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황제가 네팔 수상에 전한 씨앗
히말라야 기슭에 녹색정원 꽃피워

네팔 일람의 차밭 풍경. ⓒGettyimagesBank

3억 3,000의 신을 섬기는 나라, 네팔은 인류 최고의 스승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다. 이곳이 해외 여행지 버킷리스트 1호였던 필자는 2001년 9월 이근후 박사(이화여대 의과대학 명예교수)가 이끄는 해외 의료봉사팀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네팔 땅을 밟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네팔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9·11테러’가 발생해 네팔 방문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의료봉사를 미룰 수 없다는 이근후 박사의 의지가 네팔행을 성사시켰다.

9월 19일 카트만두에 도착해 의료봉사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를 참배한 후 네팔 최고의 휴양지 포카라(Pokhara, 해발 800m)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당시 포카라는 9·11테러의 영향으로 관광객이 뚝 끊겨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필자가 일람 차밭을 처음 방문한 해는 2010년 10월이다. 첫 방문 때, 페와호(Phewa Tal) 중앙에 위치한 힌두교 사원에서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두(Sadhu, 힌두교 수행승)를 만났는데, 약간의 돈을 기부하자 그는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사진촬영 후 그는 빙그레 웃으며 차 한 잔을 내밀었다.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며 사두가 건네준 차 한 잔의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신들의 정원에서 차를 마신 느낌이랄까?

필자가 2010년 네팔 일람 차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페와호 중앙 힌두사원에서 만난 수행자. 〈사진=최오균〉

일람 차밭 가는 길

히말라야 설산과 사두가 건넨 네팔의 차 맛에 매료된 후 자꾸만 네팔에 가고 싶어졌다. 세상 모든 일은 인연을 따라 흘러간다고 했던가? 네팔에 마음이 쏠렸기 때문인지 필자는 이후 네팔 동부 칸첸중가 인근 거우라다(Gauradha, Jhapa) 오지마을에 살고 있는 빈곤 아동들에게 생활비를 후원하며 학교에 보내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여섯 차례 네팔을 방문했고, 거우라다 지역과 가까운 네팔의 주요 차 생산지인 일람(Ilam)의 차밭을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네 차례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거우라다와 일람 차밭을 가려면 카트만두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1시간 정도를 날아가야 한다. 후원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24인승 예띠항공 프로펠라 경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 공항에서 이륙하면 곧바로 히말라야 설산이 끝없이 펼쳐진다. ‘재재처처 약유차경(在在處處 若有此經)’. 불자인 필자의 눈에는 만년설을 이고 우뚝 솟아있는 히말라야 설산 그 자체가 시방세계에 항상 계시는 제불보살처럼 보였다.

2010년도 10월 첫 방문 때의 일이다. 거우라다에서 봉사 일정을 마친 후 버스로 일람 차밭을 향해 가다가 칸카이(Kankai) 강에서 행해지는 화장식을 볼 기회가 있었다. 히말라야산맥은 크게 네 개의 산맥으로 나눠지는데, 칸카이 강은 그 중 마하바라트 산맥에서 발원해 일람과 자파지역 테라이 평원을 통과해 인도 비하르주로 흘러가는 성스러운 강이다. 잠시 버스를 멈추고 칸카이 강에서 거행하는 화장식을 바라보았다. 강가에 안치한 시신은 황금색 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시신 옆에는 한 무더기의 장작더미가 쌓여있었다. 주검을 앞에 둔 사람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사람들은 슬픔에 차 있었지만, 소리를 내서 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생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만큼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말했는데,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보였다. 부처님께서는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즉 ‘나고 죽는 생멸의 모든 형상을 초월해야 열반에 들 수 있다.’고 설하셨지만, 망자를 보내는 중생이 어찌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소라고둥이 길게 울린 후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에서 망자는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져갔다.

화장식을 바라보며 숙연해진 일행은 동행했던 스님의 목탁 소리에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크게 부르며 일람 차밭으로 향했다.

차밭으로 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험하다. 버스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뚫고 굽이쳐 돌아가는 좁은 비탈길을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기어 올라가야 한다. 도대체 일람 차밭에는 무엇이 있길래 위험을 안고 이 험한 비탈길을 가는 걸까?

일람 차밭에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포카라 페와호. 네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호수에는 히말라야산맥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히말라야 기슭에 일렁이는 차밭

비탈길을 벗어나자 이윽고 탁 트인 히말라야 기슭에 신기루 같은 녹색 차밭이 펼쳐졌다.

“오, 이곳은 하늘 속의 정원이네요!”

풍전등화 같은 위험한 길을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사로잡혔다. 안수정등(岸樹井藤), 방금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목격했음에도 우리는 한 방울의 꿀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있었다.

칸첸중가 기슭에 펼쳐진 일람 차밭은 총면적 7,236ha로 36개의 대규모 농장과 8,876개에 이르는 소규모 농장이 얼기설기 어우러져 있다.

일람 차밭 중에서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은 카니암 차밭(Kanyam Tea Garden)이다. 카니암 차밭에서 내린 일행은 차밭 사이로 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푸른 차밭을 흔들자 풋풋한 찻잎 향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하늘에는 잡힐 듯한 구름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구름 속 신선이 된 듯했다. 카니암 차밭은 풍경이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해 ‘동부 네팔의 여왕(Queen of Eastern Nepal)’으로 불린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에게 최고의 촬영지로 주목을 받고 있으며, 최근 피크닉과 승마를 즐기는 관광지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필자는 인도 다르질링, 문나르 지역 차밭과 스리랑카 누와라 엘리야, 중국 윈난성 차밭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곳 일람 차밭을 거니는 느낌은 그 어느 곳보다 특별했다. 히말라야 설산이 주는 특수한 지리적·기후적 여건 때문일까? 차의 맛과 품질은 기후·고도·토양 그리고 수풀이 호흡하는 공기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인도 다르질링과 접경을 이룬 히말라야 기슭의 일람 차밭은 이러한 조건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네팔 일람의 차나무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구름, 빗물로 성장을 한다. 그래서일까? 이 차나무에서 수확해 덖어낸 네팔 전통 차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카니암 차밭에서 오래된 곰파(티베트 수도원)와 차 공장을 견학하고 인근의 작은 도시 피칼(Fikkal)을 방문했다. 다르질링에서 불과 54km 떨어져 있는 피칼은 네팔 동부 일람의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시장에는 찻잎·가공차·생강·카다몬(Cardamon) 등이 진열돼 있었다. 피칼에서 점심식사 후 더 깊고 높은 지역에 위치한 차밭인 쉬리 안투(Shree Antu, 해발 2,300m)에 있는 산장에 여장을 풀었다.

그림 같은 호수에 차밭이 둘러싸여 있고, 차밭 안에는 동화 속 예쁜 오두막이 들어서 있었다. 마치 도솔천에 정원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차를 마시며 명상을 하고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아침저녁으로 차를 마시며 가부좌를 틀고 앉자 저절로 명상에 빠져들었다. ‘차선일미(茶禪一味)’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육법공양(六法供養, 향·등·꽃·과일·차·쌀 등 여섯 가지 공양물)에 차가 들어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른 새벽에 다나 전망대(Antu Danda Hill)에 올라가 칸첸중가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했다. 이곳은 칸첸중가 일출을 감상하기에 최고의 장소이다.

일람 차밭 중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나다는 카니암 차밭. ⓒGettyimagesBank

160년 전 중국서 씨앗 가져와

네팔의 차 재배는 약 160년 전 네팔 정 바하두르 라나(Jung Bahadur Rana, 1817~1877) 수상이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황제가 선물로 준 씨앗을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온 라나 수상은 일람 지역 책임자로 있던 가자라즈 싱 타파(Gajaraj Singh Thapa)에게 차를 재배하도록 지시했다. 라나 수상과 처남 매부지간인 타파는 절대권력자인 라나 수상의 지엄한 지시를 받고 고민하던 중 일람과 지리적 조건이 유사한 인도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영국인들이 차를 재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사람을 보내 차 재배법을 배워오게 했고, 네팔 최초로 차를 재배하게 됐다.

그러나 네팔의 초기 차 생산량은 내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차 산업이 후퇴한 이유는 라나 왕조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그에 따른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침체되었던 네팔의 차 산업은 1950년 민주화 운동 이후 공공 및 민간부문에서 차 산업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1959년 테라이(Terai) 지역에 개인 소유 농장 ‘부다카란 티 에스테이트(Bhudhakaran Tea Estate)’가 설립되었고, 1966년 네팔 정부는 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 ‘네팔차개발공사(NTDC, Nepal Tea Development Corporation)’를 설립했다. 1978년에는 일람에 찻잎 가공을 위한 첫 번째 공장이 세워졌고, 몇 년 후 자파(Japa) 지역에 또 다른 공장이 설립되었다.

빗물·바람이 빚은 일람 전통 차

1978년부터 1990년대까지 NTDC는 차의 재배와 생산에 소농인들의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차 재배를 환금작물로 인정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네팔의 차 산업은 상업화된 산업으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진일보한 차 산업의 발전을 위해 네팔 정부는 1982년 일람(Ilam)·자파(Jhapa)·판츠타르(Panchthar)·단쿠타(Dhankuta)·테르하툼(Terhathum) 등 5개 지역을 네팔의 차 재배 지역으로 선언하여 히말라야 기슭 2,000m 높이에 차 생산 벨트를 형성하고 본격적으로 차를 생산하게 되었다.

네팔의 전통 차 오서독스(Orthodox)는 일람 차밭에서 총생산량의 81%에 해당하는 584만kg이 생산된다. 기후와 지리적 조건이 비슷한 인근의 다르질링에서 차 재배기술을 배워왔기에 네팔의 차 재배방법은 다르질링과 비슷하다.

3월 넷째 주부터 시작해 4월 말 사이 수확한 첫물차[First Flush]의 연한 황록색의 부드러운 잎은 은은한 향과 섬세한 맛을 가지고 있다. 5월 둘째 주부터 7월 마지막 주 사이에 수확하는 두물차[Second Flush]는 첫물차보다 찻잎이 더 완벽하게 구성돼 과일 향이 난다. 일부 전문가들은 두물차를 최고의 차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기인 7월 마지막 주부터 9월 말까지 수확한 여름차[Monsoon Flush]는 수분이 많이 포함돼 색과 맛이 강하다. 10월부터 11월 말까지 수확한 세물차[Autumn Flush]는 무스카텔 향미(Muscatel flavor), 풍부한 향기, 호박색이 어우러져 아침에 우유를 가미하여 마시기도 한다.

차의 가공방법 중 하나로 CTC가 있다. 찻잎을 부수고(Crush), 찢고(Tear), 곱슬곱슬 말아서(Curl) 가공하는 방법인데,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원통형 롤러에 잎을 통과시켜 작고 단단한 홍차 알갱이로 만들어낸다. CTC 차는 아삼 종류의 품종으로 덥고 습한 테라이 평원 자파(Jhapa, 506m) 지구에서 재배되며, 주로 네팔인들이 즐겨 마시는 밀크티 ‘찌야(Chiya Tea)’를 만들어 네팔 국내에서 소비된다.

2021년 네팔의 차 수출량은 1,190만kg으로 이중 인도에 1,140만kg을 수출하고 있다. 상술에 능한 인도인들은 네팔 차를 인도 다르질링 차로 둔갑시켜 판매해왔다. 네팔 전통 차생산자협회(HOTPA, Himalayan Orthodox Tea Producers Association)는 네팔 전통 차의 글로벌 시장 잠재력을 실현하고,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존중, 생산 시스템에 대한 존중이라는 행동강령을 발표하는 등 전통 차의 기준을 국제 수준에 맞추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하며 네팔의 차 산업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다.

네팔 차는 그동안 낮은 대외 인지도로 ‘다르질링, 인도(Darjeeling, India)’라는 상표를 달고 해외로 수출해야만 했다. 하지만 2018년부터 네팔 차 및 커피 개발위원회(National Tea and Coffe Development Board)와 차생산자협회가 공동으로 수출품에 자체 브랜드를 표기해 수출하고 있다. ‘히말라야에서 온 네팔산 품질 좋은 차(Nepal Tea : Quality From The Himalayas)’라는 글자 위에 히말라야산맥 이미지를 고유 로고로 만든 디자인이다. 네팔에 차가 전래된 지 154년 만에 ‘인도 다르질링’ 브랜드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자체 브랜드로 수출을 시작한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일람 차밭 깊숙한 곳에 위치한 쉬리언투 차밭. 차밭 옆으로는 호수가 펼쳐져 있다. 〈사진=최오균〉
일람 차밭 깊숙한 곳에 위치한 쉬리언투 차밭. 차밭 옆으로는 호수가 펼쳐져 있다. 〈사진=최오균〉
일람 차밭으로 가던 중 칸카이 강에서 보게 된 화장식. 황금빛 천으로 덮인 시신 옆에 한 무더기의 장작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슬 픔에 차 있었지만 소리 내어 우는 이는 없었다. 〈사진=최오균〉
일람 차밭으로 가던 중 칸카이 강에서 보게 된 화장식. 황금빛 천으로 덮인 시신 옆에 한 무더기의 장작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슬 픔에 차 있었지만 소리 내어 우는 이는 없었다. 〈사진=최오균〉
네팔 정 바하두르 라나 수상은 청나라를 방문해 청 황제로부터 차나무 씨앗을 선물로 받아와 네팔에 차 나무 재배를 시작했다. 
네팔 정 바하두르 라나 수상은 청나라를 방문해 청 황제로부터 차나무 씨앗을 선물로 받아와 네팔에 차 나무 재배를 시작했다. 
찻잎 가공방법 중 하나로 CTC가 있다. 찻잎을 부수고(Crush), 찢고(Tear), 곱슬곱슬 말아서(Curl) 가공하는 방법이다. 네팔인들은 이렇게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홍차 알갱이로 밀크티 ‘찌야’를 만들어 마신다. 거리에서 차를 파는 네팔 여인. 〈사진=최오균〉
찻잎 가공방법 중 하나로 CTC가 있다. 찻잎을 부수고(Crush), 찢고(Tear), 곱슬곱슬 말아서(Curl) 가공하는 방법이다. 네팔인들은 이렇게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홍차 알갱이로 밀크티 ‘찌야’를 만들어 마신다. 거리에서 차를 파는 네팔 여인. 〈사진=최오균〉

최오균
오지여행가. 희귀난치병을 앓는 아내와 함께 세계 80여 개국을 여행했다. 숲해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현재 (사)헬핑로드 이사로 재직하며 네팔 일람차밭 인근 오지마을 가난한 어린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봉사활동을 10년 넘게 하고 있다. 저서로 〈사랑할 때 떠나라〉·〈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부탄〉·〈아주 특별한 치유여행〉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