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의 가르침 찬탄하고
법의 공양을 서원하다

가마쿠라시대에 조성된 흥복사(興福寺) 동금당(東金堂) 목조유마거사좌상(木 造維摩居士坐像). 명문에 의하면 1196년 죠우케이(定慶)가 조성했다. 문수보살 과 토론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높이 88.1cm.
가마쿠라시대에 조성된 흥복사(興福寺) 동금당(東金堂) 목조유마거사좌상(木 造維摩居士坐像). 명문에 의하면 1196년 죠우케이(定慶)가 조성했다. 문수보살 과 토론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높이 88.1cm.

∷ 무대 _ 인도 바이샬리 성, 유마거사의 방. 부처님의 처소(암라팔리 숲)

∷ 주요 등장인물
부처님, 유마거사, 사리불, 아촉불, 제석천, 미륵보살, 약왕여래, 월개왕자, 미륵보살

∷ 함께 한 대중 _ 많은 보살대중과 성문대중, 천신들

∷ 주요 전개 과정
부처님이 유마거사에게 “어떻게 여래를 보는가?”하고 묻자, 유마거사는 자신이 여래를 보는 관점에 대해 “여래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지만 모든 것을 넘어서 있으며,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진정한 진리와 참 생명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대답한다. 이때 사리불이 유마거사의 전생(前生)을 묻자 유마거사는 “참된 진리에는 죽고 남이 없으며, 거짓 존재인 환상에 죽고 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이때 부처님이 유마거사는 무동불(無動佛=阿閦佛)이 계시는 묘희국(妙喜國)에서 살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려주신다. 이어 부처님이 유마거사에게 “이곳 대중에게 묘희세계를 보여주라.”고 청하자 유마거사는 신통으로 묘희세계를 이곳으로 옮겨온다. 모든 대중이 무동불의 묘희세계를 보고 큰 환희심 속에서 서원을 발하며, 부처님은 모든 이들이 그 세계에 태어날 것이라고 수기(授記)하신다.

제석천이 지금까지 들은 법문의 위대함을 찬탄하고 이것을 잘 지켜 세상에 전할 뜻을 부처님께 아뢴다. 부처님은 이 가르침이 참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거듭 밝히며, 이런 참된 가르침을 세상에 펴는 법공양의 비할 데 없는 공덕에 대해 과거 약왕여래 세상의 보개왕이 참된 법공양에 뜻을 깨닫고 실천한 사례를 말씀하시며, 그의 아들인 월개(月蓋)왕자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 가운데 하나였음을 밝힌다.

부처님이 미륵보살에게 이 가르침을 널리 유포시킬 것을 부촉하시자 미륵보살은 온 힘을 다해 그 뜻을 받들겠다고 다짐하며 모든 보살과 천신도 동참하겠다고 서원한다. 부처님은 아난존자에게 이 경을 받아 지녀 널리 펴라고 말씀하신다. 부처님께서 정해주신 경의 이름은 〈유마힐소설(維摩詰所說)〉이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유마의 지혜와 변재

이번 호로 저의 〈유마경〉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분수에 넘는 행동을 시작한 업보로 적지 않게 고생을 했습니다. 몇 해 전 모 불교계 신문에 매주 연재를 했을 때는 그리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달에 한 번 비슷한 분량의 원고를 쓰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왜 그럴까요? 원인은 단 하나입니다. 이번 원고는 경전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식으로 가볍게 쓰겠노라 선언하고 시작했지만, 역시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다룬다는 것은 엄청나게 부담스럽더군요. 그런 고생을 하면서 2년을 이끌어온 저 자신에게 조금은 칭찬을 해주고도 싶습니다.

마무리하는 마당에 밝혀둘 게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한 권의 참고서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물론 꽤 오래전에 도반들과 〈유마경〉을 여러 번 윤독한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참고서를 봐가면서 읽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글이 잘났든 못났든 저 나름대로 〈유마경〉을 읽고, 그 뜻에 대해 치열하게 모색하고, 그렇게 발효·숙성 과정을 거쳐 나왔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독자님들도 “성태용의 못난 이야기에 그래도 볼만한 게 있나?”하는 생각으로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혹 한두 가지라도 건지셨다는 분이 있으면 저로서는 정말 행복한 일이겠습니다.

이번 마지막 회에서는 정말 그런 저나름대로의 이야기를 한껏 풀어볼까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지요? 우선 아촉불(阿閦佛)을 뵙는 품부터 시작해볼까요?

부처님이 유마거사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부처(여래)를 어떻게 보는가?” 현장(玄奘, ?~664) 스님의 번역에는 “그대는 여래의 몸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인데, 어떻게 여래를 본다고 하겠는가?”라고 되어 있네요. 여기 나를 보러 왔는데, 이 육체를 가진 나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진리의 현현이요, 참 생명의 온전한 실현인 여래의 참모습을 보는 것인가? 이런 느낌이 드네요. 〈금강경〉에 “32상으로 여래를 보는가?”라는 물음이 있는데, 그런 맥락이 아닌가 싶네요. 이에 대해 유마거사는 참으로 장광설로 여래를 보는 올바른 방법을 말합니다. 그 변설이 참으로 휘황찬란합니다. “…… (여래는) 과거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 차안(此岸)에 있는 것도, 피안(彼岸)에 있는 것도, 그 중간[中流]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십니다. ……” 이런 유마거사의 말을 하나하나 쫓아가다 보면 오히려 부처님을 보는 관점을 잃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합니다. 차안, 즉 이 고해의 세상에 몸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에게 매달려서도 안 됩니다. 피안, 즉 열반의 진리에 머문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이 사바세계에 몸을 나타내신 부처님을 매개로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참 진리를 깨달아 참 생명을 온전히 실현하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이라는 조건 속에 육신을 나타내, 그 조건에 맞는 팔만사천 대기설(對機說)을 펴신 그 모습을 바로 보아야지요. 궁극의 진여라는 관점에 매달려 현실 조건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앞서 ‘제자품’에서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병 때문에 우유를 얻으러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부처님 몸에 무슨 병이 있겠느냐?”는 유마거사의 힐난에 아난존자가 어쩔줄 몰라할 때, 부처님 목소리가 들려오지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셨기에, 그 육신의 덧없음을 보이기 위해 병을 앓으신다구요. 그러니 우유 공양을 받아서 오라구요.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중도적인 관점에서 부처님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묘희세계

아무튼 유마거사의 지혜와 변재에 느낀 바가 있었는지, 사리불존자가 묻습니다. “유마거사는 어떤 세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이 사바세계로 태어났는가?” 이에 유마거사는 근본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그 물음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근본 진리에는 오고 감, 태어나고 죽음 등의 차별적 관념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또 이 몸이라는 것은 환상과 같은데 그 환상에 낳고 죽음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나가면 전혀 이야기 진행이 안 되겠지요? 이때 부처님이 슬그머니 이야기의 물꼬를 틉니다. “묘희국(妙喜國)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는데, 부처님의 이름은 무동(無動=阿閦)이다. 유마힐은 그 나라에서 죽은 후 이곳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자 모든 대중이 그 청정한 국토에서 이 사바세계에 온 유마거사를 찬탄하는 마음을 내고, 그 세계를 궁금해합니다. 부처님께서 대중의 마음을 빌미로 유마거사에게 그 세계를 대중들에게 보여주라고 권합니다. 이에 유마거사는 신통력으로 그 세계를 오른손으로 떼어내 이 세계 속에 들여놓습니다. 〈유마경〉에 표현된 ‘마치 꽃다발을 손에 든 것처럼’ 말이지요. 〈유마경〉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사자좌를 빌려오고, 또 다른 세계에서 향기로운 밥도 얻고, 대중들도 데려오고, 이제는 딴 세계를 뚝 떼어 이 세계 속에 들여놓네요. 그런데 그 세계와 이 세계가 전혀 서로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엄청난 이야기가 마치 일상의 일처럼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깊고도 깊은 비유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유마경〉입니다. 지금의 세계로 들여온 세계의 부처님은 아촉불, 뜻으로 말하면 무동여래입니다. 움직임이 없다는 그 부처님이 유마거사 손길에 그 세계와 함께 뚝 떼어져 이 세계로 왔네요. 이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움직임 없는 부처님이 들어온 것인가요? 여기서 한 번 헛소리 같은 게송 하나 읊고 지나가렵니다.

유마의 현묘한 침묵이 강물 같은 웅변을 쏟아내니
무동부처님 오묘한 환희, 그 감응이 번개와 같구나!

한문으로는 “維摩玄默吐懸河 無動妙喜感如電” 정도 될까요? 슬쩍 부려본 객기이니,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어가 주세요. 아무튼 무동부처님의 오묘하고 기쁜 세계를 본 모든 대중은 큰 환희심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고 그 오묘한 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모든 대중이 반드시 그 불국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수기를 주십니다. 여러분도 그 오묘한 환희의 세계, 움직임을 넘어선 그 세계에 가고 싶다고요? 잠깐! 여러분 기억을 휘익 돌려 보시지요. ‘보살품’에서 미륵보살이 수기 문제로 유마거사에게 힐난을 당하던 이야기를 더듬어 보세요. 이치상으로 볼 때 미륵보살이 수기를 받았다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논리로 여러분도 묘희세계 무동부처님 앞에 태어날 수기를 받은 겁니다. 우리 모두 기뻐하고 축하합시다. 이런 거룩한 수기에 동참하게 하는 〈유마경〉을 찬탄합시다.

제석천이 대표로 이러한 찬탄을 부처님께 아뢰네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불가사의한 가르침이란 것을 찬탄하고, 이 가르침을 받들고 실천하는 이들은 부처되는 길로 물러남 없이 나갈 것이며, 한없는 복을 누릴 것이라고요. 그리고 자신은 이 가르침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들을 것이며, 이 가르침에 동참하는 이들을 보호해 어떤 장애도 없도록 하겠다구요. 그러자 부처님은 제석천을 칭찬하면서 “이 참된 가르침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며 남에게 전하는 이들이 누리는 복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없이 많은 부처님께 한량없는 보시를 행한 공덕보다도 이 가르침을 받들고 실천하며 전파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말이지요. 〈금강경〉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요? 법보시의 공덕은 그렇게 큰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통해 말씀해 주시네요. 약왕여래 시절 보개라는 전륜성왕의 아들인 월개 왕자가 약왕여래에게 법보시의 공덕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실천해 큰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고, 한없이 많은 중생을 이롭게 했으며, 결국 부처를 이루었다고요. 그 월개 비구는 바로 전생의 당신,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곤 미륵보살에게 “이 가르침을 널리 유통시켜 소멸하지 않도록 하라.”고 부촉하십니다. 미륵보살은 기쁨에 차서, 후세에 이 가르침을 지녀 외우고 실천하며 남에게 전하는 이들을 수호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온 모든 보살, 모든 천신 또한 동일한 다짐을 하고 서원합니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유마힐소설

이제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아난존자에게 이 가르침을 받아 지녀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부촉하십니다. 아난존자가 이 가르침의 이름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난아, 이 경전을 ‘유마힐이 설한 것[維摩詰所說]’이라고 이름하며, 또 ‘불가사의한 해탈의 진리[不可思議解脫法門]’라고 이름한다. 이같이 받아 지니도록 하여라.”

이크! 마지막이 아니군요. 부처님께서는 지금의 우리에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부촉하셨습니다.

“지금 너희들 세상에는 불교라는 이름 아래 내 가르침에서 벗어난 가르침이 날뛰고, 대승이라는 이름을 쓰고서는 소승의 행태를 하는 무리들이 행세를 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 또한 내 가르침을 잇는 하나의 흐름이겠으나, 그것을 조금 바로잡아 진정한 내 뜻을 펼치게 할 수 있다면 내 가르침의 빛이 온 누리를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은 그런 일을 하는데 가장 올바른 기준이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으니, 그 깊은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며, 널리 펴도록 하라! 그 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 보시를 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그리고 수기를 주실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실천하며 전하는 법보시의 공덕으로 너희 모두 묘희세계 무동불 앞에 태어날 것이며, 계속 지혜와 자비의 길을 걸어 마침내 부처를 이룰 것이니라!”

어설프게나마 이런 부처님의 부촉과 수기를 여러분께 전한다는,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합니다. 부족한 저의 생각이 이 현실의 불교를 좀 더 대승의 본래 뜻에 가깝게 하는데 조그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저의 뜻이 눈밝은 이의 호응을 얻는 행운이 있어, 부처님 가르침이 빛나는 세상을 이루는 작은 흐름이라도 일으키기를 기원합니다. ‘보살품’에 나왔던 ‘꺼지지 않는 등불’[無盡燈]의 가르침에 이런 저의 바람을 담으면서 ‘성태용의 이야기 〈유마경〉’ 연재를 마칩니다.

“한 등불로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밝히니 어둠이 모두 밝아지고 그 밝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같이 한 사람의 보살이 백천 중생의 마음을 열고 이끌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모든 선법(善法)이 자꾸만 늘어나게 하는 것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히는 그 길에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저도 그 길에서 여러분들을 뵙겠습니다.

성태용
전 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의 ‘한학자 양성 장학생’으로 선발돼 故임창순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 EBS에서 ‘주역과 21세기’라는 제목으로 강의했으며, 한국철학회 회장과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주역과 21세기〉·〈어른의 서유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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