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과 한여름 대낮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한여름 대낮에 있었던 일

아주 옛날 ‘내게 천체 망원경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밤하늘을 무수히 올려보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과 떨어지는 별똥별도 보았지만, 문득 우주라는 곳의 공간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자주 밤하늘을 향해 랜턴을 들어 불빛을 쏘아 올렸던가!) 사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먼 곳으로 가본 적이 없었다. 고작 내 살던 경북 김천에서 친척들이 사는 대구까지 완행버스를 타고 두어 차례 다녀봤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틈이 날 때마다 지도를 펴 놓고 내가 사는 곳의 위치를 가늠해보거나 내가 사는 곳 바깥으로, 저 멀리 부산으로, 강릉으로, 목포로, 개마고원으로, 몽골로, 알래스카로 마음으로나마 한 번씩 떠나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아직도 나는 가끔 세계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거나 신비로운 우주의 사진을 찾아보곤 한다.

그런데 내가 열 살 무렵, 이런 일이 있었다. 몹시 무더운 한여름 대낮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하면서 음식을 챙겨 주셨다. 나는 그 음식을 챙겨 들길을 한참 걸어 아버지께 갔다. 아버지께서는 음식을 덜어서 내게도 주셨다. 젓가락을 건네시고는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 젓가락으로 사용하셨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빈 주전자와 빈 그릇들을 들고 또 한참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날은 마치 백지(白紙)처럼 너무 밝았고, 들길에는 나 혼자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여기가 어디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생각이 어린 나에게 갑자기 들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때 든 그 질문이 마치 하나의 화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가끔 자문한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스스로 질문을 하면 잃었던 의식을 되찾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그이의 부재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어느 날 시골에 사는 나를 만나러 멀리서 찾아오면 그지없이 반갑지만, 그 사람과 만났다가 이내 헤어지고 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찾아와 한때를 함께 보냈는데, 그만 실수로 모자를 내 집에 놓아두고 육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보기엔 꽤 아끼던 모자인 것 같았다. 통화를 하니 모자를 내 집에 두고 그냥 쓰라고 했다. 그래서 모자를 놓아두고 그 앞을 오가며 모자를 보는데, 또 잠깐 쓰기도 해 보는데 날이 갈수록 그 모자를 썼던 그이가 자꾸 생각났다. 그리고 그이에 대한 생각의 강도는 커졌고, 빈도는 잦아졌다. 그이가 평소에 하던 말씨나 반복되던 습관, 얼굴 표정, 즐겨 입던 옷, 뒷모습, 걸음걸이 등등 그이의 존재를 구성하던 것들의 가짓수가 점점 불어나고 구체화되어 떠오르는 것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면 온통 그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이의 주소를 알아내서 모자를 돌려보냈다. 그이에겐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조만간 한 번 다녀갔으면 좋겠다고만 했다.

매미와 잠자리의 여름 하늘

종일 매미가 운다. 매미가 나무에 앉아 울면 한 그루 나무가 우는 것만 같다. 이 매미를 잡으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매미를 잡으려고 누운 소의 꼬리털을 뽑아 올가미를 만들어서는 긴 장대에 매단 적이 있다. 그러곤 그 올가미를 나무에 바짝 달라붙어서 우는 매미의 몸에 걸려들게 씌워 살짝 잡아당긴 적이 있었다. 그게 무슨 성과라고 매미를 잡으면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었다. 풀잎 위에 앉은 잠자리를 잡으려 한 적도 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살짝 벌려서 살금살금 걸어가서는 투명한 잠자리의 날개 사이에 넣어 잠자리를 잡은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여름날의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것들을 왜 잡아보고 싶었을까. 정현종 시인은 시 ‘이 세상의 깊음 속으로’에서 “날으는 새의 날개가 느끼는/ 공기/ 그 지저귐이 느끼는/ 내 귀/ 에 흐르는 푸른 공기/ 귓속에 흐르는 날개/ 모든 것들의 경계의/ 기화(氣化)”라고 노래했는데, 나도 매미와 잠자리가 여름날에 소유했던 날개와 푸른 공기를 갖고 싶었던 것일까. 잡았던 매미와 잠자리는 물론 다시 여름 하늘 속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러는 동안 지루하고 맹렬한 여름날은 뒷걸음치며 한발 두발 기세가 꺾여 물러서곤 했다.

허드레로 산다는 말

도연명이 지은 ‘자제문(自祭文)’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지런히 일해 남은 힘을 없게 하였고 마음은 항상 한가하여 천도를 따라 즐거워하였으며 본분을 따르며 일생을 살아왔네.” 한편 홍신선 시인의 시 ‘가을 항아리’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이 세찬 빗속에서는/ 텅 빈 항아리일수록 깊고 맑은 소리를 허공에 내뱉는다.” 이 두 대목을 연결해 읽으니 결국 살면서 고요함과 한가함을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홍신선 시인은 또 다른 시 ‘숨어 사는 뜻은’에서 “숨어서 허드레로 사는 뜻이 이만하면 됐다.”라는 표현도 썼는데, 나는 이 시구 또한 무겁게 받아들였다. 숨어서 사는 일은 은신(隱身)하여 산다는 뜻으로 세속의 온갖 잡된 것이 도달하지 않은 곳에 자족하면서 산다는 의미일 테다. 그런데 허드레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허드레’는 그다지 중요하지 아니하고 허름하여 함부로 쓸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러므로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는 듯이 보통으로 산다는 뜻일 테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허드레로 살겠다는 것은 스스로를 낮춘 겸손의 말로 쓴 것이로되, 세속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소유하려는 것을 멀리하고, 출세의 욕망도 버리고 그렇게 일없이, 작위(作爲) 없이 산다는 말일 테다. 요즘엔 인용한 이런 말씀들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삽화=이지미〉
〈삽화=이지미〉

이제 우산이 없더라도

지금은 어디에서나 우산을 살 수 있고, 또 우산을 살 정도의 돈은 지갑에 넣고 다니지만, 예전에 나는 이 우산이 몹시 갖고 싶었다. 우산살이 멀쩡하고 어디도 찢어지거나 뜯어진 흔적이 없는 온전한 우산을 갖고 싶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우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손잡이에 단추를 누르면 쫙 자동으로 펼쳐지는 자동 우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반듯한 우산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되지 않았다. 집에는 턱없이 우산이 부족했다. 그러니 비닐을 잘라서 몸에 둘러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창피했다. 그런데 이제 널리고 널린 것이 우산이고 보니, 또 중년이 되어 시골에 살다보니 꼭 우산이 필요한가 싶어졌다. 게다가 시골에서는 우산보다 우의(雨衣)를 더 자주 입게 된다. 우의를 입고, 장화를 신고 일을 하게 된다. 비를 맞아 옷과 몸이 젖는 것이 더 이상 큰일이 아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또 맑고 깨끗하기까지 하다. 해롭지 않다. 심지어 나는 토란잎처럼 식물의 넓은 잎이 있으면 그것을 머리에 얹어 비를 피하고도 싶다. 그조차 없으면 나무 아래에 들어가 잠시 피하면 그만이다. 소낙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혹은 빗줄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다. 빗소리 그 자체와 이동해가는 빗줄기의 움직임, 그리고 비 오는 날의 풍경에는 어떤 맥동과 율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어떤 물건이든 매번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건도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희소 상품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이슬

여름날 아침 풀밭에서 이슬을 본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영롱한 광채이며, 우주의 맑은 눈물 같다. 이슬은 풀잎 위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말지만 끝까지 둥근 형체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 갓 떨어진 이슬은 유리구슬 같지만 다른 이슬과 한데에서 만나도 튕겨 나가지 않고 경계를 허물어 더 큰 이슬을 만든다. 이슬은 충돌하지 않는다. 맞부딪치거나 밀쳐내지 않는다. 오히려 포섭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탑에서’라는 시에서 이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이슬의 불안은 아름다워라-/ 그건 아침에 떨어진다/ 새벽에서 밤을/ 분리하며/ 그리고 그 차가운 선물은/ 불확실하게 매달려 있다/ 강렬한 태양이/ 그걸 죽게 하기를 기다리며.” 이슬의 곧 사라질 형편을 위태로운 불안의 상태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새벽 시간의 개시를 알리는 표지라고 보았다. 나는 이 이슬을 하나의 시간 그 자체라고 이해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금의 현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는 광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 일순간이 곧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이 일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

내가 다닌 대학의 국문과 전공수업에서 〈육조단경〉을 한 학기 동안 공부한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의아한 일이다. 그때 나는 수업을 들으면서 다음의 말씀을 새겨 놓았었다. 물론 그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밝은 거울 또한 대(臺)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리오.” 그러곤 세월이 지나 졸업을 하고 불교방송 입사를 위한 논술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 게송을 답안으로 제출했다. 이 게송에 빚을 져 입사를 하게 되었고 또 불교와의 인연을 지금껏 이어 오게 되었으니 이 말씀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꿔놓은 말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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