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속이 함께하는
자급자족의 의례공동체

 

2021년 8월 ‘위제희부인 만원연기’ 인형극을 마친 신도들과 다여 스님.
2021년 8월 ‘위제희부인 만원연기’ 인형극을 마친 신도들과 다여 스님.

땅설법의 전승내력

다여(茶如) 스님의 땅설법 전승은 1960년대 강원도 삼척 신기면의 작은 비구니사찰 안정암에서 비롯됐다. 다여 스님은 주지 대법(大法) 스님과 여러 노스님이 머무는 안정사에서 염불을 배우며 자랐다. 그러던 1973년경 땅설법을 전승·보유하고 있던 무명(無明, 1910∼1988) 스님을 만나 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명 스님은 안정암에서 어린 다여를 만나 그의 재능과 성품을 확신한 후 입적하던 해까지 12년간 땅설법을 남김없이 물려줬다. 무명 스님과 다여 스님은 연배로 조손(祖孫)에 해당하나, 땅설법은 물론 농사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짝을 이루었고,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자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땅설법을 가르친 제자는 나 혼자였고, 다른 스님한테는 가르쳐줄 엄두도 안 내셨어요. 땅설법 설주는 만능이라야 된다고 하셨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잘 이해해서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중생의 근기를 살펴 거기에 맞게 강(講)을 하고, 민속에 탁월해야 한다고. 이거는 억지로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고 설명해주면, 빨리 암송을 해 그걸 시연해낼 능력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은사는 틈날 때마다 만주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명 스님에게 땅설법을 처음 전수해준 분은 일제강점기 삼척 도계읍 토굴에 머물던 포해(抱海) 스님이었다. 땅설법은 압록강을 기점으로 남북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 이를 남조와 북조로 구분했는데, 포해 스님이 가르쳐준 땅설법은 남쪽에서 행하는 것이었다. 당시 흥전리의 옛 사찰을 중심으로 남조의 땅설법이 이어졌고, 포해 스님은 그 강통(講統)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포해 스님이 입적한 뒤 무명 스님은 은사가 알려준 대로 만주로 건너가 그곳의 땅설법 강통을 은사로 모시고 북조를 배워 남·북조를 섭렵하게 되었다.

무명 스님의 활동지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의 수도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현이다. 영안현은 발해 때부터 성행하던 땅설법이 당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강통 석정(釋貞) 스님이 문중을 이끌었다고 한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엔닌(圓仁) 스님의 기록처럼, 839년 당나라 때 신라사찰 적산법화원에서 행한 속강이 발해에 전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적산법화원이 있었던 등주(登州)는 지금의 산둥반도로, 위로 발해, 아래로 신라 전역까지 해로로 연결되는 지역이었다.

이후 무명 스님은 1951년 1·4후퇴 때 남하했다가 분단으로 인해 근거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이에 주로 영남과 강원도 지역의 여러 사찰을 유행하던 중 안정암에서 다여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다여 스님은 남북조 땅설법을 모두 섭렵할 수 있었고, 현재 안정사에서는 북조의 방식도 함께 행하고 있다.

변상도가 펼쳐진 경장대 앞에서 설법하는 다여 스님.
변상도가 펼쳐진 경장대 앞에서 설법하는 다여 스님.

설단·괘불·변상도

안정사 땅설법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함께 주체가 되어, 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불교공동체 속에서 전승돼왔다. 필자는 2018년 가을 땅설법 준비로 한창이던 저녁 무렵 사찰에 들어섰는데, 상단에 모신 거대한 괘불과 마당에 쌓인 갖가지 장엄이 모두 종이로 직접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재단(齋壇)은 신도들이 농사지어 수확한 호박·배추·무·당근·가지 등의 채소와 견과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청년들이 작은 틀에 한지를 씌우고 조명기구를 달아 그림자인형극을 연습하는가 하면, 누각 마루와 마당에 남녀노소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화와 고임과 각단 장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일손을 멈추고 수십 명이 함께 모여 행하는 땅설법 예행연습까지 모두가 적극적이고 즐거운 전승 주체였다.

필자는 지금껏 이렇게 스님과 신도가 하나 되어 봉행하는 불교의례를 접한 적이 없었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운데, 오랜 준비와 연습과 실전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직 자신의 신앙심에 의지해 수십 년째 하나하나의 의식을 귀하게 여기며 전승해온 것이다. “중간에 순서를 함부로 빼지도 못한다. 신도들이 전문가 수준이어서 빼먹으면 뭐라고 한다.”는 스님의 말처럼, 거대한 천막 아래에서 이어온 야단법석은 신앙공동체로 연결된 불법의 희열이 아니면 전승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괘불(掛佛)이다. 화엄사상과 관련된 땅설법에는 ‘7처9회도(七處九會圖)’를 모시고, 법화사상과 관련된 내용일 때는 ‘이불병좌도(二佛竝坐圖)’의 괘불을 모신다. 크기는 가로세로 3m×2m 정도의 대형이며, 한지를 여러 형상으로 오리거나 접은 다음, 짙은 바탕색의 천에 이어붙여 조성한다. 오랜 시간 한지를 오리고 접어 경전에서 묘사한 세계를 창조해낸 다음, 의례를 마치면 미련 없이 태워버리니 그 정성과 호방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땅설법의 주요 도구는 변상도(變相圖)이다. 땅설법에 적합한 변상도가 드물고, 판본이 있어도 예전에는 값이 비싸 직접 한지에 먹으로 그려 사용해왔다. 변상도를 펼치는 구조물은 경장거·윤장대·금보대·경거대이다. ‘경전을 실은 수레’라는 뜻의 경장거(經藏車)는 나무를 짜서 3단 높이의 거대한 가마 모양으로 만들었다. 3단의 사방에 수십 장의 변상도를 붙일 수 있는 칸을 만들어 그림을 짚어가면서 설법하며, 바퀴를 달아 이동이 쉽게 했다.

윤장대는 팔각형의 큼지막한 틀에 변상도를 붙이고 법주가 돌려가면서 설명하도록 만든 장치이다. 높은 곳에 올려놓고 쓸 수 있는 돌개지를 윤장대로 활용하기도 한다. 돌개지는 물레질을 할 때 실을 감는 얼레의 강원도 방언이다. 윤장대와 돌개지 안쪽에 호롱불을 밝혀두면 어두울 때도 변상도가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간단한 그림자인형극도 할 수 있게 된다. 쓰임새 위주로 만드는 이런 물적 요소들은 정교함과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나선비구경〉에 나오는 ‘미란다왕’.  〈위제희부인 만원연기〉에 나오는 ‘위제희부인’. 〈법화경〉을 설할 때 공중에 매다는 ‘허공보탑’. 바가지·소나무·명주실로 만든 ‘박공후’. 놋 푼주에 가죽을 씌운 ‘동고(銅鼓)’. 〈심청효행록〉에 나오는 ‘스님’.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나선비구경〉에 나오는 ‘미란다왕’.  〈위제희부인 만원연기〉에 나오는 ‘위제희부인’. 〈법화경〉을 설할 때 공중에 매다는 ‘허공보탑’. 바가지·소나무·명주실로 만든 ‘박공후’. 놋 푼주에 가죽을 씌운 ‘동고(銅鼓)’. 〈심청효행록〉에 나오는 ‘스님’.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인형극

2021년 백중날 땅설법을 참관했는데, 선망부모·조상을 위한 백중기도에 맞춰 윤회전생과 정토왕생을 주제로 한 다양한 변주의 땅설법이 펼쳐졌다. 이날 땅설법은 여러 주제 가운데 〈위제희부인 만원연기(韋提希夫人 滿願緣起)〉를 다루었다. 정토삼부경 중 〈관무량수경〉의 앞부분을 보면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하게 된 동기로, 왕사성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왕실의 사연이 소개돼 있다.

당시 빔비사라 왕과 아들 아사세 태자 간에 왕권을 둘러싸고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자, 지옥 같은 현실에 괴로워하던 왕비 위제희가 부처님에게 간절히 구원을 청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은 그녀를 위해 정토를 관상하는 16관법을 설한다. 따라서 〈관무량수경〉을 〈16관경(觀經)〉이라고도 부른다.

이날 산 자와 죽은 자를 대상으로 〈위제희부인 만원연기〉를 풀어나간 다여 스님의 땅설법 구성은 흥미로웠다. ‘설법’과 ‘인형극’과 ‘놀이’가 하나의 주제 아래 펼쳐졌고, 신도들은 스스로 땅설법의 주체가 되는 종교공동체의 민중적 역동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위제희부인 만원연기〉 인형극은 온전히 신도들의 작품이었다. 빨랫줄에 횟대보를 매어 무대의 막을 여닫으면서, 오랜 세월 함께해온 신도들이 각자 맡은 인물·동물·사물의 인형을 조종하며 열연을 펼쳤는데, 신도들의 자유분방한 창조성이 인형극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베개에다 천을 씌워 얼굴을 그린 다음, 바늘꽂이와 냄비·주발·버선을 모자로 씌우고, 빗자루와 음식 뒤집개를 비롯한 각종 살림살이가 소품으로 등장했다.

등장인물들의 화통한 목소리와 연기력도 대단했다. 간간이 선보인 실수로 극의 흐름이 어설퍼지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이 오히려 재미를 더했다. 이윽고 백성들이 옥에 갇힌 왕비를 찾아와 위로의 노래를 부르자, 무대 앞으로 나온 신도들이 함께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평균연령 일흔이 넘는 배우들은 수십 년간 땅설법을 함께해온 신도들이었기에, 인형극의 전속 연희자로서 모든 것을 척척 준비하고 선보였다.

위제희 왕비의 애달픈 서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우리에게 삼세인과(三世因果)의 화두가 던져졌다. ‘업경대 환생처놀이’와 ‘수행인연 점찰법’으로 자신의 내세를 내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씩 자신을 비추는 업경대(業鏡臺) 앞에 서서 육도가 적힌 산대를 뽑고, 거기에 적힌 내용대로 지옥에서 천상까지 각자 자리한다. 그 다음 16관경 점찰 막대를 뽑아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최상에 이를 때까지 정진을 거듭한다. 삼악도를 뽑은 이들은 실망하고 천상을 뽑은 이들은 환호하면서, 놀이와 함께 윤회전생의 법칙을 새겨보는 것이다.

이처럼 열린 주제와 장르 속에서도 지켜야 할 경계와 원칙은 분명히 설정해두고 있다. 부처님을 대신하는 법문이 아니기에 법주는 불단 앞에 비켜서서 가사 대신 장삼에 송낙[松蘿笠]·짚신 등을 갖추고, 세속적 흥겨움을 유발하거나 승려의 위의를 흩트리지 않는다. 따라서 법주는 법당에서든 마당에서든 신도와 눈높이를 나란히 맞추어 연행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結界)는 엄정하다.

2018년 10월 안정사 화엄성주대재 땅설법 때 재물을 갖춘 상단.

땅설법의 민중불교적 특성

안정사에서 다여 스님을 중심으로 전승해온 땅설법은 온전히 민중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는 땅설법이 지닌 특성이면서, 기층민(基層民)과 하나의 불교공동체이자 농사공동체로 살아온 조선 후기 전통불교의 모습이 전승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방식으로 땅설법을 연행하니 불교의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방법 또한 더 없이 민중 친화적이다.

이처럼 승려와 신도들이 함께하는 불교공동체이기에 ‘연행’과 ‘향유’와 ‘전승’의 주체가 동일하다. 연행자와 향유자가 구분되지 않고 삶 속에서 스스로 주체가 되는 점은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민속예술·민중예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구비전승·행위전승’이라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땅설법을 이어왔다. 땅설법에서 구연하는 엄청난 양의 서사와 가사는 기록되지 않은 채 구술로 전승됐고, 모든 연행과 제작 또한 농사를 짓듯 주기적·연례적 행위로 반복 학습된 것이다.

무엇보다 〈성주신 일대기〉·〈신중신 일대기〉·〈만석승 득도기〉에 담긴 거대한 서사는 민중의 바람이 불교적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들 내용은 기존 설화에 없는 것으로, 땅설법 등 포교의 방편으로 창작된 서사인 셈이다. 그 가운데 신중애기와 만석의 경우는 평범한 하층민에서 신이 되는 존재들이며, 특히 신중애기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열악한 처지에 놓인 하층민과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는 동시에, 깊은 발원과 수행으로 이들 또한 당당히 신중(神衆)과 국사(國師)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파한다. 성주신·신중신처럼 민간의 토착신이 화엄사상에 의거해 신중으로 유입되는가 하면, 수많은 토착신이 서로 화합하며 불교에 귀의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와 민속신앙이 합일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의 놀이에도 민중의 깊은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성주신 일대기〉의 ‘집들이 놀이’는 집을 다 지은 뒤에 서로 축하하며 회향하는 일반 집들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각 도에서 일하러 온 목수들이 품삯을 받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고향을 떠나올 때의 사정을 사설로 풀어나간다.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각자 어려운 사정을 노래하면, 법주는 그 집의 환경에 맞게 법문을 해준다. 당시 서민들의 처지를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이를 어떻게 새길 것인지 법문으로 승화해가는 것이다.

다여 스님을 통해 옛 속강 법사들이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의 경전과 시문, 역사와 고전에도 밝아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자원을 지녔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승가 사문으로서 익혀야 할 경전·교리·의례는 물론 기록되지 않은 방대한 내용과 서사를 모두 암기하고 있으며, 뚜렷한 소신과 체계적 지식을 지닌 역량에 놀라게 된다. 권력화·특권화된 기성불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법에 대한 논리 또한 땅설법 연행과 궤를 같이하는 민중불교적 관점에서 성숙해온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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