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들이
경전 그림 풀어서
민간에 불교 전해

쿠마노관심십계도.(효고현립역사박물관 소장.
쿠마노관심십계도.(효고현립역사박물관 소장.

그림을 이용한 설법, 에토키

일본에는 그림을 이용한 이야기 구연의 속강(俗講)이 발달했다. ‘그림 해설’이라고 하여 이를 ‘에토키(繪解き)’라 부른다. 대형 걸개그림이나 두루마리 그림을 관중 앞에 펼쳐놓고, 회해법사(繪解法師)가 지시봉으로 그림을 짚어가며 설명과 함께 법문을 펼치는 방식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중세 일본에 성행해 사원에서는 물론 승려 차림의 민간인 법사가 불화를 휴대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동했다. 이들은 불교를 쉽게 이해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흡인력이 강한 극락·지옥 등의 주제를 풀어내며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에토키는 일본식 변상도(變相圖) 해설에 해당한다. 경전에 담긴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변상도는 불교와 함께 자연스레 생겨났고, 이를 설법의 보조도구로 활용하는 구연 방식은 고대인도에서도 성행했다. 중국에서는 9세기 무렵에 조성된 두루마리 그림의 변상도가 돈황 석굴에서 발견돼, 에토키 또한 이러한 영향권 속에서 발달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도해(圖解) 경전인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석가모니의 전생 인연을 다룬 이 경전은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 있는데, 아래쪽에는 경전 내용을 기록했고, 위쪽에는 본문에 해당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담았다. 경전 내용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훌륭한 에토키 자료인 셈인데, 이어지는 장면과 장면 사이를 나무나 숲으로 나누는 구획방식이 돈황본 변상과 동일하다.

아울러 이러한 돈황본의 전파가 우리나라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십여 년간 이 분야를 연구한 빅터 메이어(Victor Mair)는, 당시 중국의 ‘그림이야기 구연’이 한국 승려들을 통해 일본에 전승되었을 것이라 보았다.

그림이야기 구연이 어떻게 일본에 전승되었는지 그 과정을 밝히려면 한국인들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승려들이 돈황을 방문했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집단을 이루어 살았고, 심지어 사원까지 지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어떤 사본에서는 이 사원을 ‘한사(韓寺)’라고 불렀다. 이들 한국의 승려가 변(變)을 일본에 전파한 장본인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유명한 구법승 엔닌과 중국에 온 일본의 다른 여행자들은 중국 여러 지역에 사원을 지은 한국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했다.

이야기 구연의 시청각 자료에 해당하는 ‘변문(變文)’과 ‘변상(變相)’의 전승에 신라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에토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인 1143년 자료에는 한 설회승(說繪僧)이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막대기로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때의 그림은 일본불교를 중흥시킨 성덕(聖德) 태자의 삶을 다룬 것으로, 성덕태자 또한 고구려와 백제 승려 혜자(惠慈)·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배웠으니, 일본 에토키의 시작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에토키 연행과 관련한 풍속화와 쿠마노관심십계도 관련 옛 자료. 〈사진=일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대택사(大澤寺) 홈페이지〉
에토키 연행과 관련한 풍속화와 쿠마노관심십계도 관련 옛 자료. 〈사진=일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 대택사(大澤寺) 홈페이지〉

창도문화의 전개

일본불교 역사에는 승려들 간 경전을 논하는 경론(經論)·강경(講經) 법회가 많이 등장한다. 윤소희 선생에 따르면 일본의 경론 방식은 티베트 승려들처럼 다소 소란스러운 야외 토론이 아니고, 어느 정도 정형화돼 있다. 법상종 약사사(藥師寺)는 대강당 등에 여러 개의 논의대(論義臺)를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있다.

승려들의 경론이 속강과 관련되는 부분은, 대중 앞에서 하나의 의식으로 행할 때이다. 이를테면 고야산 진언종 총본산 금강봉사(金剛峰寺)에서는 2인 1조의 승려가 서로 왼손을 잡고 큰소리로 경론 형식의 문답을 반복하는데, 그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하여 ‘원인문답(猿人問答)’이라 부른다. 실제 경론이 아니라 대사의 틀을 정해놓고 행하는 의식이니, 이를 보는 대중은 문답 내용을 통해 교리를 익히는 것은 물론 승려들의 연행이 더없이 흥미로울 법하다. 따라서 원인문답을 행하는 승려들은 상황에 맞는 애드리브로 흥미를 더하기도 한다.

대중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속강은 가마쿠라(鎌倉) 시기인 12세기에 발달했다. 이 무렵 천태종 등에서 대중설법을 위한 창도서(唱導書)를 펴내기 시작해 포교와 교화에 널리 활용하게 된다. ‘창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처럼 읊조리는 강창(講唱)을 위주로 한 포교방식인데, 그림을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이야기 전달은 민간에 널리 전파되었고, 윤광봉 선생에 따르면 정토종에서는 독특한 억양과 리듬으로 청중의 마음에 호소하는 ‘절담설교(絶談說敎)’를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인 창도서 가운데 〈언천집(言泉集)〉에 나오는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은 중세 일본인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내용을 보면 마야부인이 싯다르타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 천상계에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설법을 위해 마야부인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재회하게 된다. 이때 모자임을 증명하는 방편으로 마야부인이 “만약 내가 사바세계에서 낳은 아들이라면, 이 젖이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겠지요.”라고 말하며 젖을 짜는데, 그 젖이 멀리 날아가 석가모니의 입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수유의 장면 또한 다양한 도상으로 표현되었는데, 가장 극적인 구도는 금도평라궁(金刀平羅宮)의 두루마리 그림이다. 도상을 보면 왼쪽의 높은 곳에 선 마야부인이 오른쪽 아래에 있는 석가를 향해 젖을 짜고, 하얀 젖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석가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어머니의 은혜를 강조하는 가요로 ‘백석찬탄(百石贊嘆)’이라는 노래가 민간에 널리 유행했다. 어머니가 자식을 기를 적에 백석의 젖을 주었다는 내용으로 〈중음경(中陰經)〉·〈대승심지관경(大乘心地觀經)〉 등에는 이를 180석으로 적고 있다. 이 노래는 ‘마하마야경’을 설할 때면 종파와 무관하게 널리 불렸다. 어머니와 자식을 연결하는 상징으로서 ‘젖’을 통한 극적 상봉에 청중은 깊이 감동했으니, 이 장면의 강창 또한 가장 절절했을 듯하다.

현재 일본에는 에토키 연행을 그린 풍속화와 이를 해석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15세기 자료에는 한 남성 이 비파를 연주하는 도중에 꿩의 깃을 단 막대기로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현재 일본에는 에토키 연행을 그린 풍속화와 이를 해석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15세기 자료에는 한 남성 이 비파를 연주하는 도중에 꿩의 깃을 단 막대기로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비파 선율 실은 회해법사

12세기 이후 일본에는 불교가 사회 저변까지 스며드는데 에토키 형식의 속강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이들 그림 해설자는 승려보다 서민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불교를 주제로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경전과 불교 설화를 전하는 이들이 회해법사·속법사(俗法師)·설경사(設經師)·창도사(唱導師) 등의 이름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때 대중과 만나는 중요한 매개물이 그림이었고, 이들은 줄거리에 따라 생생한 표현과 묘사로 청중의 희로애락을 좌우했다.

회해법사는 사원·신사(神社)의 경내 또는 주변에서 일하는 부류, 거리나 시장에 머물며 일하는 부류로 나눠져 있었다. 따라서 불교권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경우에는 해당 사원이나 특정 종파에서 회해법사에게 포교의 일정 부분을 맡게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는 중세 일본에서 그림이야기 구연이 대단히 인기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문자 독해력과 무관하게 오랜 연습과 반복 공연으로 내용을 통달했고, 분위기에 따라 즉석에서 창작하기도 하면서 능숙하게 이끌어가는 이야기꾼이었다.

특히 12세기에는 그림을 걸어두고 이야기하는 한편, 직접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새로운 이야기꾼들이 등장해 그들을 ‘비파법사(琵琶法師)’라 불렀다. 이때 선율 없이 말로 하는 부분을 ‘카타리쿠(語り句)’라 칭한 것을 보면, 이야기 내용을 가락을 붙여 선율에 실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예부터 ‘카타리모노(語り物)’라 하여 이야기에 가락을 붙이고 반주를 넣어 낭독하는 예능 전통이 있어, 불교를 기반으로 한 회해법사·비파법사도 카타리모노와 결합한 것이라 하겠다.

일본에는 현재 에토키 연행을 그린 풍속화와 이를 해설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15세기의 자료로, 낮은 계급의 사무라이 옷을 입은 남성이 그림을 담은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에토키를 연행한 풍속화가 전한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꺼내 펼쳐놓은 다음, 비파를 연주하는 가운데 중간중간 멈추어 꿩의 깃을 단 막대기로 장면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아시아권의 속강법사들은 그림을 짚을 때 이러한 지시봉을 사용해 그림의 안료를 보호했다.

또 다른 17세기 풍속화에는 ‘노래하는 비구니[歌比丘尼]’라 불리는 여성 에토키 공연자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실제 비구니가 에토키를 행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예인 가운데 한 여성이 특유의 노래 솜씨로 그림을 해설하는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풍속화를 해설한 내용에 따르면, 그녀들의 에토키 연행은 여성의 몸으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회해법사들이 그림을 활용하는 방식도 다채로워 여러 장면을 나누어 그린 걸개 두루마리에서부터 한 장씩 크게 그려서 넘기는 그림, 바닥에 펼치도록 만든 두루마리 그림 등이 있었다. 인형이나 작은 조각상을 들고 다니면서 그림에 따라 인형을 움직여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는가 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책자 형태의 삽화를 펼쳐놓고 구연하기도 했다. 그들은 언변과 목청이 좋고 연기에도 뛰어났는데, 불교 교리에 해박할수록 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니 오늘날의 민간법사와 다를 바 없다.

일본 와카야마현 신미야[新宮]시관광협회는 쿠마노관심십계도를 걸어놓고 관광객들에게 육도윤회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 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 복장을 한 협회 직원의 연행 모습. 〈사진=신미야시관광협회〉
일본 와카야마현 신미야[新宮]시관광협회는 쿠마노관심십계도를 걸어놓고 관광객들에게 육도윤회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프로그 램을 운영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 복장을 한 협회 직원의 연행 모습. 〈사진=신미야시관광협회〉

쿠마노 비구니와 관심십계도

불교와 신도(神道)의 성지 쿠마노(熊野)는 지상과 천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일본인들의 대표적인 성지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에토키 여성법사 가운데는 이곳 출신이 많아 특별히 ‘쿠마노 비구니’라 불렸다. 구족계를 받은 정식 비구니는 아니었지만, 사원과 신사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기도 하는 반승반속(半僧半俗)의 법사였다.

이들은 성인 비구니와 어린 비구니가 짝을 이루어, 대나무 삿갓을 쓰고 깃발을 짊어진 채 징을 치며 쿠마노 신앙을 각지에 전파했다. 주요 활동은 사원의 건립과 보수를 위해 거리나 가정을 방문해 호신부(護身符)를 팔며 시주를 청하거나, 노래와 함께 그림을 해석해주며 민중을 교화하는 일이었다. 특히 쿠마노 비구니는 아미타 신앙에 의지해 여성들의 교화에 주력했고, 민간에서는 이들의 에토키를 듣거나 그림을 보는 것이 쿠마노를 순례하는 것과 같은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지니고 다닌 그림 중 ‘쿠마노관심십계도(熊野觀心十界圖)’는 시공을 초월한 수많은 도상으로 불교의 세계관과 생사 문제를 담고 있는 특별한 불화이다. 아미타여래와 ‘심(心)’ 자가 핵심을 이루는 가운데, 갓 태어난 아기가 성인과 노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단계를 ‘늙음의 언덕’이란 도상으로 표현했다. 또 지옥에서 천상까지의 육도(六道)와 불·보살·연각·성문의 사성(四聖)을 합한 십계(十界)를 나타냈다. 따라서 법사는 필요한 장면을 짚어가며 생사의 무상함과 함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십계 가운데 지옥 도상을 가장 비중 있게 다루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점이 주목된다. 김자현 선생에 따르면 이 그림이 제작된 16세기 중엽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서민층에서도 가문의 형성과 계승을 중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많은 이들이 전쟁으로 사망함에 따라 사후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다양한 지옥 도상이 생겨났고, 한편으로는 출산과 관련된 불산녀지옥(不産女地獄)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 그림은 두 명의 여성이 대나무밭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노후를 보살펴줄 자식이 없으면, 스스로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해 일어서야 하는 고통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표현한 것이다. 가문의 존속을 위해 여성의 후손 생산을 중시했던 풍조가 반영된 장면이다.

이처럼 일본의 속강은 그림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전승되었다. 그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에토키를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사원이 50군데에 달했다. 근래에는 관심이 줄어들면서 에토키를 활성화하기 위한 연구회가 생겨나는가 하면, 2007년에는 동경의 축지본원사(築地本願寺)에서 ‘절담설교(絶談說敎) 포교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에토키에 대한 풍성한 자료가 전하는 만큼, 전승을 위한 관심도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구미래
불교민속학 박사. 동국대·중앙대·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등에서 불교의 의례·무형유산·세시풍속 등에 대해 강의했고, 현재 불교민속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일생의례〉·〈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존엄한 죽음의 문화사〉·〈한국인의 상징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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