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 고기 유혹에 빠져
자멸의 길 걷지 마세요!”

 

인간을 가장 많이 닮은 동물

지구에는 참으로 다양한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닮은 동물은 누구일까요? 원숭이라고요? 두상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체 형상을 고려하면 바로 우리, 곰입니다. 한 번은 숲속 수행자가 곰으로 오인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먼저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내가 숲에서 쉬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가왔습니다. 일행과 떨어져서 홀로 숲 깊숙하게 들어온 모양입니다. 진작부터 나는 사람이 다가오는 걸 냄새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이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달려 들었습니다. 아이는 용케 내게서 도망쳐서 숲을 빠져나갔고 자신을 찾던 아버지를 만나 겁에 질려 말했습니다.

“온몸에 털이 길게 자라있는 것이 나를 공격했어요.”

나는 부리나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내 아이 아버지가 활과 화살을 들고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숲에는 수행자 한 사람이 동물 털가죽 옷을 입고 명상에 들어 있었지요. 아버지는 아이에게 해를 입힌 자라고 판단하고서 그 수행자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곁에 있던 사람이 다급하게 말렸습니다.

“멈추시오. 저 사람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수행자요. 당신 아들에게 해를 입힌 범인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아무에게나 활시위를 당기려는 게요?”

- 〈백유경〉 ‘81번째 이야기’

우리 곰은 보통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지만 뒷다리로 일어서 두 발로 걸어 다니며 앞발로는 물건을 쥐고 흔들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꼭 사람 같습니다. 사람을 좋아해서 사람 사는 곳에 자주 다가가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배우기도 좋아합니다.

겁에 질린 아이가 자신을 공격한 자가 곰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온몸에 길게 털이 자라있는 것만 보았고, 그 말을 대충 이해한 아버지가 사람이라 믿어버린 것도 이해가 될 정도로 우리 곰은 사람과 형상이 아주 유사합니다.

일본의 종교학자이며 인류학자로 티베트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곰만큼 인간과 닮은 점이 많은 동물도 없습니다. (중략) 곰과 인간은 수천 년에 걸쳐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인간과 곰은 같은 길을 따라 이동했고, 같은 계곡에서 연어를 잡았으며, 같은 식물의 뿌리를 캐서 먹었고, 똑같은 산딸기와 나무열매를 수확하는 사이였습니다. 산딸기를 따러 갔다가 곰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곰과 인간은 서로를 존경하며 공생관계를 구축해온 셈입니다.”

- 〈곰에서 왕으로-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81~82쪽’

우리 곰은 몸집이 큰 인간을 닮은 데다 느릿느릿하지만 유연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며, 파괴적인 힘을 지닌 데다 겨울 동안은 깊은 은둔의 시간을 보내는 까닭에 사람들은 일찍부터 이런 우리를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곰은 오래전부터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임과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친근감과 우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물”이라고 나카자와 교수도 설명하고 있지요.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곰을 숭배했고, 곰을 닮고자 했고, 심지어 곰에게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아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여러분들의 조상이 바로 우리, 곰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창원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사찰이 소실됐는데, 재건할 때 곰이 목재를 옮겨줬다는 전설이 전해 ‘웅신사’로도 불 린다. 성주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벽화.
창원 성주사는 임진왜란 때 사찰이 소실됐는데, 재건할 때 곰이 목재를 옮겨줬다는 전설이 전해 ‘웅신사’로도 불 린다. 성주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벽화.

배신한 인간 일깨우는 수행자

우리는 무리 지어 살지 않습니다. 새끼를 낳은 암컷이라면 몰라도 대체로 곰들은 외따로 지냅니다. 이따금 음식 냄새를 맡고 마을로 내려가서 부엌을 뒤지는 바람에 사람들을 놀래키고 때로는 그들을 공격해서 원한을 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깊은 숲에서 소리 내지 않고 지내려고 애쓰고 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일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굴 안으로 어떤 남자가 비틀거리며 들어왔습니다. 보아하니 나무꾼인데, 악천후로 인해 길을 잃고 맹수들에게 쫓기다가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나무꾼이 한숨을 돌리려던 차에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허둥대며 굴을 빠져나가려는 그에게 내가 말했습니다.

“겁내지 마시오. 당신을 해치지 않겠소. 지금 굴 밖은 폭우가 내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오. 여기 따뜻한 굴에서 일단 쉬십시오.”

나의 느긋한 태도와 말에 나무꾼은 안심하는 듯 보였습니다. 나는 숲에서 가져온 꿀과 과일을 사내에게 내주었습니다. 원래 우리 곰은 미식가로도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나무꾼과 나는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레(7일)를 보냈습니다. 그에게서 곰을 향한 경계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나 역시 혼자 적적하던 차에 그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행복했습니다. 마침내 비가 그쳤고 이제 나무꾼은 마을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됐습니다. 나는 지름길을 일러주면서 신신당부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해를 많이 입혀 죄가 많은 몸이오. 마을에서는 내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도 많다오. 행여 숲에서 나를 만났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주시오. 그것 하나만 약속해주시오.”

나무꾼은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약속이란 모래성과도 같나 봅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사냥꾼을 데리고 나타났습니다. 사냥꾼은 곰을 잡아서 곰 고기를 많이 나눠주겠다고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방심한 나는 그렇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훗날 전해 듣기로, 사냥꾼이 약속대로 곰 고기를 크게 한 덩이 잘라 건네주자 나무꾼이 두 팔을 내밀어 받아 들었는데, 그 순간 두 팔꿈치가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사냥꾼에게 그가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곰은 내게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 듯 정을 나누어주었건만 내가 은혜를 배반하였으니 그 과보를 이렇게 받았습니다.”

사냥꾼이 깜짝 놀라 내 몸뚱이를 고스란히 절에 시주했더니 스님들이 말했다지요.

“이 곰은 보살이며, 미래 세상에 부처가 되실 분이니 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탑을 세웠고, 나라의 왕은 은혜를 입고도 그걸 모르는 자는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는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 〈대지도론〉 제49권

곰과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창원 성주사는 천왕문 앞에 곰과 코끼리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곰과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창원 성주사는 천왕문 앞에 곰과 코끼리 조형물을 세워놓았다.

난해하고 엉성한 사상에 비유

프랑스 중세사학자 미셸 파스투르(Michel Pastoureau, 1947~)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의 숭배를 받고 경외의 대상이었던 우리 곰은 서양 중세로 접어들면서 그 위상이 추락했습니다. 특히 서양 중세시대 교회에서 거론한 자만·탐욕·음욕·분노·탐식·시기·게으름 등 7대 죄악에 관한 동물 비유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자만은 사자·독수리 등에 비유하고, 탐욕은 다람쥐·두더지·원숭이·개미에게, 음욕은 수컷 염소·곰·돼지 등에게, 분노는 멧돼지·곰·사자·황소에게, 탐식은 곰·돼지·여우·늑대 등에게, 시기는 개·여우·원숭이·곰·까치 등에게, 게으름은 당나귀·곰·돼지·고양이·다람쥐 등에게 비유하여 문헌과 도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우리 곰은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다섯 가지나 상징하는 매우 부정적인 동물로 등장하는데, 미셸 파스투르는 중세 기독교 사회가 인간을 가장 많이 닮거나 인간과 밀접한 동물에 대해 매우 비호감이었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 〈곰, 몰락한 왕의 역사〉 중에서

불교에서 우리는 고통당할 줄 알면서도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는 동물, 혹은 스님이나 불자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절을 세워달라고 간절하게 비는 애틋한 동물로 등장하지만, 간혹 서양 중세 교회에서처럼 부정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곰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할머니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가 얼른 몸을 일으켜 피했는데 그러다 그만 둘은 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쫓고 쫓기며 빙빙 맴을 돌았습니다. 마침내 곰이 할머니 뒤를 바싹 따라붙었습니다. 앞발 하나로 나무를 짚고 다른 한 발로 할머니 뒷덜미를 움켜쥐려는 순간 할머니가 재빨리 몸을 돌려 나무를 짚고 있던 곰의 앞발을 눌렀습니다. 곰이 움찔하는 사이 다른 앞발 하나도 마저 붙잡아서 나무에 대고 눌렀습니다.

곰은 할머니에게 앞발 두 개가 다 붙잡혀 꼼짝하지 못하게 됐지만, 사람이 곰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때마침 나그네 한 사람이 근처를 지나는데 할머니가 소리쳤습니다.

“이보시오. 나를 좀 도와주시오. 나 대신 이 곰을 붙잡고 있으면 녀석을 잡아서 내가 고기를 나눠주리다.”

나그네는 곰 고기를 나눠준다는 말에 솔깃해 할머니를 대신해서 곰의 앞발을 눌렀습니다. 할머니는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지요.

〈백유경〉에 실린 이 이야기에서 곰은 엉성하기 짝이 없고 난해하기만 한 세속의 학설을 상징합니다. 현란한 문장과 표현들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작 알맹이는 없어서 세상에 아무런 이로움이 되지 못하는 사상들입니다. 노파는 그런 학설을 만들고 주장하면서 어떻게든 이론적으로 완성을 해보려고 애쓰는 사상가요, 나그네는 주창자가 완성하지 못하고 손을 놓아버린 사상들을 붙잡고 해석하느라 죽을 때까지 고생만 하는 후학자들을 비유합니다.

바른 이치는 사람을 살리고, 세상에 도움을 줍니다. 바른 이치에 바탕을 둔 수행은 닦는 동안에도 행복하고, 완성해서는 궁극의 평화를 안겨줍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 사람들이 매달리고 있는 여러 주의·주장들은 어떠한가요? 사람의 삶을 망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 불안과 혼란을 안겨주는 그릇된 신앙의 폐해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폐해를 눈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무엇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며 휩쓸리고 있는 곳이 사바세계입니다. 마치 곰 고기를 나눠 먹으려던 나무꾼이나 나그네처럼 자멸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중생의 어리석은 현실을 우리 곰은 뼈저리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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