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적세계 음식 통해
대중에 수행의 길 설하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6세기 북위부조(北魏浮雕) 유마거사(維摩居士)상.

∷ 무대_인도 바이샬리 성, 유마거사의 방. 암라팔리 숲 부처님의 처소.

∷ 주요 등장인물_부처님, 유마거사, 문수사리보살, 중향(衆香)세계의 향적불과 많은 보살, 사리불존자, 아난존자.

∷ 함께 한 대중_많은 보살대중과 성문대중

∷ 주요 전개 과정
사리불은 문득 ‘이제 밥 때가 되었는데, 언제 공양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이를 알고 나무란 후 온갖 향기로 가득한 중향세계를 신통으로 보여주며, 그 세계의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화신을 만들어 중향세계로 보내 향적여래에게서 음식을 얻어 온다. 그때 중향세계의 수많은 보살이 이 사바세계에 관심을 갖고 함께 온다. 한 성문이 가져온 음식의 양이 적은 것을 걱정하자, 유마거사는 이 음식은 아무리 많은 이가 아무리 오래 먹어도 결코 동나는 일이 없는 무진장의 음식이라고 말해준다. 모든 대중이 그 음식을 만족하게 먹는다.

그리고 유마거사는 부처님을 뵈러 갈 때라고 문수사리에게 청하고, 모든 대중을 손바닥에 올려 부처님이 계신 암라팔리 숲으로 이동한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대중의 몸에서 나는 향기의 연유를 여쭙자 부처님은 중향세계의 음식 향기가 그것을 먹은 이의 털구멍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이어 유마거사가 아난존자의 뒤따르는 의문에 대해 “이 음식의 향기는 이 음식이 소화된 뒤에 없어지고, 음식이 소화되려면 그 음식을 먹은 이가 한 단계 높은 수행의 단계에 올라야 한다.”고 대답한다.

부처님은 중향세계의 향기 나는 음식이 불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방세계에서는 중생의 근기와 지향에 따라 온갖 방편의 불사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보살은 불세계를 차별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온갖 방편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격려한다. 중향세계의 보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들이 이 세계의 더러움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을 내었음을 참회하고, 높은 가르침에 환희심을 내면서 돌아간다.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유마거사가 그 찬란한 변재(辯才)를 침묵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침묵은 어떤 웅변보다 무거운 울림으로, 수천 년의 불교 역사를 거쳐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옵니다. 이제 우리는 유마거사의 그 찬란한 변재가 침묵으로부터 나왔다는 걸 압니다. 결국 유마거사의 말씀은 바로 ‘침묵의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향적세계와의 교류

자, 본래 줄기로 돌아오지요. 〈유마경〉에서 소승의 열등함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왔던 사리불이 계속 그 배역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물꼬를 틉니다. 사리불은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 제가 잘하는 그런 생각을 하네요. ‘밥은 언제 먹나?’

유마거사는 사리불의 생각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먹는 것에 마음을 뺏겨 바른 진리 듣는 것을 소홀히 한다.”고 나무랍니다. 그러면서 나무람에 그치지 않고 “음식을 먹고 싶다면 대접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음식을 소개하지요. 바로 중향세계의 음식입니다. 중향세계는 ‘향기의 세계’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위로 갠지스강 42개 모래 수만큼의 세계를 지나서 있는 곳이라지요. 그곳의 부처님은 ‘향적여래(香積如來)’라는 분입니다. 그 세계는 오묘한 향기로 충만해 있으며, 모든 것이 각각 최상의 향기를 냅니다. 그러니 자연히 음식도 최상의 향기를 품은 음식일 수밖에요. 그 세계에 가서 음식을 얻어 올 보살을 찾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아 결국 유마거사가 화신(化身)을 만들어 그 세계로 보내 음식을 얻어 옵니다. 여기서 화신이라는 말은 범어의 ‘Avatar’를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친숙한 말이지요?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 등에서 자신이 조작하는 분신을 ‘아바타’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화신입니다. 그러니까 현 시대의 우리 모두는 화신을 부리는 신통력을 가졌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향기의 세계로 파견된 유마거사의 화신은 훌륭한 모습과 처신으로 그 세계 불보살들의 찬탄을 받으며, 향적여래로부터 무사히 음식을 얻어 옵니다. 아니, 음식만 얻어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의 보살들까지 우르르 함께 몰려옵니다. 자그마치 900만의 보살들이 오셨다네요. 그렇지만 앞서 사자좌를 빌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와 어떠한 충돌도 없이, 유마거사의 방에 넉넉하게 다들 들어오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그 아득히 먼 세계가 갑자기 이 세계와 교류를 하고, 두 세계가 겹쳐짐에도 서로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그냥 감탄만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해하는 고리를 찾아봐야 하겠네요. 쉬운 예를 들어서 말해보지요.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와 개나 고양이, 나아가 지렁이가 사는 세계는 같은 세계일까요?

쉽게 답해서는 안 될 사안입니다. 중생들의 업식에 나타나는 세계는 각각 다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물이라고 하는 대상이 아귀에게는 불이 된다고 합니다. 물이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인데, 아귀는 왜 불로 느끼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귀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전혀 다른데 어떤 접점으로 인해 같은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일까요? 매우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불교는 각각의 중생이 인식하는 세계는 각각 다른 세계라는 관점을 수용하고 있으며, 같은 공간에서 인식하는 접점을 ‘공업(共業)’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하나의 세계에 모든 중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중생이 각각의 업식에 따라 자신들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흔히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계(欲界)’라고 하지요? 욕망이 중심이 되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하지요. 끝없이 욕망과 연결된 관심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얽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개인도 각각의 욕망에 따라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각각의 욕망을 중심으로 세상을 구성하고 있잖아요?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제 세상을 얽어놓고, 그 속에 들어앉는 군상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상하면 좀 우스운 모습이군요.

어쨌든 그런 식으로 본다면, 각각 다른 중생의 업식에 따라 각각 다른 무수한 세계가 끝없이 겹쳐져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지렁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한 곳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거리가 가까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세상과 지렁이의 세상의 거리, 그것도 갠지스강 42개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를 건너야 하는 거리에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지렁이의 세계에 도달하기란 그렇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유마거사 같은 분은 어떨까요? 그분들은 우리의 업식과 지렁이의 업식 모두를 꿰뚫어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두 세계의 간격을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의 음식

너무 추상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네요. 글을 쓰는 저 자신이 갸우뚱할 정도면 듣는 분들이야 어떨까 생각되어 여기서 일단 중지! 그렇지만 역시 우리들 나름대로 쉽게 이해하는 고리는 하나 남겨둬야죠. 혹시 다른 사람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진정 그 세계에 도달했다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 할까요? 나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확장돼야 남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요?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진정으로 같은 세계를 공유했다고 느낄 정도가 되려면, 그리고 공간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려면 갠지스강 42개 모래 수만큼의 세계를 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마거사의 화신은 그 아득한 거리를 뛰어넘어 중향세계로 가서 최상의 향기를 지닌 음식을 얻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보살들도 우르르 이 세계를 방문했습니다. 이때 한 성문이 다시 의심을 냅니다. “이 적은 음식으로 어떻게 수많은 대중이 먹을 수 있을까?” 유마거사의 화신보살이 대답합니다. “걱정을 마세요! 이 음식은 절대 동나지 않는 음식이랍니다. 왜냐고요? 이 음식은 다함 없는 계정혜(戒定慧)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량없는 삼천대천 세계의 중생들이 수십만 겁 동안 먹어도 동이 날 수가 없답니다.”

여기서 이 음식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이 음식은 진리의 음식입니다. 〈유마경〉 한 권에 담긴 가르침이, 여러 사람이 함께 공유한다고 동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종류의 음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계정혜로부터 나온 참된 가르침의 음식, 그것은 많은 이들이 나눌수록 더더욱 빛나게 되어 더 많은 이들을 배부르게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음식을 먹는 이들이 됩니다. 〈유마경〉을 통해 그러한 중향세계, 향적여래가 남긴 음식을 맛보고, 그 향기에 젖어 드는 법열을 느낍니다. 적어도 진리에 대한 추구의 열정을 가진 분들에게는 먹어도 먹어도 끝없는 무한한 음식! 이 음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먹어도 동나지 않는 진리의 음식으로 대중공양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유마거사가 문수사리에게 청합니다. 이제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마치고 부처님을 찾아뵙자고요. 유마거사는 모든 대중을 손바닥 위에 올려 부처님 처소로 옮깁니다. 이런 정도의 신통이야 〈유마경〉에서는 가벼운 일이므로 그냥 넘어갑시다.

사리불에 이어 이제 아난존자가 가르침의 물꼬를 틉니다. 중향세계의 음식을 먹은 모든 이들의 털구멍에서 미묘한 향기가 난다고 사리불이 그 까닭을 묻자, 부처님이 그 이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때 아난존자의 질문이 새로운 물꼬를 틉니다. “이 미묘한 향기는 얼마나 오래갑니까?” 유마거사가 답합니다. “이 음식이 소화될 때까지 향기는 계속 남습니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나옵니다. “그럼, 언제 소화가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음식의 정체를 다시 드러내 줍니다. “번뇌를 끊어 바른 경지에 들지 못한 이는 그 단계를 벗어나야 소화가 되고,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는 욕망을 벗어난 뒤에 소화가 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지 못한 이는 그 마음을 낸 뒤 소화가 되고…….” 이 음식은 그렇게 보다 높은 인격으로 한 단계 올라서야 소화가 되는 음식입니다. 부처님은 한 가지 맛으로 설법을 하시지만, 듣는 중생들은 근기에 따라 각각 다른 이익을 얻듯이, 이 진리의 음식은 그 음식을 먹는 이가 한 단계 높은 성장을 이뤄낼 때 비로소 소화가 되는 것입니다. 향기도 그때 없어지지요. 어떤 가르침을 완전히 소화해낸 사람은 그 가르침의 냄새를 풍기고 다니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것이 되었기에 담담하게 실천해낼 뿐이지요.

〈삽화=전병준〉
〈삽화=전병준〉

향기불사

향기 나는 음식의 불사, 그것은 바로 ‘향기불사’입니다. 중향세계의 불사는 바로 향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럼 우리 사바세계의 불사는 무엇을 통해 이루어질까요? 감히 말합니다. “욕망을 통해서!”라고요. 중향세계의 중심은 향기이기에 향기를 통해 불사를 한다면, 우리 세계의 중심은 욕망이기에 욕망을 통해서 불사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욕망을 저열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욕망을 통해 불사를 이루고, 결국 그 욕망을 벗어나는 것 또한 욕망을 통해서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불국토에선 광명으로 불사를 짓고, 어떤 불국토에서는 온갖 음식으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불국토에서는 누대와 궁전으로 불사를 짓는다.” 결국 모든 불국토는 그 불국토 중생의 근기에 맞게 불사를 짓는 것이므로, 각각의 불국토 불사에 높고 낮은 차등이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참된 보살행을 설파하십니다. “보살은 크나큰 사랑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크나큰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대들 모두 부지런히 배우고 닦아야 한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에 중향세계에서 온 보살들은 자신들이 이 사바세계의 더러움에 대해 경멸하는 마음을 냈던 것을 참회하고, 또한 높은 가르침에 환희심을 내면서 돌아갑니다.

우리도 여기서 찬탄을 하고 환희심을 냅니다. 우리 사바세계의 저열한 욕망을 더럽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매개로 그 욕망이 덧없음을 드러내시며, 욕망을 매개로 한없는 불사를 일으키시는 부처님을!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받들어, 이 사바세계에서 향상심을 잃지 않고, 욕망의 물꼬를 서원으로 돌려 끝없는 불사를 일으키는 이들을. 물러나지 않는 대승의 큰마음을 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보살님들을! 바로 여러분이 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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