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을
저의 등에 얹습니다”

숲속에서 부처님과 호젓하게

그날도 나는 정신이 사나웠습니다. 신선한 풀을 먹으려고 하면 다른 코끼리들이 먼저 먹어 치우거나 짓밟아버리고, 물을 마시려고 하면 어느 사이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고 흙탕물을 만들어버립니다. 암코끼리들이 경쟁하듯 몸을 부딪쳐왔고, 새끼 코끼리들은 내 다리 사이로 오가면서 장난을 칩니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코끼리 습성상 이런 일은 다반사이나 그날따라 나는 그 모든 것이 버거워졌습니다.

나는 슬그머니 무리에서 벗어났습니다. 동료 코끼리들은 그런 나를 잠깐 바라 보았지만 관심을 두지 않더군요. 나는 숲속으로 천천히 들어갔습니다. 빠릴레이야카 숲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어서 서늘한 기운에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부드럽고 서늘한 흙과 풀을 밟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립니다. 가까운 곳에 개울이나 작은 폭포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물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성가시게 느껴져 몸을 돌려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 발자국 소리를 들었을 텐데 나를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물소리·새소리·바람소리에 몸과 마음을 모두 내맡긴 듯 아주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에 이끌려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었습니다. 왕들조차도 그 앞에서 공손히 합장하고서 가르침을 청하는 분입니다. 아침 일찍 숲속 멀리서 부처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늘 제자 스님들이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십, 수백 명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대중은 어디에 있는지 부처님은 홀로 깊은 숲속 살라나무 아래에 앉아 참선에 들어 계셨습니다.

수많은 코끼리 무리를 떠나서 숲속으로 들어온 나는 부처님 곁에서 쉬기로 했습니다. 오래도록 참선을 하시던 부처님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십니다. 나는 조용히 호숫가로 가서 코로 물을 떠서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그 물을 마시고, 남은 물로 두 발을 씻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몸을 일으키신 뒤 나는 그분이 앉았던 자리를 다시 매만졌습니다. 참선을 하시기에 적당히 부드럽고 적당히 푹신하도록 풀을 준비했고, 행여 날카로운 풀이 있어 부처님 몸에 상처를 내지는 않을까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숲속에 부처님께서 홀로 와서 머무신 이유는 코삼비에 살고 있는 제자들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자 한 사람이 계율을 어겼는데 그 문제를 두고 제자들이 옥신각신했고,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다투지 말고 잘 화합하라고 간곡하게 이르셨지만, 제자들은 오히려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으니 세존께서는 참선이나 계속 하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구도자의 길을 걷는 이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자신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을 모욕한 것입니다. 부처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당신께서는 하실 만큼 다 하셨음에도 저들이 마음을 열지 않자, 간단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셨습니다. 바로 ‘홀로 가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존경을 바라서 붓다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들이 무조건 당신의 말에 무릎을 꿇기를 바라서 승가를 꾸리지는 않았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부처님은 또 부처님의 삶을 계속 살면 되는 것입니다. 숲으로 들어오신 부처님은 훗날 이런 시를 남기셨다고 합니다.

쟁기자루처럼 큰 상아를 지닌
코끼리 왕과 용왕,
그들의 마음은 서로 일치하니
숲속에서 홀로 있음을 즐긴다.

- 〈마하박가〉

이 시에서 코끼리 왕은 바로 나를 가리키고, 용왕은 세속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며 일컫는 별명입니다. 깊은 숲속에서 코끼리왕인 나와 용왕인 부처님은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무리에 얽매이지 않고 호젓하게 즐기니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얻지 못했다면 세상을 비관하지 말고, 주눅 들지도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저 유명한 〈숫타니파타〉 시구를 알고 계시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나와 함께 고즈넉한 숲속 생활을 즐기시다 또다시 싸밧티시로 떠나셨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이 떠나신 뒤 나 역시 무리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지내는 일입니다. 관계는 나를 살게 해주는 힘이 되고 내가 비빌 언덕이 되지만, 자주 나를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리 지어 다니는 코끼리조차도 이렇게 숲속으로 홀로 들어와 여유를 되찾고, 중생구제가 평생의 원(願)인 부처님조차도 이렇게 숲속에서 홀로 한가한 경지에서 노닙니다. 관계에서 이따금 과감히 벗어나도 괜찮습니다. 그래야 힘을 얻어서 다시 세상 속에서 잘 지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스리랑카 캔디의 말리가와 사찰[佛齒寺]의 부조.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시고 있는 스리랑카 캔디의 말리가와 사찰[佛齒寺]의 부조.

보현보살이 코끼리를 타는 까닭

〈묘법연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를 단적으로 밝히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신앙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즉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갖기 위함입니다. 부처님의 구제를 받기 위해 불교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되기 위해 마음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뇨. 난 부처 될 생각 없습니다. 어떻게 나 같은 중생이 감히…….”라고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된 이유는 오직 하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당신과 똑같은 부처가 되도록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묘법연화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강조하는 경전입니다. 당신은 중생으로 끝날 운명이 아니라 부처가 될 운명이라고 말이지요.

부처님이 이것을 말씀하시자 저 멀리 다른 불국토에 살고 있던 보현보살이 수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석가모니 부처님 앞으로 날아옵니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법문을 들으려고 온 것이지요. 그 자리에서 보현보살은 이렇게 맹세합니다.

“먼 훗날,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말법 세상에서 이 〈묘법연화경〉을 공부하고 마음에 잘 간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그 사람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키고 돌보겠습니다. 이 사람을 괴롭히려고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거닐거나 서 있으면서 이 경을 읽고 외우면, 저는 그때 상아가 여섯 개 달린 흰 코끼리왕[六牙白象王]에 올라 여러 큰 보살들과 함께 찾아와서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공양 올리며 편안하게 해주겠습니다. 그 사람이 앉아서 〈묘법연화경〉을 깊이 생각할 때에도 나는 흰 코끼리를 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행여 〈법화경〉의 한 구절이나 게송 한 자락을 잊어버리면 제가 그것을 일러주어서 함께 독송하고 환히 뜻에 통달하게 하겠습니다.”

보현보살은 행(行, 서원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을 상징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보살님이 다른 누구도 아닌 코끼리를 타고 이 지상에 오겠다는 맹세는, 같은 코끼리인 저로서도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뿌듯하기 이를 데가 없지요.

스리랑카의 고대 도시인 폴론나루와에 있는 불교유적 부조.

신성한 존재, 흰 코끼리

우리들 코끼리는 이렇게 신성한 존재입니다. 특히 흰 코끼리는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 권력과 행운을 상징합니다. 흰 코끼리가 나타난 곳은 현명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상징하며, 흰 코끼리가 있는 곳은 번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 군부 지도자는 밀림에서 흰 코끼리를 찾아오도록 명령했고, 세 마리 흰 코끼리를 포획한 뒤에는 한 절에 가두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성지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참배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지도자가 권력을 잃자 흰 코끼리 역시 숭배의 대상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는 서글픈 일도 전해집니다.(〈동물은 전쟁에 어떻게 사용되나?〉 앤서니 J. 노첼라 2세) 이런 에피소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람들 사이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던 흰 코끼리를 향한 경외심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마야왕비의 태에 깃들 때도 흰 코끼리가 어머니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왔다고 경전에서는 묘사합니다. 코끼리의 탄탄하고 넓적한 등에 귀한 것을 실어 운반한 까닭에 이런 의미가 덧붙여진 것은 아닐까요? 코끼리 등에 흔하고 값어치 없는 것을 실을 리 없습니다. 귀한 것, 왕가에나 어울릴 법한 것을 싣고 나릅니다. 그래서 코끼리는 대를 잇는 것을 상징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석가족 왕자로 태어난 것은 석가족의 대를 잇는 일이기도 하면서, 과거 부처님들의 계보를 잇는 일이기도 합니다.

〈묘법연화경〉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서 〈묘법연화경〉은 자칫 의심을 받고 홀대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보현보살이 우리들 코끼리를, 그것도 온몸이 새하얀 코끼리를 타고 나타납니다. 〈묘법연화경〉이 진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전만 있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열심히 읽고 그 뜻을 음미하고 사색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후대로, 후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경전을 읽고 외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동물이 아닌, 우리들 코끼리를 타고 보현보살님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보살상을 이제는 이해하시겠지요. 지금 경전을 펼치고 있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신경을 한데 모아보십시오. 가까운 곳 어딘가에 보현보살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나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현보살님을 태운 내가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며 응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령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전번역가이자 불교대학 전임강사·북칼럼니스트이며, 경전이야기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 한 말씀〉·〈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이미령의 명작산책〉·〈시시한 인생은 없다〉 등이 있다. 또 〈직지〉·〈대당서역기〉 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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