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호

기근 속 신품종 개발
가뭄 때 측우기 발명
세종 치세는 애민의 산물

세계 곳곳에서 기후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직접적 원인은 인류가 쏟아내는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온난화다. 서둘러 기후 위기 타개책과 후손들에게 안전한 지구를 물려줄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상 기후는 과거에도 있었다. 현군(賢君)이 있을 땐 슬기로운 대안을 찾아냈고, 그렇지 않을 땐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군, 세종대왕은 기후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누런 비의 비밀을 찾아서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 눈병 치료를 위해 온수현(溫水縣)의 온양 온천에 행차한 어느 날, 한양(현 서울)을 지키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급하게 서신을 보냈다. 요컨대, 누런 비가 내려 민심이 흉흉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을 시켜 궁궐 마당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소나무 꽃가루가 섞여 있었습니다. …… 그런데 밤사이 비가 고인 그릇을 가져다 보니 소나무 꽃가루가 없었습니다. 누런 비가 하늘에서 내렸다면, 땅에만 내리고 그릇에는 내리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 맛을 보니 매운 것이 바로 소나무 꽃가루와 같았습니다. 또 사람을 시켜 소나무 꽃가루를 가져다 물에 넣어보았더니, 궁궐 마당에 괴어 있는 누런 것과 형상도 비슷합니다. …… 소나무 꽃가루가 쌓였다가 비 때문에 떠오른 것일 뿐입니다. 누런 비가 내린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 〈세종실록〉 23년 4월 26일

전통시대(傳統時代)에는 하늘의 대리자인 ‘나라님’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늘이 가뭄·홍수·지진 등 각종 이상 현상이나 재해를 통해 꾸짖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정을 운영하면 하늘은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결국 멸망시키고, 반면 임금이 ‘감선(減膳)’이라 하여 반찬 수를 줄이거나 정책 개선을 위해 여론을 수렴하는 등 근신하는 태도를 보이면 하늘은 노여움을 거둔다고 보았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한(漢)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정립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정치 현장에서 작동하는 모습이다.

이런 사고가 여전히 통용됐던 조선시대에 ‘누런 비가 내렸다.’고 하니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겠는가? 신하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임금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안평대군은 과학적 태도로 이 사태를 바라보았다. 정체불명의 누런 물체를 직접 관찰하고 맛까지 본 후 “소나무 꽃가루가 땅에 쌓여 있다가 비가 오니 물 위에 뜬 것일 뿐”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하늘의 계시’라는 비과학적인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까지 덧붙였다.

주장이 논리적이고, 다른 이도 아닌 아들의 말이니 바로 받아들일 법하다. 하지만 세종은 판단을 보류하고, 일단 관행에 따라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성은 논리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고, 정치는 민심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 구성원의 의견을 보고하게 하는 동시에, 시중을 들던 환관을 한양으로 보냈다. 환관이 현장에서 가져온 누런 물체를 확인했는데, 안평대군의 주장대로 소나무 꽃가루였다.

결국 세종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땅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바로 여러 날 쌓인 소나무 꽃가루가 날아온 것이 비가 쓸려내려 물 위에 뜬 것이 틀림없다.”고 확인하며, 누런 비 소동을 마무리 짓는다. - 〈세종실록〉 23년 5월 1일

문종의 세계 최초 우량계 발명

그런데 앞서 안평대군이 말한, 궁궐에 놓인 ‘밤사이에 비가 고인 그릇’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힌트는 아래 실록 내용에 있다.

“세자가 가뭄을 걱정하며, 최근 몇 년간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서 흙이 젖어 들어간 깊이를 살펴보곤 했다. 하지만 내린 비의 깊이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구리로 그릇을 만들고 궁궐에 두어, 그 그릇에 빗물이 고인 높이를 측정하며 실험했다.”

- 〈세종실록〉 23년 4월 29일

안평대군의 보고를 받은 사흘 후, 신하들과 함께 누런 비의 정체와 그에 따른 대책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릇’에 대한 정보가 공개된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가 그릇의 설계자로 밝혀진다. 가뭄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며, 몇 년간 궁궐에 구리 그릇을 놓고 고인 빗물의 높이를 측정했는데, 말하자면 과학 기구를 발명해 정량적으로 강우량을 관측한 것이다.

호조(현 기획재정부·국세청·통계청을 통합한 관청)에서 아뢰었다. “전국에서 감사가 강우량을 보고하도록 이미 법률이 제정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마다 흙의 건조하고 습한 정도가 같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비의 얕고 깊은 정도도 알기 어렵습니다.”

- 〈세종실록〉 23년 8월 18일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국가 차원의 강우량 측정의 제도화는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일이었다. 관련 기록이 개국 초기인 태조 때부터 발견될 정도다. 이 당시는 비에 젖은 흙의 높이를 측정해, 간접적으로 강우량을 관측하는 ‘우택(雨澤)’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측량 결과를 비가 내릴 때마다 각 지방의 감사(현 도지사)가 조정(朝廷)에 보고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지역이나 계절 등에 따라 토질이 상이해 측정한 결과의 신뢰도가 매우 낮았다.

세종은 재위 기간에 대기근을 세 차례나 겪었다. 〈세종실록〉 7년 6월 23일에는 “천재지변이 없는 해가 없었다.”며 기후 위기와 그 대응책을 고심하는 모습이 보인다. 맏아들인 세자는 아마도 아버지의 고충을 곁에서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절실함이 세자에게 기존 관측법인 우택의 한계를 뛰어넘는 혁신적 기기, 그릇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는 도구를 발명해 강우량의 정량적 관측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렇게 조정의 논의는 비과학의 영역인 ‘하늘의 경고성 누런 비’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인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의 제작’으로 옮겨간다.

호조에서 건의하였다. …… “한양에서는 쇠를 주조해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명명했는데, 길이가 1척 5치(≒47cm)이고 직경이 7치(≒23cm)입니다. 도량형은 주척을 사용합니다. 서운관(현 기상청)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의 위에 두고, 매번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리가 직접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으로 물의 깊고 얕음을 측량해 비가 내렸다고 쓰고, 비가 오고 갠 날짜·시간과 빗물 깊이의 척·치·푼 수치를 상세히 쓴 후 즉시 보고하고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 …… 추후 참고하기 위한 근거로 삼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24년 5월 8일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우량계(雨量計)인 ‘측우기(測雨器)’의 탄생과 활용법을 알리는 기록이다. 이후 조정에서는 동일한 크기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에 설치한다. 각 지방에서 표준 도량형에 근거해 측정한 강우량을 세밀하게 기록한 후 조정에 보고하면, 조정에서는 취합해 집계하는 일을 제도화했다. 그렇게 데이터를 축적해, 국정 운영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이처럼 세종과 신하들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올 가뭄이라는 기후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측우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측우기를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축적하며 미래를 대비했다.

농경문화전시관 소장 측우기(사진=한국관 광공사)와 기상학자 조지 제임스 사이먼스 (George James Symons, 1838~1900)가 설계한 ‘시몬스 게이지’(Ⓒ게티이미지뱅크). 시몬스 게 이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기 록형 게이지다. 문종은 이보다 400년 앞서 측우기를 발명했다.
농경문화전시관 소장 측우기(사진=한국관 광공사)와 기상학자 조지 제임스 사이먼스 (George James Symons, 1838~1900)가 설계한 ‘시몬스 게이지’(Ⓒ게티이미지뱅크). 시몬스 게 이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기 록형 게이지다. 문종은 이보다 400년 앞서 측우기를 발명했다.

조선 최초의 소방서 금화도감

측우기 발명에 이어 세종시대의 위기관리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때에는 조선 최초의 소방서가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다음의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근래에 한양도성 안에 화재가 계속 발생하는데, 하룻밤에도 두세 곳씩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이 불을 조심하지 아니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도둑 무리들이 도둑질할 생각으로, 밤을 틈타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 〈세종실록〉 8년 2월 12일

한성부(漢城府, 한양의 행정과 사법 총괄기관)에 보고가 올라왔다. 서울 시내에서 방화 사건이 하룻밤에도 두세 건이나 연속적으로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사흘 후, 한양에서 큰불이 났다. 경시서(京市署, 시전을 관리·감독하던 관아)를 비롯해 지금의 상가 건물에 해당하는 행랑(行廊), 민가를 합해 총 2,000채 이상의 건물이 불에 탔고, 사망자는 서른두 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신상을 확인할 수 없는 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니, 인명 피해 또한 상당히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렇게 위급한 때,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세종은 하필 강원도로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떠난 터였다. 이에 중전인 소헌왕후가 세종을 따라나서지 않은 신하들을 소집해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한다. 점심 무렵 일어난 불은 저녁에 진화되었고, 다행히 나라의 뿌리를 상징하는 종묘로 옮겨붙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세종은 화재에 대해서 보고 받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그런데 그 사이 또 큰불이 발생했다. 지금의 구치소에 해당하는 전옥서(典獄署), 행랑 여덟 간, 현재의 보신각인 종루(鍾樓), 민가 약 200호가 잇달아 불에 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한양 내 민가가 1만 7,015호였다.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틀간 민가의 약 14%가 연소(延燒)된 셈이다. 피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화재로 인해 도둑이 기승을 부렸는데, 불이 번지지 않은 집에서도 황급히 피난했다가 재산을 전부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한양은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에 세종은 화재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식량·치료·장례 등의 지원, 그리고 가옥 복구를 위한 목재를 마련할 방법을 찾으라 지시한다. 이처럼 긴급 구제책을 실시하는 한편 다음과 같이 재발방지를 위해 체계 구축과 기반시설을 마련한다.

임금이 명을 내렸다. “한양 안의 행랑에 방화벽을 쌓고, 도로를 넓혀서 사방으로 통하게 만들라. 궁궐 담장이나 돈·곡식이 있는 관청들과 가까이 붙어 있는 가옥을 잘 헤아려 알맞게 철거하라. 행랑은 10간(1간≒1.8m) 마다, 개인 집은 5간마다 우물을 하나씩 파고, 관청들 안에는 우물을 두 개씩 파서, 물을 저장해 두라. 종묘, 대궐 안, 종루의 문에는 소방 기구를 제작하고 비치해서, 화재가 발생하면 바로 달려나가 끄게 하라. 군인과 노비가 있는 관청들에도 불을 끄는 여러 장비를 갖추었다가, 화재 소식을 들으면 소속원들을 동원해서 끄게 하라.”

- 〈세종실록〉 8년 2월 20일

위와 같이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에 방화벽을 쌓고, 우물을 파서 소방용수를 확보하며, 소방기구를 비치했다. 또한 도로를 확장해 소방도로를 확보했다. “세종 8년에 화재가 난 뒤 …… 민가에 도로를 개통한 덕분에 이 화재로 사망한 사람이 없다.”는 세종 13년의 자체 평가에서 드러나듯, 이 대책은 효용성이 높았다.

또한 세종은 불에 탄 가옥을 보수하기 위해 서둘러 임시 가마를 설치해 기화를 구워 싼값에 보급했다. 당시 기와는 고가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대개 띠·짚·억새 등으로 지붕을 얹었다. 이는 도시의 미관뿐 아니라 화재 방비에도 취약한 터였다. 이처럼 앞으로 또 발생할지 모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종합대책을 서둘러 마련한 것이다.

소방차가 없던 시설, 가장 성능이 우수한 화재진압장비는 완용펌프였다. 조선에 기계식 소방펌프가 처음 도 입된 때는 1723년(조선 경종 3년)이다. 사진은 1871년 조선 궁성소방대에서 사용하던 완용펌프와 같은 형태로 1940~19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대전광역시립박물관〉 
소방차가 없던 시설, 가장 성능이 우수한 화재진압장비는 완용펌프였다. 조선에 기계식 소방펌프가 처음 도 입된 때는 1723년(조선 경종 3년)이다. 사진은 1871년 조선 궁성소방대에서 사용하던 완용펌프와 같은 형태로 1940~19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대전광역시립박물관〉 

가장 획기적인 정책은 지금의 소방청과 같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신설이다. 스물네 명으로 조직을 구성했는데, 이들 금화군(禁火軍)이 통금시간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신분증을 제공하는 등 상설기관으로서 소방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5년 뒤에는 금화군에 대한 정책을 보강한다. 급수를 지원할 인력과 소방장비 지급에 대한 세부사항 그리고 소방 공로자에 대한 포상 등을 국가 차원에서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금화도감의 인력이 타 부처의 일을 겸직하는 등 한계가 있었다. 이에 조직원 중 여덟 명을 금화도감 일만 전담시키는 등 인사직제를 개편한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일은 사람에게 달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화재의 원인인 음양이 조화를 잃은 것은 내가 부덕한 탓이다. 내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대신들이 도와준다면 천재지변도 없어질 수 있다.”

- 〈세종실록〉 8년 2월 28일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전통시대에는 위정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천재지변을 통해 성찰하라는 신호를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세종은 당시에 통용되던 이러한 비과학적 사고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정치에 임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동시에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사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면서 관료들에게 열정을 불어넣는 일도 잊지 않았다.

세종이 기근에 대처하는 법

세종의 재위기간은 32년이다. 재위 19년은 재위기간 중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큰 가뭄이 들었던 해다.

작년에 봄·여름이 가물어 시내와 우물이 모두 말랐다. …… 대체로 경기도는 40읍 중에서 아홉 고을이, 충청도는 54읍 중에서 18읍이, 전라도는 55읍 중에서 11읍이, 경상도는 66읍 중에서 32읍이 모두 농사에 실패했다. 콩을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아니하여 흙을 헤치고 도로 줍기도 했다. 경기도 안성과 충청도 공주 …… 고을은 모두 메뚜기의 피해를 입었고 …… 금년 봄에 이르러서는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 굶주린 사람이 병에 걸리면 바로 죽었다. ……전국의 창고가 바닥이 나서 국가에서 곡식을 옮겨다가 굶주림을 구제하였다.

- 〈세종실록〉 19년 2월 9일

기근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까지 돌았다. 식량이 부족해 농사 밑천인 소를 잡아먹는 이도 생겨났고, 그나마도 없으면 가족을 버리고 도망을 치기도 했다. 나라에서 비축 식량을 풀어 백성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냈다고는 해도 아비규환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품종 개량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충청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요사이에 그대가 올린 황간현(지금의 영동군 일대)의 한 줄기에 네 이삭이 있는 보리를 심어서 시험하고자 하니, 이와 같은 이삭이 있거든 익기를 기다려서 씨앗을 받아 수량을 상세히 보고하라.”

- 〈세종실록〉 19년 5월 11일

경상도 감사가 선산부(현재의 구미 일대)에서 자라난 조로서, 한 줄기에 두 이삭 혹은 세 이삭 혹은 일곱 이삭이 있는 것을 바치니, 동적전(지금의 전농동에 있는, 왕이 직접 경작하는 땅)에 심게 하였다.

- 〈세종실록〉 19년 7월 23일

대기근이 든 와중에 보통의 것보다 이삭이 많이 달린 돌연변이 보리가 발견되었던 모양이다. 〈세종실록〉 19년 5월 5일을 보면 경상도 감사가 상서(祥瑞)의 증거라며 예천에서 한 줄기에 서너 이삭이 달린 보리를 축하 인사와 함께 임금에게 바쳤다. 하지만 세종은 “흉년인 가운데 이 상서로운 보리가 나타나니, 내가 매우 부끄러운데 어찌 축하받을 일이 있겠느냐. 이제부터는 이와 같은 일에 축하 인사를 하지 말라.”고 겸양을 한다.

세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품종을 개량해 장기적으로 농업 생산성을 향상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경상도 감사 외에도 충청도 등 다른 지방의 감사에게 돌연변이 보리와 조를 받아 시험 재배를 하는 모습을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GettyimagesBank
ⓒGettyimagesBank

기후 위기에 직면한 우리의 자세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 혹은 ‘환경’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먼 단어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이상기후 현상은 인류 문명의 존속에 대한 위협이라 느껴질 만큼 심각하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경제·사회 구조와 개개인의 생활방식 등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꾸짖음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러한 심각성의 공감에 따라 ‘파리기후변화협약’ 등과 같이 기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제 공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와 성장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재 산업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시기, 자연이 주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반성의 기회로 삼아, 자신과 국가체계의 빈 구멍을 채웠던 세종과 우리의 선조들이 현명함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한다면, 천운이 따르지 않더라도 재해를 막을 수 있다.”(〈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는 세종의 말처럼, 우리가 생활 속에서 놓치고 있는 작은 환경운동의 실천은 기후 위기 극복이란 먼 길을 향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오채원
오채원연구소공감 대표.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외래교수, ‘실록 읽어주는 학교’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SBS라디오 ‘오채원의 청춘 공감’에 5년간 출연했고, 부천문화재단 이사, 경희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에세이 〈안녕 아빠–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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