁하고, 잉어들이 물 속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자 사람들은 또 먹이를 준다. 어느 관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대화백의 작업 공간이었던 운림산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연못 중간의 큰 배롱나무도 소치 선생이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연못만 기억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나 다름없다. 운림산방의 주인은 소치 선생이었기에 그가 머물렀던 공간이 주인공이어야 한다. 2021년 12월 경 운림산방에 방문했을 때는 보수공사로 인해 화실을 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지난 9월 하순 다시 방문 했을 땐 대가의 화실을 볼 수 있었다. 운림산방 내부는 문을 열어 놓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올라가는 건 금하고 있다. 마루에는 앉을 수 있다.

마루에 앉아 소치 선생이 바라보았을 주변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화실 앞마당에는 석탑이 있고, 탑의 아랫부분의 빈 공간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탑 근처에는 해치가 두 눈 부릅뜨고 운림산방을 지키는 듯 했다. 해질 무렵, 사람이 찾지 않아 한적하기만 한 운림산방의 정취가 한가로운 가운데 역동적이다. 대가의 그윽하고 활발발한 기운은 육신이 없어져도 금새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뒤늦게 노부부가 소치의 공간을 둘러보러 왔다. 아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자 남편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휴대폰 조작이 서툴러서인지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있길래, 선뜻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여러 장 촬영해 드렸다. 만족해하는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니 바쁘기만 했던 마음에 느긋한 여유가 찾아왔다.

소치 허련 선생이 기거했던 초가삼간. 화실인 운림산방 뒤편에 있다.
소치 허련 선생이 기거했던 초가삼간. 화실인 운림산방 뒤편에 있다.

남종문인화 창시자 왕유 이름·字 따라

허련은 조선 말기의 선비 화가로 진도 쌍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대표적인 호는 소치(小癡)이며, ‘노치(老痴)’·‘석치(石痴)’도 그의 호다. 선생은 남종문인화의 창시자인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 699년 추정~759)의 이름을 따 허유(許維)로 개명했고, 마힐(摩詰)이란 자(字)도 왕유의 자를 그대로 썼다. 왕유는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이름 유(維)와 자(字) 마힐(摩詰)을 합치면 대승불교 경전인 〈유마경(維摩経)〉의 주인공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이름인 ‘유마힐(維摩詰)’과 같다. 그만큼 불심이 깊었고, 불교에도 해박해 이를 바탕으로 시·서·화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던 인물이다. 허련 선생이 왕유의 이름과 자를 쓴 것도 자신의 불심과 무관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치는 실제로도 불교와 인연이 매우 깊다. 초의선사를 모시고 공부를 했고, 암자의 방 한 칸을 얻어 세속을 벗어나 지내며 한가로움을 즐겼다. 허련 선생은 종종 사찰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1877년(고종 14)에는 남원 선원사(禪源寺)와 교룡산성에 머물며 각공(刻工)을 불러 스승 추사의 화본(畵本)을 판각했다. 그리고 ‘매죽도’도 그렸다.

그가 불교와 친숙해진 것도 초의선사 영향이 아닐까 싶다. 허련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초의선사는 그런 허련을 일지암에서 가르치며 대성할 재능을 지닌 떡잎임을 일찌감치 알아본듯하다. 초의선사가 추사 김정희 문하에 추천해, 훗날 시·서·화에 능통한 삼절로 불리게 만드는 가교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초의선사와 추사·소치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을까? 〈소치실록〉 ‘몽연록(夢緣錄)’에는 소치 선생이 객(客)으로부터 “그대는 무슨 인연으로 (추사와)일생의 지음(知音)이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을미년(1835)에 대둔사(大屯寺)에 들어가 초의선사가 있는 일지암(一枝庵)에 방을 빌려 거처했습니다. 속세 밖에서 생활하는 운치가 꽤나 있었습니다. 날마다 서화(書畵)를 즐겼습니다. 초의선사는 늘 추사공의 높고 뛰어난 점을 말씀하셨고, 나는 귀가 닳도록 듣다 보니 그 분을 만나 알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 나는 공제(恭齊)의 그림을 임방(臨倣)한 몇 폭의 그림과 스스로 만든 몇 폭의 그림을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선생에게)보냈습니다. 추사공에게 한 번 증질(證質)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초의선사의 편지에는 추사공과 (초의선사가)주고 받은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허군의 화격(畵格)은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하니, 품격은 이미 이뤘으나 견문이 좁아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서 안목을 넓히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

허련의 그림 솜씨가 시·서·화에 능하고 안목 또한 높았던 초의선사와 추사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허련은 31세 때 초의선사의 추천으로 추사의 문하생이 되어 추사의 집에 머물며 시·서·화를 배웠다. 추사로부터 중국 북송 미불(米芾), 원나라 황공망(黃公望), 예찬(倪瓚), 청나라 석도(石濤)의 화법과 추사체도 전수받았다.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자 소치는 1841년·1843년·1847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제주도를 오가며 그림을 배웠다. 추사는 제자 허련에게 아호 ‘소치’를 내려주었다. 특히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추사도 소치에게만은 “압록강 동쪽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고 극찬할 정도로 소치의 실력은 뛰어났다.

운림산방 마루에 앉으면 연못·푸른 하늘·하얀 구름 등 평온한 자연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운림산방 마루에 앉으면 연못·푸른 하늘·하얀 구름 등 평온한 자연 풍광이 한눈에 펼쳐진다.

운림산방 화맥 5대까지 계승

소치는 추사를 통해 당대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36세 때인 1843년에는 추사의 소개로 전라우수사 신관호(申觀浩, 1810~1884, 신헌(申櫶)으로 개명)와 교유하며 그림을 그렸고, 39세 때에는 신관호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의 집에 머물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다. 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과 민승호(閔升鎬)·김흥근(金興根)·정원용(鄭元容)·민영익(閔泳翊) 등과도 교유했다.

소치는 1853년 해남 대흥사로 가서 초의선사를 다시 만나고, 1855년 스승 추사와 조우한다. 소치는 산수는 물론이고 인물·모란·매도 잘 그렸다. 이 중 특히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대표작으로는 스승 추사를 그린 ‘완당선생초상도’를 비롯해 ‘선면산수도’·‘방예운림죽수계정도’·‘방황자구벽계청장도’·‘노송도’·‘노매도팔곡병’·‘모란도’ 등 다수가 전한다. 소치 허련으로부터 시작된 운림산방의 화맥은 소치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손자 남농(南農) 허건(許楗) 등을 이어 5대까지 이어진다. 전 세계 화맥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소치기념관 1·2관을 둘러보고 야외벤치에 앉아 운림산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직장에서 바라보았던 운현궁의 사계(四季)가 떠올랐다. 소치는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운현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운림산방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사실이었다. 어떤 인연의 사슬에 얽혀 소치의 공간을 찾게 됐을까? 서울로 돌아와 다시 운현궁을 바라보았다. 시·공간을 걷어내니, 갓을 쓴 소치가 운현궁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걸어가는 그의 뒤태는 당당하고 위엄이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선비의 자태, 대가의 고고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울과 진도에 남은 소치 선생의 향기는 지금도 그윽했다. 그의 향기가 각박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운림산방을 끝으로 ‘별서정원, 자연에 귀의하다’ 연재를 마친다.

운림산방 내에는 소치기념관 1·2관이 있다. 소치기념관 1관에는 소치 선생의 생애와 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화실 ‘운림산방’ 전경. 관광객들이 화실 외부를 둘러보고 있다.
화실 ‘운림산방’ 전경. 관광객들이 화실 외부를 둘러보고 있다.
눈 내린 운림산방 풍경. 진도는 기온이 높은 편이다. 겨울에도 눈 보기가 어려울뿐더러, 새벽에 내린 눈이 오전 10시쯤이면 다 녹는다 하니, 설경 사진 촬영이 쉽지 않다. 〈사진=진도군청〉
눈 내린 운림산방 풍경. 진도는 기온이 높은 편이다. 겨울에도 눈 보기가 어려울뿐더러, 새벽에 내린 눈이 오전 10시쯤이면 다 녹는다 하니, 설경 사진 촬영이 쉽지 않다. 〈사진=진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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